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영화 <글래스 미네저리> 1987년

by 노용헌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은 1944년 시카고에서 초연되었고, 1945년 브로드웨이로 진출하여 뉴욕 극비평가상을 받았다. 폴 뉴먼이 연출한, 영화 <글래스 미네저리>(The Glass Menagerie)는 1987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


글래스 미네저리 03.jpg

[제작노트]

<유리 동물원>은 ‘회상극’이기에 이례적으로 연극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다. 민감하고도 미묘한 소재 때문에 분위기 설정과 연출의 섬세함이 매우 큰 역할을 한다. 표현주의를 비롯해 연극의 또 다른 비(非)관습적 기법들은 모두 오직 하나의 타당한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극이 비관습적인 기교를 사용하는 것은 현실을 다루고 경험을 해석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며, 명백히 그래서는 안 된다. 도리어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예리하고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진짜 냉장고와 얼음이 등장하는 고지식한 사실주의극은 전통적인 풍경 묘사와 상응하며, 사진의 모사와 같은 효과를 지닌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술에 있어서 사진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진실, 삶, 현실은 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시적 상상력의 변형에 의해서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다른 형태로 바꿈으로써만, 본질적으로 표현하거나 암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 특정한 극의 서문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연성 있는 새로운 연극의 개념과 관련을 지니는데, 연극이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으려면 이러한 극이 사실주의 관습을 지닌, 기력이 쇠진한 연극을 대체해야만 하는 것이다. (P195-196)

글래스 미네저리 04.jpg

윙필드네 아파트는 건물 뒤편에 있다. 건물은 세포 같은 아파트들이 벌집같이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중,하류층이 모여 사는 도시의 인구 과밀 지역에서 사마귀처럼 번창하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종속된 지역이 지니는 유동성과 차별성을 포기한 채 자동기계의 혼합된 덩어리로 존재하고 기능하려는 충동을 나타낸다.

아파트는 뒷골목을 향해 있고 화재 비상구를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화재 비상구는 우연히도 시적 진실의 분위기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 거대한 건물들은 언제나 느릿느릿하면서도 달랠 길 없는 인간 절망의 불길로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상구는 우리가 보게 될 장치의 일부로서, 비상구 층계참과 거기서 이어지는 계단이 포함된다.

연극장면은 회상이며, 따라서 비현실적이다. 회상은 많은 시적 파격을 취한다. 다루고 있는 대상들의 정서적 가치에 따라서 어떤 세부 사항은 생략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과장되기도 한다. 회상이란 주로 마음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내는 어둡고 시적이다. (P201-202)


무대 앞쪽에는 로라의 침실이 되기도 하는 거실이 있다. 접이식 소파를 펼치면 침대가 된다. 바로 뒤쪽 중앙, 넓은 아치나 투명하고 빛바랜 커튼(즉, 제2의 막)으로 거실과 구분해 놓은 뒷무대가 식당이다. 거실 구석의 장식장에는 수십 개의 투명한 유리 동물 인형이 보인다. 확대된 아버지 사진이 아치 모양의 통로 왼쪽 거실 벽에 걸려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병 모자를 쓴, 젊고 잘생긴 청년의 얼굴이다. 그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데 “나는 영원히 미소를 짓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웃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P202)


그래요. 전 주머니 안에 요술을 가지고 있어요. 소매안에 숨겨 놓은 것들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무대 마술사와는 정반대랍니다. 그는 진짜처럼 보이는 환상을 제공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즐거운 환상의 가면을 쓴 진실을 보여 드립니다.

우선 저는 시간을 돌려놓지요. 특이한 시대인 30년대, 미국의 거대한 중산층이 맹아 학교에 입학하던 그때로 시간을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그들을 저버린, 아니 그들이 그들의 눈을 저버린 때죠. 그래서 사람들은 무너져 가는 경제라는 뜨거운 점자를 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러 대고 있었던 겁니다.

