영화 <어톤먼트> 2007년
<어톤먼트Atonement>는 조 라이트가 감독한 2007년 공개된 영국의 로맨틱 전쟁 드라마 영화이다. 이언 매큐언의 2001년 소설 <속죄>를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에는 제임스 매커보이, 키라 나이틀리, 시얼샤 로넌, 로멀러 개리, 버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출연하고, 1930년대부터 시작된 사건과 그 결과를 60년 동안 기록하고 있다. 이 영화는 2007년 밴쿠버 국제 영화제와 제64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 되었다. 제80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음악상 수상을 포함한 최우수 작품상, 각색상과 시얼샤 로넌의 여우조연상을 포함한 6개 부문에 후보 지명되었다. 또한 제61회 영국 아카데미상(BAFTA)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미술상을 수상하였고, 제65회 골든 글로브상 영화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그 대본은 브라이어니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창작열에 사로잡혀 있던 이틀 동안 아침과 점심까지 거르면서 신들린 듯 써내려간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브라이어니는 포스터와 프로그램, 입장원을 직업 디자인했고, 비록 한쪽이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접을 수 있는 칸막이를 세워 매표소를 마련했으며, 빨간색 주름종이를 안쪽에 덧댄 매표함도 만들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난 지금, 그녀는 완성된 대본을 곱씹으며 멀리 북쪽 지방에서 올 사촌들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예행연습을 끝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다. 때로는 섬뜩함을, 때로는 지극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이 연극에서 브라이어니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운을 맞춘 서막에서 표현했듯이,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눈먼 사랑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13-14)
자신이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 브라이어니는 이제 다른 차원에서 만족을 찾게 되었다. 글쓰기는 자기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짜릿함뿐만 아니라 세상을 축소하여 손안에 넣는 즐거움까지 맛보게 해주었다. 단 다섯 페이지 안에 세상을, 장난감 농장보다 훨씬 더 기쁨을 주는 세상을 그려넣을 수 있었다. (P19)
소설은 직접적이고 단순해서 그 어느 것도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개인적 욕심이나 무능력 같은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고, 시간 압박을 느낄 필요도, 제한된 자원 때문에 애태울 필요도 없었다. 상상하고 바라는 대로 글을 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가 탄생했다. (P62)
목초지와 저택의 경계로 삼은 울타리 안쪽에 장미 정원이 있고, 더 가까이 오면 트리톤 분수가 있는데 그 분수를 둘러싼 낮은 담 옆에 세실리아가, 그 바로 앞에는 로비 터너가 서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그의 모습이 무언가 격식을 차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떠면 청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브라이어니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물에 빠진 공주를 구한 가난한 나무꾼이 결국에는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바로 그런 청혼의 순간 같았다. 내세울 것 없는 가정부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브라이어니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나온 로비 터너가, 정원사가 되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의대 진학을 생각중이라는 바로 그 로비 터너가 용감하게도 세실리아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신분의 경계를 넘어선 이런 도약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낭만적인 연애담이 아닌가. (P63-64)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몰이해가 불행을 불렀다. 그리고 오직 소설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두가 똑같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에 필요한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
그녀는 양순한 성격과 기가 막힌 윤내기 솜씨 -그녀가 윤내기에 쏟는 정성은 탤리스가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될 정도였다- 때문에 모두의 칭찬을 받았지만, 아들 로비와 함께 생계를 꾸려가고 아들을 무사히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난 세실리아와 여덟 살 난 리언이 그녀를 매우 좋아하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학교가 쉬는 날이면 여섯 살 난 아들을 저택에 데리고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로비는 정원뿐 아니라 저택 안 놀이방을 비롯해 아이들의 출입이 허용된 모든 곳에서 리언 남매와 함께 뛰어다니고 놀면서 성장했다. 나무 오르기 동무는 리언이었고 세실리아는 스스럼없이 로비의 손을 잡는,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신이 굉장히 현명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어린 동생 같았다. 몇 년 후 로비가 지역 내 그래머스쿨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을 때 잭 탤리스는 교복과 책 값을 대신 내주면서 그후로 줄곧 지속될 로비 후원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브라이어니가 태어났다. 난산을 한 후 에밀리는 오래도록 몸져누웠다. 그때 그레이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고, 그 덕분에 그레이스는 탤리스가에서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었다. (P133)
세실리아에게 주려던 진짜 편지는 대담하게 쫙 벌어져 어떻게 봐도 음란한, 음모로 덮인 왕관 모양의 질을 그린 <그림 1236> 위에 놓았고, 외설스러운 내용이 적힌 편지는 책상위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청껏 브라이어니를 불렀지만, 지금쯤이면 그애는 이미 현관 앞에 다다랐을 것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름모 모양의 희미한 황토색 빛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그애의 실루엣을 담은 채 잠시 그대로 머물다 사라져버렸다. 브라이어니가 집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것이다. (P143)
