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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07. 2024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1971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및 공동각본, 더크 보가드, 비에른 안드레센 주연의 1971년작. 이탈리아-프랑스 합작 영화로 영화 내에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의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이 끊임없이 흐른다.     

“Every shape was tinted with the blue light of metal. The sound of the wind blowing from the far-off sea filled his ears.”

모든 형상은 금속의 푸른빛에 물들었다. 바람이 부는 바다의 멀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그의 귀에 가득 들어왔다.     

몇 달간 작품에서 손을 떼고 세상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겠다는 생각은 너무나 무분별하고 계획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이는 진지하게 고려해 볼 가치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떤 이유로 이런 유혹이 그렇게 뜻밖에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이는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새로운 것과 먼 곳에 대한 동경, 자유, 구원, 망각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곧 작품에서 벗어나고픈, 경직되고 차가우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일상생활의 작업장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이었다.        (P294)   

  

의사의 보살핌이 필요한 소년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는 친구도 없이 혼자 자랐지만 자신이 어떤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부류는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 재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기초체력이 모자란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 부류는 초년에 곧잘 최고이 성과를 내지만, 노년까지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말은 <끝까지 버텨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다룬 자신의 소설을 다름 아닌 이러한 명령어가 신격화된 작품으로 보았고, 그에게는 이러한 명령어가 고통을 안고 행동하는 미덕의 진수로 여겨졌다. 또한 그는 나이가 들기를 열렬히 손꼽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예전부터 예술적 재능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단계에서 나름대로 결실을 맺을 정도로 충분히 행운을 얻어야만 진정 위대하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고, 그러니까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것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299)  

   

중요한 지적 생산물이 지체 없이 광범위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작가 개인의 운명과 동시대인의 보편적인 운명 사이에 은밀한 유사성 내지는 합일점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어떤 예술 작품에 명예를 안겨주는지 알지 못한다. 전문가적 안목이 없는 그들은 그 작품에서 수백 개의 장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그토록 공감한 이유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실제 이유는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그 작품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아센바흐는 세상의 거의 모든 위대한 것은 <그럼에도>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분명히 밝힌 적이 있었다. 근심과 고통, 가난과 고립무원, 신체적 허약과 악덕, 열정과 수천 개의 다른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소견 이상의 말로서, 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표현이었으며, 그야말로 그의 삶과 명성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인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였다. 그러므로 그 말이 아주 특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윤리적 성격이 되고 외적인 몸짓이 된가 한들 이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 작가가 특히 좋아하며,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에 대해 어떤 현명한 분석가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그의 작품의 전형적인 주인공은 <칼과 창이 몸을 뚫고 들어오는 치욕적인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당당하고도 의연히 서 있는 지적이고 젊은이다운 남성적인 모습>의 화신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은 수동적인 특징을 너무 강조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멋지고 재기 넘치며 정확한 지적이었다. 결국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와 고통을 겪으면서 우아한 기품을 유지하는 것이 단순히 인내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능동적인 업적이고, 긍정적인 승리인 것이다.           (P300-301)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거의 탈진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들, 지나치게 부담을 받아 이미 녹초가 된 사람들, 아직은 그래도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작가였다. 그는 몸이 허약하고 경제적으로는 빠듯했지만,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고 현명하게 자기 관리를 하여, 적어도 한동안은 위대하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든 업적주의 도덕가들을 대변하는 작가였다. 이런 자들은 적지 않았고, 이들이 그 시대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은 아센바흐의 작품에서 자신들을 재인식하고, 그곳에서 자신들이 인정받고 떠받들어지며 찬미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그에게 감사할 줄 알았으며 그의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P302)     

중요한 운명들은 대체로 고통에 잠겨 옆으로 기울이고 있는 이 사람의 얼굴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힘들고 파란만장한 삶이 한 사람의 인상을 만들어 주지만, 그의 경우에는 예술이 그러한 일을 담당했다. 이러한 이마 뒤에서 볼테르와 대왕사이의 전쟁에 관한 불꽃 튀기는 문답이 생겨났던 것이다. 안경알 너머로 피곤하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이 두 눈은 7년 전쟁 당시 야전 병원의 피비린내 나는 지옥을 본 것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러니까 예술은 고양된 삶이다. 예술은 보다 깊은 즐거움을 안겨 주고, 신속하게 기력을 갉아먹는다. 예술은 그것에 봉사하는 사람의 얼굴에 공상적이고 지적인 모험의 흔적을 각인해 준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수도원에서처럼 조용하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 예술은 방탕한 열정과 향락으로 가득 찬 삶조차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까다로운 취향, 지나친 섬세함, 피로와 신경질적인 호기심을 낳는 것이다.            (P306)     