스페인에서는 혁명이 있었지요. 이곳에는 고함 소리와 혼란만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게르니카가 있었지요. 여기서는 때로 무척 과격해지는 노동 분규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평화스러웠을 시카고, 클리블랜드, 세인트 루이스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이게 이 연극의 사회적 배경입니다.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이 극은 회상입니다. 회상극이기에 조명도 침침하고, 감상적이며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일이 음악과 함께 일어나는 것 같지요. 무대 양쪽에 바이올린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 극의 해설자이면서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나의 어머니 어맨다, 누나인 로라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신사 방문객입니다. 그는 이 극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우리 가족이 유리되어 있던 현실 세계에서 온 사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상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시인의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인물도 상징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미뤄졌지만 우리가 살면서 언제나 기대하게 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이 극에는 벽난로 위에 놓인, 실물보다 큰 사진으로만 등장하는 다섯 번째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은 오래전 우리를 떠난 아버지입니다. 그분은 장거리에 매료된 전화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전화국 일을 팽개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시를 떠나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것은 멕시코의 태평양 해변가에 있는 마사틀란에서 보내온 그림 엽서를 통해서였습니다. “잘들 있니, ...... 잘 있어라.” 라는 단 두마디 말만 적혀 있었지요. 주소도 없이요.

극의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P204-205)


어맨다 (아들에게) 얘야, 손가락으로 밀어 넣지 마라, 뭔가로 밀어 넣어야 한다면, 빵 조각으로 하면 되지. 그리고 씹어, 씹으라고! 동물들은 음식을 씹지 않아도 위장에서 소화할 수 있는 분비 작용을 하지만, 사람은 음식을 삼키기 전에 씹어야 한단다. 음식은 여유를 갖고 먹어야 한다. 얘야, 그리고 정말 즐겨야 해. 잘 조리된 음식은 묘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음미하기 위해서는 입안에 담아 두어야 하는 거란다. 그러니 음식을 씹어서 네 침샘이 기능을 할 수 있게 해야지! (P205-206)

글래스 미네저리 05.jpg

로라는 동물 발 모양의 다리가 달린 작은 탁자 앞에 정교한 상아색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부드러운 보라색 실내복을 입었고 머리는 이마에서 뒤로 모아 리본으로 묶었다. 그녀는 유리 수집품들을 씻고 광을 내는 중이다. 어맨다가 비상구 계단에 나타난다. 어머니가 올라오는 소리에 로라는 숨을 죽이고, 장식품이 든 그릇을 치우고, 타자기 자판표 앞에 열중한 듯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 계단참으로 올라오는 어맨다의 얼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이 드러나 있다.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P212)


어맨다 로라가 자기를 돌봐 줄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갖고, 독립하게 되면 말이다...... 그래, 그러면, 너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육지건, 바다건, 바람 부는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라! 하지만 그때까지는 누나를 돌봐야만 해.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늙었고 문제 될 게 없어! 네 누나 얘기를 하는 거야. 걔는 어리고 의지해야 하는 처지니까.

걔를 실업학교에 넣었는데...... 비참한 실패였어! 너무 겁을 먹어서 복통까지 일으켰단 말이다. 교회 청년부에도 데리고 갔지. 또 한 번의 대 실패였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누구도 걔한테 말을 걸지 않더구나. 이제 걔가 하는 일이라고는 유리 조각들을 가지고 장난하고 낡아 빠진 레코드판을 트는 것뿐이야. 처녀가 뭐 그런 인생을 살아가니?

저더러 어떻게 하라고요? (P241-242)


(관객에게) 우리 집에서 골목길을 건너면 파라다이스 댄스홀이 있습니다. 봄엔 저녁마다 유리창과 문을 열어 놓으면 문밖에서 음악이 들어오지요. 때로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둥근 유리등만 빼놓고 조명을 모두 꺼 버립니다. 유리등은 천천히 돌면서 정교한 무지개 색깔을 황혼에 스며들게 해요. 그러면 오케스트라는 왈츠나 탱고를 연주하죠. 느리고 관능적인 리듬의 곡 말이에요. 쌍쌍의 남녀가 밖으로 나오곤 합니다. 골목길의 은밀한 곳으로 말이죠. 그들이 잿더미나 전신주 뒤에 서서 키스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은 변화도 모험도 없이 흘러가는 나 같은 인생들에겐 보상이 되죠. 이해에는 모험과 변화가 임박했어요. 모퉁이 너머에서 이 모든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베르히테스가덴 위의 안개 속에도 매달려 있었고 체임벌린의 우산 사이에도 들어가 있었지요. 스페인에는 게르티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스윙 음악과 술, 댄스홀, 술집, 그리고 영화와 섹스만이 어둠 속에서 샹들리에처럼 매달려 일시적이고 현혹하는 무지개마냥 세상을 휩쓸고 있었지요...... 세계 전체가 폭격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P247)


글래스 미네저리 06.jpg

엄마, 누나에 대해서 너무 기대하면 안 돼요.

