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Mar 02. 2024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의 모험>

영화 <톰소여의 모험>  2020년

<톰 소여>(1973) <톰 소여의 모험>(1938) <디 애니메이티드 어드벤처스 오브 톰 소여>(1998)     

톰은 그러는 동안 줄곧 걱정 근심 없이 편하게, 그것도 많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담장을 세겹이나 칠할 수 있었다! 만약 흰 회반죽이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톰은 온 마을 아이들을 완전히 빈털터리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톰은 이 세상이 그렇게 공허하지만은 않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행동에 관한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어른이건 아이건 어떤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이 책의 저자처럼 현명하고 훌륭한 철학자였다면, 노동이란 무엇이든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놀이란 무엇이든 의무적으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이치를 알게 되면 조화(造花)를 만들거나 물레방아를 밟아 돌리는 일은 노동인 반면, 볼링을 치거나 몽블랑 산을 등반하는 일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리라. 영국에는 여름철에 하루 일정으로 사두마차(四頭馬車)를 몰고 30킬로미터에서 5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다니는 부유한 신사들이 있다. 그런 특권을 얻기 위해서 꽤 많은 돈이 드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신사들이 그런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 일은 노동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곧 그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톰은 자신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을 두고 얼마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담장 칠하는 일이 모두 끝났다고 보고하기 위해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P36-37)     


톰은 동네에서 이름난 주정뱅이의 아들이자 부랑 소년인 허클베리 핀과 우연히 마주쳤다. 허클베리는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몹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 보고 어른들이 말려도 그와 어울려 놀고 싶어 하면서 그 애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점잖은 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톰도 허클베리와 같은 화려한 떠돌이 생활이 부러웠지만, 그 아이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톰은 기회만 생기면 그와 함께 놀았다. 허클베리는 언제나 어른들이 입다 버린 헌옷을 입고 다녔는데 넝마 조각 같은 누더기 옷을 사시사철 피는 꽃처럼 펄럭거리고 다녔다. 모자는 낡아 빠진 폐물로, 천이 큼지막하게 떨어져 나간 챙이 초승달 모양으로 너덜거렸다.             (P84-85)  

   

“그림이 점점 멋있어지네. 나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려울 거 없어.” 톰이 속삭였다. “내가 가르쳐 줄게.”

“어머나, 정말? 언제 가르쳐 줄 거야?”

“점심시간에. 너 점심 먹으러 집에 가니?”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좋았어.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자, 네 이름이 뭐니?”

“베키 새처라고 해. 네 이름은? 아, 난 알고 있어. 토머스 소여지.”

“그건 매 맞을 때 불리는 이름이야. 내가 얌전하게 굴 때는 톰이라고 해. 그러니까 넌 톰이라고 불러. 그럴 거지?”

“알았어.”

이제 톰은 다시 소녀가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가리고 석판 위에 글씨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P96)     

[인디언 살인사건]

포터와 인전 조는 밧줄과 삽 두세 자루를 얹어 놓은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수레에 실은 짐을 내려놓더니 바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의사는 등불을 무덤 머리맡에 놓고 느릅나무 쪽으로 걸어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이들이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가까운 거리였다. 

“빨리 서두르시오!” 의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달이 뜰 것 같으니까요.”

그러자 두 사람은 투덜거리며 대답하고는 삽질을 계속했다. 얼마 동안 삽에 담긴 흙과 자갈을 내던질 때 들리는 신경 거슬리게 하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몹시 단조로운 소리였다. 마침내 삽이 나무 관에 닿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일이 분이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관을 들어 땅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삽으로 관 뚜껑을 뜯더니 시체를 꺼내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구름사이로 달이 나타나자 생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그들은 시체를 손수레에 옮겨 싣고 나서 그 위에 담요를 덮은 뒤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포터 영감이 큼직한 용수철 칼을 꺼내 아래쪽에 길게 늘어진 밧줄을 잘라 버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빌어먹을 시체가 모두 준비됐소. 의사 양반. 그러니 5달러를 더 줘야겠소이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거요.”

“암, 그렇고말고!” 인전 조가 맞장구를 쳤다.  