배를 타고 가까이 다가오면서 경외감에 찬 시선을 보내는 여행객들은 공화국이 제공하는 환상적인 건축물의 눈부신 구조를 보게 되었다. 궁전의 경쾌한 웅장함, 탄식의 다리, 사자 상과 그리스도 상을 묘사한 물가의 기둥들, 동화에나 나옴 직한 신전의 화려하게 튀어나온 측면, 성문으로 나 있는 길과 거대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기차를 타고 육로로 베네치아 역에 들어오는 것은 뒷문으로 궁전에 들어가느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처럼 배를 타고, 난바다를 거쳐 도시에 들어와야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P314)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처음 타보거나 오랜만에 다시 타보는 경우 일시적인 전율, 은밀한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담대한 누가 있을까? 담시(譚詩)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다른 물건들하고 있으면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물에 찰싹거리는 밤에 소리 없이 저질러지는 범죄적인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 관대(棺臺)와 음울한 장례식, 말없이 떠나가는 마지막 여행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거룻배의 좌석, 관처럼 검게 래커 칠이 되어 있고 검은 쿠션이 들어 있는 팔걸이 안락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가장 사치스러우며 가장 졸리게 만드는 좌석이라는 것을 알아 챈 사람이 있을까? 아센바흐는 뱃머리에 옹기종기 놓아둔 짐 맞은편, 곤돌라 사공의 발치에 앉아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P315-316)    

 

말이 없고 고독한 사람이 관찰하고 맞닥뜨리는 사건은 사교적인 사람보다 더 모호하면서도 더욱 인상적인 데가 있다. 그런 사람은 생각은 보다 무겁고 보다 유별나며, 항시 슬픔의 낌새를 띠고 있다. 그런 사람은 한 번의 눈길이나 웃음으로, 한 번의 의견 교환으로 쉽게 털어 버릴 수 있는 모습과 느낌에도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는 법이다. 그것들은 침묵하는 가운데 그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지면서 의미심장하게 되어, 체험이나 모험, 혹은 감정이 된다. 고독은 우리 안에 있는 독창성을 무르익게 하고 대담하고도 낯설게 하여 아름다움과 시를 낳게 한다. 하지만 또한 고독은 전도된 것, 균형이 맞지 않는 것, 불합리하고 허용되지 않는 것을 낳기도 한다.           (P321)     

그가 바다를 사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힘들게 일하는 예술가, 단순하고 어마어마한 자연의 품에 안겨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현상들의 다양함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기기 바라는 예술가인 그에게는 휴식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가 바다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 무변광대한 것, 영원한 것, 즉 무(無)에 대한 금지된 애착, 즉 자신의 임무와 배치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유혹적인 애착 때문이었다. 완전한 것의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하는 일은 탁월한 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자의 그리움이다. 그리고 무야말로 완전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형식이 아니던가?           (P330)        


입상과 거울이라니! 그의 두 눈은 저기 푸른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귀한 형상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열광적인 황홀경에 빠져 그는 이러한 시선으로 아름다움 자체, 신적인 사고로서의 형식, 정신 속에 살고 있는 유일하고도 순수한 완전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한 완전성의 인간적 모상(模像)이자 비유가 여기에 가볍고도 사랑스럽게 서서 숭배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취였다. 그리고 초로의 그 예술가는 아무런 주저없이, 그러니까 탐하듯이 그러한 도취를 환영했다. 그의 정신은 산고의 고통을 겪었고, 그의 교양은 격랑에 빠져 들었으며, 그의 기억은 젊은 시절에 그에게 전승되었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불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지 않은 태곳적의 사고를 떠올렸다. 태양은 우리의 주의력을 지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돌려놓는다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태양이 오성과 기억을 마비시키고 현혹시키는 나머지, 영혼은 황홀경에 빠져 자신의 본래 상태를 깡그리 망각하고, 태양이 비추는 대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놀라운 눈으로 경탄해 마지않으면서 매달리게 된다고 거기에 쓰여 있었다. 그렇다, 육체의 도움을 받아야만 영혼은 보다 숭고한 관찰을 하도록 솟아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신 아모르는 정말이지 추상적인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손에 잡을 수 있는 순수한 형식의 상을 보여 주는 수학자들과 같은 일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도 정신적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기꺼이 젊은 인간의 형상과 색채를 사용하였다. 신은 기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아름다움의 온갖 반사광으로 젊은이를 장식하여,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어쩌면 고통과 희망에 불타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P350-351)     

