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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03. 2024

로렌 올리버의 <7번째 내가 죽던 날>

영화 <7번째 내가 죽던 날> 2017년

딱 하루만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뭘 하고 싶니? 누구와 함께할 거야?      

흔히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인생 전체가 눈앞에 스쳐간다고들 하지만, 나한테는 그렇지 않았어.

솔직히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된다는 이야기가 정말 끔찍하다고 항상 생각했어.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묻어 놓고 잊어버리는 편이 낫거든.          (P6)    

 

엘로디가 온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 애는 우리 중에서 가장 술에 약하다. 앨리는 남은 보드카 병을 가방에 넣어 두었다. 지금 술기운을 쫓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린지가 운전을 하는 이유는 밤새 술을 마셔도 거의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도착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대단히 가벼워서 마치 하얀 물방울 커튼처럼 공기 속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켄트의 집에 간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켄트의 아홉 살 생일 파티였던가? 그래서 그 집이 얼마나 숲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집 앞길은 뱀처럼 구불구불 길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굽이치는 자갈길과 머리 위 가까운 곳에 매달려 있는 죽은 나뭇가지,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작은 빗방울을 밝히는 흐릿한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P59)     

린지는 욕설을 내뱉고 의자 쿠션에서 불똥을 털어 내려고 했고, 엘로디와 앨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고, 나는 애들에게 우리가 5월에 눈의 천사를 만들려고 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었다. 시계가 찰카닥 움직였다. 12:39. 타이어가 젖은 도로에서 끼익 소리를 냈고, 차 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 차서 유령처럼 작은 연기 덩어리들이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그 순간 갑자기 차 앞으로 하얀 번개 같은 게 지나갔다. 린지가 뭔가 비명을 질렀다. 뭔지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앉아!’나 ‘아, 씨팔!’이나 ‘앞에!’ 정도였던 것 같다. 갑자기 차가 도로 옆의 시커먼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끔찍한 끼이이익 소리가 들렸다. 금속과 금속이 긁히고, 유리가 깨지고, 차가 반으로 접히는 소리. 그리고 타는 냄새가 났다. 린지가 담뱃불을 껐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일이 일어난 거야. 죽음의 순간은 엄청나게 강렬한 열기와 소리, 고통으로 가득하단다.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두 개로 가르고, 그슬리고, 태우고, 찢어 놓는 것 같아, 비명에도 감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게 아닐까.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           (P83)    

 

기억해야 하는 게 또 하나 있어. 사람은 희망으로 산다는 것. 죽었다고 해도 그게 널 살아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거야.            (P144)     


“만약 너희가 하루만 계속해서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어느 날을 고를 거야?”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잠시 후 앨 리가 베개에 대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직 피곤하지 않았다, 여기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에, 나를 가두었던 시간과 공간의 거품을 깨뜨리고 나왔다는 데 지나치게 흥분한 탓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눈을 감고, 나라면 어느 날을 고를까 생각해 보았다. 기억이 주르르 떠오르고 다시 지나갔다. 수십 번, 수백 번의 파티, 린지와의 쇼핑 여행, 우르르 모여 누구네 집에서 잔 일이나 엘로디와 함께 영화 <노트북>을 보고 울었던 것, 그 이전의 가족 여행이나 여덟 번째 생일 파티, 내가 처음으로 수영장의 높은 다이빙대에서 다이빙을 했던 날. 그때 물이 내 코에서 꼬르르 거품을 내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쩐지 완벽하지 않고, 얼룩지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P178)     

“줄리엣 사이크스가 죽었단다. 오늘밤에 자살했어.”   

정적,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앨리는 손톱을 깨물던 걸 멈추었고, 린지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몇 초 동안, 내 심장박동까지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기묘하게 세상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몸 밖으로 빠져나와서 멀리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것처럼.         (P182-183)     


나는 다른 빛, 다른 태양, 다른 하늘이 미친 듯이 그리웠다. 전에는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빛이 있는지, 하늘은 또 얼마나 많은지 등등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봄의 엷고 밝은 하늘은 온 세상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7월의 정오는 풍부하고 밝고 대답한 빛깔이고, 또 폭풍우가 몰려오는 자줏빛 하늘과 번개가 치기 직전의 기묘한 푸른빛, 누군가 마약을 하고서 보는 환각 같은 온갖 색깔의 저녁놀.