“이거 보시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의사가 대꾸했다. “품삯을 먼저 받아야겠다고 해서 아까 모두 주었잖소.”

“그랬지. 하지만 내게 빚진 게 또 있거든.” 인전 조가 지금은 서 있는 의사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했다. “오 년 전 어느 날 밤이었지. 뭘 좀 얻어먹으려고 당신 집에 갔더니 당신은 당신 아비의 부엌에서 나를 쫓아냈어. 그러면서 나더러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지. 100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꼭 복수하고 말겠다고 욕을 했더니 당신 아비가 나를 부랑자 취급해 유치장에 처넣었단 말이야. 내가 그 일을 잊어버렸을 것 같아? 내 몸 속에 인디언 피가 공연히 흐르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이제 당신이 내 손에 걸려들었으니 결판을 짓고 말겠다. 이 말씀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이때쯤 해서 조는 의사의 턱밑에 주먹을 들이대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갑자기 번개같이 주먹을 휘둘러 그 건달을 땅바닥에 때려눕혔다. 그러자 포터는 들고 있던 잭나이프를 떨어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봐라, 내 친구를 쳤어!”

다음 순간 포터는 의사에게 달려들었고, 두 사람은 맞붙어 혼신의 힘을 다해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두 사람의 발뒤꿈치에 밟혀 땅바닥의 풀이 짓이겨지고 흙이 파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분노의 눈빛을 이글거리며 인전 조가 벌떡 일어나더니 포터가 떨어뜨린 잭나이프를 집어 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싸우고 있는 두 사람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 갑자기 의사가 포터를 뿌리치고 몸을 휙 돌려 일어나더니 윌리엄스 영감의 무덤에 꽃여 있던 묵직한 나무 널빤지를 뽑아 포터를 힘껏 내리쳐 땅에 넘어뜨렸다. 이와 동시에 혼혈 인디언은 기회를 잡아 젊은 의사의 가슴에 깊숙이 칼을 꽂았다. 의사가 비틀거리며 포터의 몸뚱이 위에 쓰러지자 포터는 그의 피로 온통 범벅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달이 구름에 가려 이 무서운 광경이 보이지 않자, 겁에 질린 두 아이는 어둠 속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P126-128)     

“헉,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될 것 같니?”

“만약 의사 선생이 죽었다면 죽인 사람은 교수형에 처해지겠지.”

“그럴까?”

“그렇고말고. 틀림없어, 톰.”

톰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신고하지? 우리가 해야 하나?”

“너 정신 나갔니? 만약 무슨 일이 생겨서 인전 조가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는다고 쳐 봐. 그럼 그자는 우리를 어느 때고 죽이려 할 거야. 그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지.”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점이야, 헉.”

“누가 신고를 해야 한다면 머프 포터 영감더러 하라지. 물론 그 사람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바보라면 말이ㅑ. 그 사람은 늘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있으니까.”

톰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헉, 머프 포터 영감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신고를 하니?”

“그 사람이 모르긴 왜 몰라?”

“인전 조가 의사를 죽였을 때 그는 이미 묘비 막대기에 맞고 정신을 잃었잖아 그러니 뭘 볼 수 있었겠어? 또 뭘 알 수 있겠냔 말이야?”             (P133)   

  

“왜 촛불이 그렇게 흔들리는 거냐?” 폴리 이모가 물었다. 그래서 톰은 서둘러 들어갔다. “또 방문이 열린 모양이로군. 그럴 줄 알았어.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여야지. 얘, 시드야, 가서 문 좀 잘 닫고 오려무나.”