젊잖은 말로 재기 넘치게 구애하는 농담을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그리움과 미덕에 관해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영원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바라볼 때 느끼는 충격에 대해 그는 제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모상을 보고도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경외심을 품을 능력이 없는 불경스럽고 나쁜 인간의 탐욕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신과 같은 용모, 완전한 육체를 보게 될 때 고상한 사람이 느끼는 성스러운 불안감에 대해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흥분하여 전율하며 제정신을 잃고는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자를 숭배하게 될 것이다. 그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치부될 두려움이 없다면 우상에게 그러하듯 그자를 경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파이드로스여, 아름다움이란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내 말을 잘 명심하라!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감각적으로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의 유일한 형식이다. 또는 그러지 않고 신적인 것, 이성과 미덕과 진리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옛날에 언젠가 세멜레가 제우스 앞에서 그랬듯이 우리는 사랑의 불꽃에 눈이 멀고 애간장이 타들어 가지 않을까?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가 정신에 이르는 길인 것읻. 파이드로스여, 단지 길이자 수단일 뿐이라......> 그러고 나서 노회하고 세련된 구애자인 그는 지극히 미묘하기 짝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보다 더욱 신적이라는 얘기였다. 사랑하는 자 안에 신이 있지, 사랑받는 자 안에 신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어쩌면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했던 것 중에 가장 부드러운 동시에 조롱 섞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리움에 담긴 가장 은밀한 육욕과 온갖 짓궂은 언동이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하고 있다.

작가는 완전한 느낌이 될 수 있는 생각과 완전한 생각이 될 수 있는 느낌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때 고독한 그 사람은 그러한 맥동하는 생각과 그러한 정확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 따르고 있었다. 즉, 정신이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힌다면 자연은 환희에 겨워 전율한다는 생각과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사실 에로스는 무위도식하는 삶을 사랑하고, 오로지 이를 위해서만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는 시련을 겪는 자의 흥분은 생산력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된 계기는 거의 아무래도 상관없다. 문화와 미적감각이라는 어떤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에 대해 고백을 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혀 달라는 어떤 질문과 어떤 자극이 정신적인 세계에 흘러 들어와 여행을 떠나는 작가에게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 주제는 그에게 친숙한 것이었고, 그가 체험한 것이었다. 그는 그 주제를 자신의 언어로 조명하고 환하게 빛을 밝혀야겠다는 욕심을 갑자기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의 욕구는 타치오의 면전에서 작업하고, 글을 쓰면서 소년의 신체를 모델로 삼아, 자신의 문체를 신적으로 보이는 이 신체의 선을 따르도록 하며, 그리고 옛날 독수리가 트로이의 목동을 천공으로 채 갔듯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 놓고 싶다는 데로 치닫게 되었다. 그는 언어가 주는 쾌감을 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에로스가 언어 속에 있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이를테면 차양 아래의 거친 탁자에 앉아 우상을 바라보고 그의 음악적인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그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짧은 에세이를 쓰는 위험할 정도로 귀중한 몇 시간 동안에도 에로스가 그 속에 있었던 것이다. 몇 페이지 안 되는 빼어난 그 산문의 순수함, 고귀함과 감정의 긴장에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의 기원이나 그것이 생기게 된 배경을 알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작품만 아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겁을 집어먹게 되어, 작품의 탁월한 효과가 망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야릇한 시간들! 이상야릇하게 기력을 소진시키는 힘든 일! 이상하게 결실을 맺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 작업을 그만두고 해변을 떠나는 순간 아센바흐는 기진맥진한 기분을 느꼈고, 정말이지 녹초가 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바탕 방종한 성적인 관계를 갖고 난 뒤 양심이 불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P352-354)     

눈으로만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보다 더 이상 미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이면 날마다, 아니 매 시간마다 서로 우연히 만나고 보면서도 무관심하게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행동하며, 인습이나 자신의 변덕스런 기분 때문에 인사도 말도 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불안감과 지나친 호기심을 경험하고, 인식 욕구와 교환 욕구가 불만족스럽고 부자연스럽게 억압되어 생겨난 히스테리, 말하자면 일종의 긴장된 상호 존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할 수 없는 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리움이란 인식이 불충분해서 생기기 마련이다.           (P359-360)   