그걸 더 즐겼어야 했는데, 그걸 전부 기억해 놨어야 했는데. 아름다운 일몰이 지는 날 죽었어야 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죽었어야 했다. 하여간에 오늘 말고 다른 날 죽었어야 했다. 창문에 이마를 대고서 나는 창문을 지나 하늘까지 주먹을 뻗어 올려서 하늘이 거울처럼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P196)     

그날 아침에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선을 넘었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선은 의미를 잃는다는 거야.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면 쿵 소리가 났을까 안 났을까?’라는 오래된 수수께끼랑 비슷하지.

계속해서 더 멀리 선을 그리면서, 매번 그걸 넘어갈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절벽 가장자리에서 떨어지게 되는 거야. 궤도를 벗어나는 게,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는 곳까지 가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면 아마 깜짝놀랄 걸. 자신을 잃는 게, 길을 잃는 게 말이야.

아니, 넌 놀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너희 중 몇 명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안됐구나.              (P204)       

 

“줄리엣.”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름이 목에서 걸렸다. 두려움에 돌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또 움직이려고 했지만, 손을 뻗어 그 애를 잡으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그러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며 어둠 속에서 은색 레인지 로버가 튀어나온 순간, 나는 상황을 깨닫고 말았다. 새나 천사처럼, 마치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것처럼 줄리엣은 팔을 벌리고 도로로 뛰어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비명과 끔찍한 쾅 소리가 났다. 줄리엣의 몸이 린지의 차 후드 너머로 날아가 도로에 엎드린 상태로 쿵 떨어졌고, 레인지 로버는 숲으로 미끄러져 부딪쳤다. 그러곤 산산이 부서지고 나무를 들이받아 구겨졌다. 긴 연기와 불길이 공중으로 솟구치기 시작했고, 나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나 자신이란 걸 깨달았다.           (P339-340)     

이번에 꿈을 꿀 때는 소리가 있었어. 어둠 속으로 떨어지던 순간 의사의 진료실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들리는 것 같은 딸랑거리는 노래 소리가 들렸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게 토마스 제퍼슨의 상담 선생님 사무실에서 항상 울려나오는 음악이라는 걸 깨달았어.

그걸 깨닫자마자 어둠 속에서 작고 밝은 부분이 점점 커지면서, 우리 상담 담당인 가드너 선생님이 벽에 우르르 붙여 놓는 짜증나는 기운 충만 포스터 들이 줄줄이 나타났지. 다만 내 꿈속에서는 그 포스터들이 전부 다 100배쯤 커져서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어, 하나는 [중력은 사랑에 빠지는 원인이 아니다]라는 문장위로 아인슈타인이 서 있는 거였고, 토마스 에디슨의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도 있었지. 난 그걸 잡아 볼까 생각했지만 포스터가 내 무게를 견뎌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어. 그때 줄무늬 고양이가 발톱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포스터가 스쳐갔어. 거기엔 [거기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지.

제일 웃기는 건 말이야. 그걸 보는 순간 내 귓가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게 멈추고 공포감이 사라졌다는 거야. 난 그 동안 내가 떨어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지. 난 떠 있는 거였어.               (P358-359)  

   

“넌 날 몰라.”

그 애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로 말했다. 

“전혀 모르지. 그리고 내 기분을 낫게 만들 수도 없어. 아무도 날 낫게 만들 수 없어.”