브라이어니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앞뒤 재지도 않고 편지봉투를 뜯었고, 폴리가 문을 열어주자 현관홀에 들어와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충격적인 내용 덕분에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의 편지를 뜯어보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다 알 필요가 있었고 알아야 마땅했다. 오빠를 다시 만난 것도 물론 기뻤지만, 사실 언니의 힐난조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감정 표현을 과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곧장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가 엄마의 명령에 착하게 순종하는 척했다. 사실은 언니를 피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빨리 혼자가 되어 로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현실이 삶이 가득한 소설의 첫 문단을 구상하고 싶었던 거였다. (P168-169)
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본 것은 분명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 혹은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의해 그 형태가 일부 만들어진 것이었다.
브라이어니가 문을 열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을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재를 비추는 빛이라고는 책상 위에 놓인 초록색 유리갓이 달린 램프에서 나오는 빛뿐이었는데, 그것도 램프 아래 가죽받침만을 동그랗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몇 걸음 더 들어가자 먼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의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그들은 꼼짝도 않고 있었지만 브라이어니는 자신이 공격의 와중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주먹싸움의 와중에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목격한 광경이 이제껏 예상하며 두려워했던 최악의 상황과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나머지. 자신이 지나치게 걱정을 해서 환영이 보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브라이어니는 로비의 어깨 너머로 언니의 공포에 찬 눈을 응시했다. 로비는 고개를 돌려 침입자 브라이어니를 바라보았지만 세실리아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세실리아의 몸에 밀착시키고 그녀의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서재의 책꽂이가 직각을 이루는 구석으로 그녀를 밀어붙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P183)
마음을 진정시킨 세실리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몇 주 동안 그랬어......” 그리고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순간 로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이번에는 좀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몇 달이었는지도 몰라. 모르겠어. 그런데 오늘..... 하루종일 모든게 이상했어.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어.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거야. 오늘은 모든 게 너무 강렬하고 현실적으로 보였어. 심지어 내 손조차 달라 보였지.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들을 다시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그리고 하루종일 너한테, 그리고 나 자신한테 화가 났어. 널 다시는 안 보는 게. 보더라도 다시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차라리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의대로 떠나버리는 게 나한텐 잘된 일이라고도 생각했어. 그 정도로 화가 났던 거야. 그걸 생각하지 않으려다보니 그렇게 되었나봐. 참 편리하기도 하지.........” (P197-198)
롤라의 엄마가 그랬듯 롤라 역시 누가 말린다고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애는 에밀 리가 편지를 읽자마자 극적으로 식당을 나가버림으로써 도망간 동생들에게서 주인공 자리를 빼앗았다. “엄마가 날 죽일 거예요”라니. 지금 롤라를 생기 넘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엄마의 정신이었다. 쌍둥이 형제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분명 롤라를 찾는 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기애와 자기연민이 강한 그 아이는 쌍둥이들이 돌아온 후에도 어둠 속에 남아 세상의 불행을 혼자 다 겪고 있다는 듯 비통해할 것이다. 마침내 롤라가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의 안도감은 극에 달할 것이고, 모든 관심은 그애에게 쏠릴 것이다. 에밀리는 오늘 오후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서 롤라가 브라이어니의 연극을 망쳐버릴 거라고 걱정했었다. 이젤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대각선으로 찢겨나간 것은 그것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가 예측했듯 브라이어니는 화가 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데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 걸 보면 롤라는 허마이어니를 쏙 빼닮았다. (P217-218)
하프시코드 위에 놓인 램프 주위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나방 두세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누군가 하프시코드를 다시 연주할 날이 올까? 날벌레들이 다른 벌레에게 잡아먹힐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빛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그녀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런 불가사의는 설명하려 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지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 위를 날아다니는 곤충 몇 마리를 가리키며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곤충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곤충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 끝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이유를 따지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P220)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빨리 끝나버리는가. 압도되지도 않았고 허무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빨리 끝나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3)
롤라가 말했다. “그가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났어. 나를 땅바닥에 쓰러뜨려서..... 그러고는....... 내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손으로 내 눈을 가려버렸어. 그래서 나는 제대로, 도저히......”