그 사이에 톰은 얼른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착 엎드리고 잠시 ‘숨을 가라앉힌’ 뒤 폴리 이모의 발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으로 기어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말이에요.” 폴리 이모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 애는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우. 다만 장난이 심해서 탈이었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고요.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이었지요. 하지만 남을 해치거나 그런 못된 짓은 하지 않아요. 그렇게 마음씨 착한 아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러더니 폴리 이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P190-191)     


작문의 주제는 ‘우정’, ‘지난날의 추억’, ‘역사 속의 종교’, ‘꿈나라’, ‘문화의 아침’, ‘정부 형태의 비교 및 대조’, ‘우울’, ‘효(孝)’, ‘마음의 갈망’ 등으로서 그들에 앞서 그들의 어머니들, 그들의 할머니들, 또는 저멀리 십자군 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성 선조가 이와 비슷한 자리에서 장식했던 것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작문에서 으레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애틋한 우수(憂愁)의 감정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미사여구’를 지나치게 많이 나열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특별히 소중하게 아껴 써야 할 어휘와 표현을 실오라기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무턱대고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글을 눈에 띄게 손상시키는 특징이라면 마치 개가 병신이 된 꼬리 흔들어 대는 것처럼 끝에 가서 고질적으로 따분한 설교를 늘어놓는다는 점이었다. 그 주제가 뭐든지 간에 억지로 머리를 짜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하며 교훈을 얻을 만한 이런저런 내용에 설교를 쑤셔 넣는 것이다. 누가 봐도 뻔한 위선인 줄 알면서도 이런 설교는 아직껏 학교에서 추방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대로 버티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가 종말을 고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버젓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이 나라에 있는 어느 학교에 가 보아도 젊은 처녀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작문의 끝을 설교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누구보다도 경박하고 종교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처녀들이 쓴 작품이 언제나 가장 길이가 길고 가장 심하게 거룩한 체를 한다. 그러나 이 얘기는 이제 그만 접어 두기로 하자. 소박한 진실은 언제나 재미가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P255-256)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무덤가 옆 느릅나무들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인전 조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지만 왜 놀라는 기색이었다. 

“누구하고 같이 있었는가?”

“예, 같이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사람은.......”

“잠깐....... 잠깐만 기다리거라. 같이 간 사람의 이름은 대지 않아도 괜찮아. 적절한 시기에 증인으로 부를 테니까. 그때 뭘 가지고 갔었는가?”

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해라, 얘야.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 진실이란 언제나 존경받는 것이니까. 그곳에 뭘 갖고 갔지?”

“죽은........ 고양이 한 마리밖에는 없었는데요.”

방청석에서 잔잔한 웃음소리가 먼저 나가자 재판장이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그 죽은 고양이의 뼈를 증거물로 제출하겠습니다. 자, 얘야. 이제 그때 일어났던 일을 빠짐없이 우리한테 얘기해 보거라. 네가 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조금도 무서워할 것 없다.”

톰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떠듬거렸지만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말이 술술 쉽게 나왔다. 얼마 동안 톰의 말소리만이 들릴 뿐 법정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방청객들의 눈이 온통 톰에게 쏠려 있었다. 입술을 벌리고 숨을 죽인 채 톰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의 매력에 끌려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슴을 졸이는 긴장감이 절정에 이른 것은 톰이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묘비를 내리치자 머프 포터가 쓰러지고, 그 순간 인전 조가 포터의 주머니칼을 집어 들고는......”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혼혈 인전 조가 창문을 향해 번개처럼 재빠르게 달려가더니, 제지하려는 사람들을 헤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P281-282)     


“이걸 포기하고 이 마을에서 영원히 그냥 떠나가라고? 지금 포기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몰라. 전에도 말했고 지금 또다시 되풀이해 말하네만, 난 저 여자의 돈 따위는 관심 없어. 그건 자네가 가지라고, 저 여자의 남편이 나에게 몹시 못되게 굴었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치안 판사로 있으면서 걸핏하면 나를 부랑자로 몰아 유치장에 처넣었거든. 어디 그뿐인줄 알아, 그건 새 발의 피야! 말채찍으로 나를 마구 갈기기도 했어! 감옥 앞마당에 세워 놓고 검둥이처럼 나를 말채찍으로 때렸단 말이야!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앞에서! 말채찍으로 때렸다고! 이제 알겠어? 그놈은 나한테 실컷 못되게 굴더니만 그만 뒈져 버렸어. 하지만 그놈의 여편네한테라도 분풀이를 해야겠단 말씀이야.”

“아, 그렇다고 죽이진 마시오! 그것만은 안 되오!”