이 말을 듣자 겨우 이틀 전 내가 켄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날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이제는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겠다. 모든 사람은 고칠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말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나는 줄리엣에게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할 방법을, 확신시킬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대단히 차분하게, 항상 그렇듯 둥둥 떠가는 듯한 우아함으로 내 한 팔에 손을 얹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어냈다. 나는 어느 새 옆으로 물러서서 문손잡이를 잡는 그 애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목 뒤쪽으로부터 눈물이 치솟았다. 난 여전히 할 말을 찾는 중이었고, 그러는 내내 그 애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거의 빛이 났다. 갑자기 줄리엣의 생명력이 화면조정 중인 TV처럼 내 앞에서 깜박거리며 꺼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406)     

이제 린지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린지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자신이 가장을 하고 있다는 걸, 살아가는 방식이 거짓됐다는 걸, 실은 우리들 나머지와 똑같이 그저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다 가진 척 행동할 뿐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겁에 질려 있는 거다. 자기 쪽으로 눈길을 잘못 던지기라도 하면 상대를 바득바득 씹어 먹을 린지, 항상 짖고 물어뜯으려고 해서 사람들이 목줄이 닿지 않는 범위로 물러나게 만드는 조그만 투견 같은 린지.

수백만 개의 눈발들이 빙빙 도는 하얀 파도처럼 핑그르르 돌고 뒤섞이고 한꺼번에 펄펄 내려온다. 문득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는 말이 사실일지 궁금해졌다.          (P425)    

 

예전에 린지와 함께 옛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섹스를 했을 때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 아주 슬프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난 첫 번째 섹스조차 해 보지 못했으니 딱히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생에서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키스, 마지막 웃음, 마지막 커피 한 잔, 마지막 일몰, 마지막으로 스프링클러 사이를 뛰어다닌 일이나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 혀를 내밀고 눈송이를 받아먹은 것.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절대로 모를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 절대로 그냥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건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럴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릎을 꿇고서 단단한 땅바닥에 키스하고, 냄새를 맡고, 그저 붙잡는 것뿐이겠지.

작별인사라는 건 항상 그런 것 같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 최악의 부분은 뛰어내리려고 결심한 부분이다. 한번 허공으로 발을 내딛으면 그 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P436-437)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나는 문득 삶이 그렇게까지 복잡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시간(거의 99퍼센트의 시간)에 사람은 그물이 어떤 식으로, 왜 연결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니까 상관없는 거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일이 일어나곤 한다. 나쁜 일을 해도 좋은 일이 일어나고, 아무것도 안 한다 해도 온갖 일들이 터지게 되고.

그리고 아주, 아주 드물게...... 기회와 우연이 만든 어떤 기적으로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순간, 모든 그물이 들려 올라가면서 옳은 일을 할 기회가 생긴다.            (P445)    

 

“너무 늦었어.”   

그 애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어.”

그 짧은 찰나 줄리엣이 도로로 몸을 던졌지만, 문득 뭔가를 깨달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내가 그 애 뒤에서 몸을 던졌다. 내 몸이 줄리엣의 등에 부딪치면서 줄리엣이 앞쪽으로 날아가 반대편 어깨로 굴러 떨어졌다. 두 대의 밴이 서로 스쳐 지나갔다. 요란한 굉음이 들려오고, 누군가(아니, 한 명 이상인가?) 소리쳐 내 이름을 불렀고, 열기가 온 몸을 타고 흘렀다. 터오르는 감각, 떨어지는 느낌, 커다란 손, 거인의 손이 나를 들었다 내려놓는 기분, 땅이 회전하고 뒤집히고 옆으로 기울어졌다가, 땅 끝부터 새카만 안개로 물들며 모든 것이 꿈으로 변한다. 

둥둥 떠올라 오고 가는 이미지들, 밝은 초록 눈과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풀밭, 샘, 샘, 샘, 하고 노래하듯 움직이는 입술, 줄기 하나에 달리 꽃들처럼 세 개의 얼굴이 함께 나타난다.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한 단어만 머릿속을 맴돈다. 사랑. 빨갛고 하얀 플래시, 교회의 둥근 천장처럼 불을 밝힌 나뭇가지.

그리고 내 위로 달처럼 커다란 눈에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난다. ‘네가 날 구했어.’ 내 뺨에 닿는 차갑고 건조한 손. ‘왜 날 구한 거야?’ 말이 조수처럼 밀려온다. ‘아니, 그 반대야.’ 새벽하늘 같은 색깔의 눈, 너무 밝고 하얗고 눈이 부셔서 마치 후광 같은 찬란한 금발.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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