“언니.......” 브라이어니가 손을 뻗어 사촌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직은 말라 있었지만, 곧 눈물로 얼룩질 터였다. “내 말 들어봐.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그를 알고 지냈는걸. 내가 그를 봤어.”
“난 확실히 말할 수 없어. 그런데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어. 숨쉬는 거랑 신음소리만 들었어. 보지는 못했고,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는 거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힐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정해졌다. 성폭행범이 누구인지 롤라가 자신 없어할 때마다 브라이어니의 확신은 더 굳어져갔다. 이 순간 이후로 롤라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상처받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으로 한 발 물러나 자상한 보살핌을 받는 환자로서, 신체적 정신적 충격에서 회복되고 있는 피해자로서, 그리고 길 잃은 아이로서 어른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되었다. 불쌍한 피해자 역할을 하며 어른들로 하여금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했을까?’라는 죄책감을 갖게만 하면 되었다. 롤라는 어른들을 도울 힘이 없을뿐더러 도울 필요도 없었다. (P247-248)
그러나 그 다음 한 주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렇게도 굳건했던 확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브라이어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문자 그대로 자기가 본 것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눈이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바로 곁에 있었던 롤라의 얼굴조차 둥그런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는데, 하물며 몇 피트 떨어진 곳에 있다가 브라이어니가 다가가자 등을 돌려 달아난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체격과 움직임이 눈에 익었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알고 있고 경험한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정해주었다. 말하자면 진실은 조화를 이루었고, 상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진실이 그녀의 눈을 이끌었다. 따라서 그녀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내가 그 사람을 봤어요”라는 말은 그녀의 진심이 담긴 열의에 찬 발언이었을뿐 아니라 완벽히 정직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의도한 바는 사람들이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이해한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어서, 자신이 이런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지곤 했다. (P249-250)
그녀는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자신을 가두고 맹목적으로 걸어들어갔으며, 너무나 어렸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갔던 길을 되돌아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독립심이 없었거나 독립심을 가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P252)
세실리아가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빼앗으려고 다가가자 리언뿐 아니라 경감들도 일어서서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마셜도 일어서긴 했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 편지는 내 거야.” 세실리아가 외쳤다. “아무도 읽을 권리 없어!” 에밀리는 이 소란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고 나서는 고개를 들어 딸의 분노에 찬 부르짖음에 차갑게 대꾸했다.