“죽인다고? 누가 죽인댔나? 물론 그놈이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이겠지만, 그놈 계집은 죽이지 않아. 여자에게 복수할 땐 죽이는 게 아니거든, 바보 같은 소리! 상판대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거야. 그년의 콧구멍을 찢어 놓는 거지. 또 귀때기에 암퇘지처럼 새김 눈을 넣는 거야!”

“맙소사, 그건......”              (P334-335)     

그는 베키를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뜨린 자신을 꾸짖고 저주했다. 그랬더니 이것이 조금 효과가 있었다. 톰이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다시 희망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톰이 가자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못은 톰뿐만 아니라 자기한테도 똑같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톰과 베키는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었다. 두 아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걷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얼마 동안 희망이 다시 솟아나는 기미가 보였다. 희망을 뒷받침할 만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희망이라는 것이 나이를 먹고 실패에 익숙해져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P362)     


톰은 주머니에서 연줄을 꺼내 바위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속에 묶어 놓고 베키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톰이 앞장서서 연줄을 조금씩 풀어 가며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스무 발짝쯤 나아가니 길이 끊어지고 ‘절벽’이 나타났다. 톰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처음에는 밑을, 그 다음에는 손이 닿는 데까지 멀리 귀퉁이를 두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좀 더 멀리 팔을 뻗어 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2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손이 바위 뒤쪽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톰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막 소리를 질렀다. 곧바로 그 손의 주인이 뒤따라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인전 조였다! 톰은 온몸이 마비가 된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톰은 그 가짜 ‘스페인 사람’이 도망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크게 안심했다. 톰은 조가 자기의 음성을 알아듣고 다시 와서 법정에서 증언을 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P368-369)    

 

“그래, 너 말고도 너 같은 녀석들이 또 있을 테지, 톰. 그건 불을 보듯 뻔해. 하지만 우리가 조치를 취해 놓았거든, 이젠 그 동굴 속에서 길을 잃는 아이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어째서요?”

“이 주일 전에 내가 그 동굴 출입문을 두꺼운 철판으로 덮어 버렸거든. 거기다 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웠고, 그 열쇠는 내가 갖고 있단다.”

톰의 얼굴이 금방 백지장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왜 그러는 거냐, 얘야? 누가 어서 빨리 가서 물 좀 가져와! 어서 빨리!”

누군가가 물을 가져와 톰의 얼굴에 끼얹었다. 

“아, 이제 정신을 차리는 것 같구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톰?”

“아, 판사님, 그 동굴 안에 인전 조가 있다고요!”              (P375-376)     


이 불행한 사나이는 가엾게도 굶어서 죽고 만 것이다. 바로 근처에서 석순 하나가 머리 위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몇 세기를 두고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시계가 똑딱거리듯 정확하게 삼 분마다 똑똑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귀중한 물방울을 얻기 위해, 포로가 된 사나이는 석순 끝을 잘라 버리고는 그 그루터기에 돌멩이 하나를 갖다 놓은 뒤 얕지만 움푹하게 안쪽을 파냈다. 스물네 시간이 지나야 겨우 디저트용 스푼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물이 고였다. 그 물방울은 피라미드가 막 세워졌을 때도, 트로이가 함락되었을 때도, 로마를 세울 기초가 다져졌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정복왕’이 대영 제국을 창건했을 때도,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났을 때도, 그리고 렉싱턴의 대학살이 ‘뉴스 거리’가 되었을 때도 똑같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다. 이런 모든 일이 역사의 뒤안길로, 전통의 뒷골목으로, 망각의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여전히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으리라. 세상의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고 사명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물방울은 겨우 한순간 이 속절없는 벌레 같은 인간의 갈증을 달래 주기 위해 지난 5000년 동안 쉴 새 없이 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10000년의 세월을 위해 또 다른 목적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아무러면 어떤가. 이 불운한 혼혈아가 그 소중한 물을 받기 위해 돌을 파낸 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도 맥두걸 동굴의 장관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은 그 애처로운 돌과 함께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바라본다. 인전 조가 사용한 돌 겁은 동굴의 진기한 구경거리 목록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힌다. 심지어 ‘알라딘의 궁전’의 인기도 그 컵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P378-379)   


이전 03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