  

왜냐하면 일상의 안정된 질서와 안녕은 범죄에 적합하지 않듯이 열정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정은 시민적 사회조직이 이완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며 시련을 겪는 것을 분명 환영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을 막연하게나마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베네치아의 더러운 골목에서 당국이 얼버무리며 은폐하는 것에 대해 남모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 자신의 가장 사적인 비밀과 섞여 하나로 녹아내린 도시의 이러한 사악한 비밀! 그리고 이러한 비밀을 지키는 것도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사랑에 빠진 그에게는 타치오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P365-366)     

베네치아란 이런 곳이었다. 아양을 떠는 수상쩍은 미녀 같은 이 도시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나그네를 옭아매는 덫 같기도 했다. 이 도시의 썩기 쉬운 공기를 맡으며 한때 향락에 빠져 예술이 번성했고, 이 도시는 어르며 감미롭게 자장가를 불러 잠재우는 음을 음악가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모험가인 아센바흐에게는 자신의 눈이 이와 같은 관능을 마시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귀가 그러한 멜로디에 구애(求愛)를 받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 도시가 병들어 있는데, 이윤을 추구하느라 그런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는 것도 그는 기억에 떠올렸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자제심을 잃고 앞에서 떠가는 곤돌라를 눈여겨 보았다.             (P368-369)     

“아름다움이, 파이드로스여, 잘 명심해라, 아름다움만이 신적인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실로 감각적인 것인 길인 셈이지. 어린 파이드로스여, 예술가의 길이란 정신에 이르는 길이야. 그런데, 얘야, 감각을 통과해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을 걷는 자가 언젠가는 진리와 진정으로 남성다운 품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오히려 (결정권은 네게 맡긴다마는) 이것이 위험한 길이고, 어쩔 수 없이 나쁜 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정말로 그릇된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에로스 신이 동무가 되어 선뜻 나서서 길을 안내해 주지 않으면, 우리 작가들은 아름다움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네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야. 물론 우리도 우리 나름으로 영웅이고 행실 바른 전사(戰士)일 수 있긴 하지만, 우리에겐 여자 같은 면이 있어. 열정이 우리를 고양시켜 주고, 우리의 그리움은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즐거움인 동시에 치욕인 셈이지.”

“우리 작가들이 현명할 수도 없고 품위있을 수도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느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나쁜 길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부도덕해지고 감정의 모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쓰는 대가다운 문체는 거짓이고 어리석은 짓거리며, 우리의 명성과 명예로운 신분은 익살극이지. 대중이 우리를 신뢰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고, 예술을 가지고 대중과 젊은이를 교육하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될 대담한 발상이야. 태어날 때부터 개선의 여지가 없는,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에 빠져드는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교육자의 자질이 있다고 하겠느냐? 우린 어쩌면 그런 심연을 거부하고, 품위를 얻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무리 돌아서려고 해도 그 심연이 우리를 유혹하는 거야. 가령 우리가 사물들을 해체시키는 인식을 거부하는 것은 그 때문이야. 인식에는, 파이드로스여, 위엄도 엄격함도 없기 때문이야. 인식이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이해하며 용서해 주지만, 침착한 태도와 형식이 결여되어 있어. 그것은 타락의 심연에 공감하고 있으며, 바로 타락의 심연인 셈이지. 그래서 우리가 이걸 단호하게 물리치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 우린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열망하는 거야. 말하자면 단순성, 위대함과 새로운 엄격함, 또 다른 거침없는 성격과 형식을 말이야. 하지만 형식과 거침없는 성격은, 파이드로스여, 도취와 탐욕으로 이끌어 가고, 고상한 사람을 어쩌면 끔찍할 정도로 불경스런 감정으로 이끌어 갈지도 몰라. 자신의 아름다운 엄격함은 이를 파렴치하다고 배척하는 데도 말이야. 그래서 그것들도 심연을, 타락의 심연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단다. 내 말은, 그것들이 우리 작가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간다는 거야. 우리에게는 높이 솟아오를 능력이 없고, 단지 정도를 벗어나 방탕에 빠지는 능력만 있기 때문이지. 난 이제 떠나련다. 파이드로스여, 넌 이곳에 남으렴. 그리고 내 모습이 더 이상 안 보일 때 비로소 너도 떠나거라.”             (P39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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