“네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면, 교육도 많이 받은 네가 이 편지를 내게 가지고 와서 상의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네 사촌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다.”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방 한가운데 서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신이 이런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방안에 있는 이들을 한 명씩 노려보았다. (P263)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작정이었고, 살아남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따라오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소총만 붙잡고 있었다. 적어도 의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어깨는 넓고 건장하며 손이 큼지막한 메이스는 술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는데, 한 손만으로도 한 옥타브 반은 너끈히 넘나들 것 같았다. 로비는 그들이 놀려대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지금 차도를 벗어난 길을 걸으며 바라는 것은 아까 본 어린아이의 다리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 길은 돌벽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로 이어졌는데, 그 오솔길은 얼마 가지 않아 차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골짜기로 이어졌다. 골짜기 아래로는 흙탕물이 흘렀고, 그들은 카펫처럼 깔린 작은 미나리 위에 박혀 있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P280-281)
다른 패잔병들과 함께 헛간에 숨어들어 새우잠을 자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나았다. 여기에는 숲이 울창한 골짜기와 시냇물, 포플러나무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있었다. 그를 죽이지 않는 한 이것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희망이 있었다. 기다릴게. 돌아와.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와 새 주소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존해야 할 이유였고, 급강하폭격기가 독수리처럼 맴돌며 먹이를 기다리는 주요 도로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P294)
그녀는 이렇게 답장했다. “그들은 네게서 등을 돌렸어. 그들 모두, 심지어 아버지마저도. 그들이 너의 인생을 망쳐놓을 때 내 인생도 함께 망쳐놓은 거야. 그들은 어리석고 병적으로 흥분해 있던 어린 여자애의 증언을 믿기로 결정했어. 그 증언을 번복할 여지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 애를 부추긴 거나 마찬가지고. 그애가 겨우 열세 살 어린애였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다시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른 식구들이 한 짓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인연을 끊고 나니까 그들의 어리석음 뒤에 숨어 있는 속물근성이 보이기 시작해. 엄마는 네가 최우등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했어. 아버지는 일에만 빠져 있었고, 리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줏대 없는 바보였지. 하드먼 씨가 대니를 덮어주려고 하는데도 내 가족들 중 누구 하나 경찰한테 대니를 심문해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이미 너를 범인으로 단정지었던 경찰 역시 일이 꼬이는 걸 원치 않았고, 내 말이 냉정하다는 거 알고,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아. 솔직히 난 새로운 생활과 새 친구들에 아주 만족해. 이제야 제대로 숨쉬고 사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난 살아갈 이유가 있잖아. 너 말이야. 현실적으로 난 너와 가족 중 한쪽을 선택해야 했어. 양쪽을 다 가질 순 없잖아? 난 너를 선택했고 단 한 순간도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해본 적이 없어. 사랑해. 난 자기를 완전히 믿고 있어. 자기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내 삶의 이유야. 시.”
로비는 어둠 속에서 그 마지막 두 문장을 소리 없이 되뇌어보았다. 내 삶의 이유. 생활의 이유가 아니라 삶의 이유. 바로 그거였다. 그녀는 그의 삶의 이유였고, 그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였다. (P303-304)
그녀의 어깨를 농가 대문 쪽으로 미는데, 슈투카 특유의 사이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악몽이 과학의 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누군가가, 한낱 인간이 이런 악마의 소리를 상상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효과는 만점이었다.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고, 점점 더 커지며 모든 사람이 곧 맞닥뜨릴 파멸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운명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 (P341)
그는 다시 쓰러져 누웠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잠뿐이었다. 천 시간만 잘 수 있다면, 잠들기는 아까보다 쉬웠다. 역한 쇠맛이 나긴 했지만 물을 마시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네틀이 전해준 소식과 그의 달래는 듯한 말투도 도움이 되었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가 정렬하고 해변을 향해 행군해간다. 질서정연한 행군이 될 것이다. 케임브리지의 어떤 교수도 행군 대형의 장점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했다. 시인의 영혼을 사랑했다. 그러나 시인이 살아남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하나의 집단으로 살아남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P380)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소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래놓고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한 편을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 소설을 잡지사에 보냄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한 건 아닐까?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 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방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길 원치 않았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P458)
세실리아가 드러먼드 수간호사를 아는지, 자기가 있던 병원에서 동생이 수습 간호사 생활을 하는 것에 기분 나빠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었다. 예전에 세실리아는 항상 엄마 같은 투나 잘난 체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우리 동생!” 하고 부르면서.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여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의 말투가 엄격하고 딱딱해서 브라이어니는 지금은 로비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뒤에 현관문이 열려 있다는 걸 의식하며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어디서 일해?”
“모덴 근처. 응급의료 전담 군병원이야.”