어맨다 무슨 말이니?

누나는 우리 가족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엄마랑 저한테는 그렇게 보이겠지만요. 누나가 절름발이란 것도 우리는 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하잖아요.

어맨다 절름발이란 말 하지 마라! 절대 그런 말은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세요, 엄마, 누나는 그래요.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에요.....

어맨다 “다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로라는 다른 여자들이랑 아주 달라요.

어맨다 다르다는 게 전부 다 걔한테 유리한 점이란다.

낯선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누나는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요. 그리고 그런 점들은 우리 식구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약간 괴상하게 보여요.

어맨다 괴상하다는 말은 하지 마.

사실을 직시하세요. 누나는 그래요. (P256-257)


아, 그래요, 이제야 당신을 기억하겠어요! 내가 당신을 푸른 장미라고 부르곤 했지요. 내가 어떻게 해서 당신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죠?

로라 내가 늑막염으로 학교에 얼마간 나오지 못했어요. 돌아오니까 당신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더군요. 나는 늑막염이었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내가 푸른 장미라고 말하는 걸로 생각했던 거지요. 그 후로는 나를 항상 그렇게 불렀어요!

싫어하지 않았길 바라는데요.

로라 아, 아니요...... 난 좋아했어요, 나는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지를 못했잖아요....

로라 양은 혼자 있기를 고집했던 걸로 기억이 되네요.

로라 나는...... 나는,,,,, 친구를 사귀는....... 운이 없었어요. (P291)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모르겠군요. 유리 뭐라고요?

로라 유리로 된 작은 물건들이에요. 주로 장식품들이죠! 대부분의 것들은 유리로 만든 작은 동물들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작은 동물들 말이에요. 어머니는 유리 동물원이라고 불러요! 보고 싶다면 여기 견본이 있어요. 거의 십삼 년이나 된 거예요.

(음악 <유리 동물원>)

(짐이 자기 손을 내민다.)

아, 조심해요..... 숨만 쉬어도, 부서질 거예요.

만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물건을 만지는 데 꽤 서툴거든요.

로라 만져 봐요, 오코너 씨를 믿고 맡기는 거예요! (짐의 손바닥에 조각을 올려놓는다.) 자, 이제.... 살짝 쥐고 있어요! 불빛 위로 들어 보세요, 그 애는 불빛을 좋아해요! 불빛이 어떻게 그 애를 통과하는지 보이시죠?

정말 빛이 나는군요! (P299-300)


저는 달나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훨씬 더 먼 곳으로 갔지요..... 왜냐하면 시간이 흐른다는 게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신발 상자 뚜껑에 시를 썼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습니다. 저는 세인트루이스를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상구 계단을 내려온 후로는, 공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행동으로 찾으려고 애쓰면서,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갔습니다. 여행을 아주 많이 다녔습니다. 도시들은 죽은 낙엽처럼 제 주위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밝은 색을 띠다 가지에서 뜯겨 나가는 나무 이파리들처럼 말입니다. 저는 멈추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모르는 사이에 제게 다가와서 저를 완전히 기습하곤 했지요. 아마도 그건 익숙한 음악의 한 소절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건 단지 하나의 투명한 유리 조각일 수도 있고요. 아마도 저는 한밤에 어떤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말입니다. 전 향수를 팔고 있는 가게의 불 켜진 창문 곁을 지나갑니다. 유리창은 색색의 유리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무지개 조각같이 미묘한 색깔들의 자그마한 투명 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제 누이가 와서 제 어깨를 만집니다. 저는 돌아서서 누이의 눈 속을 들여다봅니다. 오, 로라, 로라, 나는 누나를 내 뒤에 버려두려고 했어. 하지만 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신의가 있나 봐! 나는 담배를 집으려 하고 길을 건너고 극장이나 술집으로 달려가거나, 술을 사기도 하지, 가까이에 있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해...... 누나의 촛불을 불어서 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말이야. (P317-318)

글래스 미네저리 02.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