응급의료 전담 군병원. 철수작전중 가장 위중한 부상을 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 물어볼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아 자매는 한동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P475)
마침내 세실리아가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네 편지 받고 변호사를 찾아갔었어. 새로운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일이 간단하지 않대. 네가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단 얘기야. 롤라는 계속 모른다고 할 테고, 유일한 희망은 하드먼 씨였는데, 세상을 떠났잖아.”
“하드먼 씨?” 그의 죽음이, 그리고 그와 이 사건의 관계가 브라이어니를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브라이어니는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날 밤 하드먼 씨도 쌍둥이를 찾으러 나갔나? 그가 무슨 말을 했지? 법정에서 그녀가 모르는 어떤 증언이 나왔던가?
“그렇게 된 것 몰랐니?”
“몰랐어, 그런데.......”
“믿을 수가 없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무적으로 말하려던 세실리아의 노력이 무너지고 있었다. (P480)
그녀의 범죄를 단정하는 언니의 말을 듣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언니의 시각이 자신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브라이어니는 자신이 나약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럽고 비겁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증오해왔다. 그러나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언니는 브라이어니가 거짓말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순간 자신을 방어하고 싶은 본능이 일었다. 사람들을 속이려던 게 아니었다. 악의를 품고 그렇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믿어주겠는가? (P481-482)
세실리아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폴 마셜이었어.”
갑자기 찾아든 침묵 속에서 브라이어니는 세실리아와 로비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오 년 동안 지켜왔던 믿음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사실이라 해도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핵심은 무엇 하나 그로 인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브라이어니의 잘못도 그대로였다.
로비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마셜?”
“응”
“네가 그를 봤어?”
“그 사람 키의 남자를 봤어.”
“내 키도 그 정도지.”
“맞아.”
세실리아가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배를 찾는 모양이었다. 로비가 담뱃갑을 찾아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세실리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후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 그는 멍청이야. 그건 나도 알아.......”
“탐욕스러운 멍청이지.” 로비가 말했다. “그렇더라도 마셜과 롤라 퀸시라니 상상이 안 가. 단 오 분 동안이라도 그 두 사람이.........” (P496)
원래의 건물은 런던 대공습 때 집중 폭격을 받아 완전히 부서졌고 -다행히도 그때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후 다시 세운 건물과 고층빌딩들은 국가적인 수치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전쟁기간에 나는 성 토머스 병원뿐 아니라 올더 헤이, 로열 이스트 서식스, 이렇게 세 군데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글에서는 모든 경험을 집중시키기 위해 하나로 통합했다. 편리한 왜곡이었고, 진실에 대해 내가 범한 죄 중 가장 가벼운 죄이기도 했다. (P510)
범죄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도 있었다. 연인들과 그들을 위한 행복한 결말. 이것이 밤새도록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저 석양 속으로 노 저어갑니다. 불행한 반전, <아라벨라의 시련>을 쓴 이후로 내가 그렇게 먼길을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멀리 길을 둘러가다가 서둘러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내 연인들이 내가 그들 곁에서 멀어져가는 동안 런던 남부의 지하철역 바깥의 인도에 나란히 서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은 이 마지막 원고뿐이다. 그전의 원고들은 모두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로비 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뒨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럼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키먼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라이어니는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언니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 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결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하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의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너무 겁을 먹었고, 내 앞에 남은 삶의 단편들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게다가 내게는 망각이라는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 비관론을 끝까지 지켜나갈 용기가 이젠 없다. 내가 죽고, 마셜 부부가 죽고, 마침내 소설이 출판되면, 우리는 모두 내 창작품 안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브라이어니는 밸럼에서 한 침대를 쓰면서 주인 여자를 분노하게 했던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상 속 인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내 글이 소설이 되기 위해 어떤 사건들과 어떤 사람들을 왜곡했는지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데,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는 독자들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연인들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산다. 내 마지막 원고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원고가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의 충동적이고 운좋은 언니와 그녀의 의사 왕자님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에게도 소설가에게도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다. 오직 속죄를 위한 노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P531-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