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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

영화 <제3의 사나이> 1954년

by 노용헌

〈스탬불 특급 Stamboul Train〉(1932, 미국 제목은 〈오리엔트 특급 Orient Express〉)에서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 된(1934) 그레이엄 그린의 첫 작품이다.


추리물과 비슷하면서 좀더 복잡하고 깊이를 가진 작품으로는 〈권총을 팝니다 A Gun for Sale〉(1936, 영화화 1942)·〈밀사 The Confidential Agent〉(1939, 영화화 1945)·〈공포의 성 The Ministry of Fear〉(1943, 영화화 1945) 등이 있다.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첩보영화의 고전으로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 목적으로 쓴 작품이다.


〈아바나의 우리 편 사람 Our Man in Havana〉(1958, 영화화 1959)은 그의 이전 첩보소설들을 적당히 본뜬 작품이다.


〈브라이턴 록 Brighton Rock〉(1938, 영화화 1948)은 주인공이 쫓기는 범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추리물들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표면화된다. 〈권력과 영광 The Power and the Glory〉(1940, 영화화 1962)은 더 직접적으로 가톨릭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교회가 억압당하던 시기의 나약하고 알코올 중독자인 한 멕시코 사제의 고뇌를 다루었다.


잘 알려진 다른 소설로는 〈인간적인 요인 The Human Factor〉(1978, 영화화 197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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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는 점령당한 빈 시에서 페니실린 암거래를 취급하고 있는 해리 라임이라는 한 사나이에 얽힌 사연을 다루는 내용이다. 해리 라임의 세계는 기쁨, 아름다움, 신뢰,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경찰 당국에 페니실린 암거래자로 지목된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해리의 친구 마틴스는 해리의 억울한 죽음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쫓고 쫓기는 폭력의 세계로 뛰어든다. 마틴스의 우정은 순수하며 해리를 위해서라면 위험과 파멸도 감수할 수 있는 인간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마틴스의 성실성 및 해리에 대한 우정은 정의에 입각해서만 생명을 바칠 만큼 강한 성격을 띠고 있다. 때문에 해리의 삶에 대한 목표가 자아와 자아의 욕구 충족, 그리고 자기 만족 그 자체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틴스는 해리를 체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P281)


산산이 부서져 황폐해진 빈은 4대 강국인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할 지역으로 나뉘었고, 그 구분은 오직 게시판에만 표시되어 있었다. 육중한 공공 건물과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조상(彫像)들로 둥그렇게 둘러싸여 있는 ‘내부 도시(Inner Stadt)’도 자연히 4대 강국들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때 유행의 중심지였던 내부 도시는 4개국이 1개월에 한 번씩 교대로 소위 ‘의장’의 자격으로 보안을 책임졌다.

만일 여러분의 밤에 나이트 클럽에서 오스트리아 실링 화(貨)를 쓰는 바보스런 짓을 한다면 틀림없이 국제 순찰대의 움직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4개국에서 각기 차출된 헌병들로 상호 통신 연락을 취하고, 서로 연락이 취해지면 적(敵)의 언어를 공통으로 사용한다.

나는 전쟁 중의 빈을 결코 알지 못했고, 스트라우스의 음악과 거짓말처럼 편안한 매력으로 둘러싸인 옛날의 빈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젊다. 2월의 빈은 나에겐 눈과 얼음의 거대한 빙하로 변해버린 볼품없이 파괴돼 하나의 도시로만 느껴질 뿐이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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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신통치 않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신통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P14)


눈이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가족 묘지의 묘석에 기괴하고도 희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눈의 가발(假髮)은 천사와 같은 얼굴 위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미끄러져 있었으며, 성자(聖者)는 무겁고 흰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눈의 군모(軍帽)는 ‘볼프가 고트만’이라 불리던 뛰어난 공직자의 흉상 위에 술 취한 모습처럼 뒤집어씌워져 있었다.

이 공동 묘지까지도 열강국들에 의하여 분할되어 있었다. 러시아 지역은 커다랗고 멋없이 무장된 사나이들의 조상(彫像)들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프랑스 지역은 특징 없는 나무 십자가와 찢어진 낡은 삼색 깃발의 대열로 표시되어 있었다.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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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기를 합시다. 5파운드 대 2백 실링으로, 해리의 죽음에 기이한 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내기입니다.”

그것은 막연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마틴스는 확고한 본능적 의심 속에서, 비록 해리의 죽음이 타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무언가 잘못이 개재되어 있다는 느낌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쿠르츠가 커피잔을 들어올려 입술에 갖다 대는 모습을 마틴스가 지켜보았다. 그의 추측은 확대되어 갔다. 쿠르츠는 무표정한 태도로 컵을 입에 대고 약간 소리를 내면서 길게 마셨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이한 점이란, 무슨 의미죠?”

“해리의 시체를 확보한 것은 경찰로서도 편리한 일이었지만, 진짜 악당들에게도 역시 편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마틴스는 쿠르츠가 자기의 거친 표현을 듣고 결국은 동요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작자는 주의력과 침착성을 잃을 만큼 긴장하지 않았단 말인가? 범죄자의 손이라 해서 반드시 떨리는 법은 아니다. 단지 소설 속 범인이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유리잔을 떨어뜨릴 것이다. 긴장감은 부자연스러운 행동 속에서 더욱 자주 나타난다. 쿠르츠는 마치 아무 이야기도 듣지 않은 듯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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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탐정이 전문가들보다 또 다른 이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추어 탐정은 개의치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추어 형사는 쓸데없는 사실을 말할 수 있고 터무니없는 이론들도 전개할 수 있다. (P60)


증거가 없다. 마틴스는 생각했다. 증거가 없다. 그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모두들 죽은 순간의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돈과 비행기표라는 뇌물을 사용하여 빈에 있는 해리의 유일한 두 친구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그러면 그 제3의 사나이는? 그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P66)


“당신의 행동을 증명할 증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으므로 그가 계속 미행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가 코흐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진술했던 것만큼 그가 결백한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었다. 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언제나 진짜 살인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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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과 평화(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평화라 부를 수만 있다면)는 많은 범죄를 낳게 하지만 이 사건처럼 비열한 범죄를 낳은 적은 없었다. 식료품의 암거래 상인들은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식품만을 공급했으며, 그러한 현상은 모든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급이 부족할 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자신들이 구입한 물품을 일반인들에게 공급했다. 그러나 페니실린 범죄는 다른 성격을 띠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페니실린이 오직 군대의 병원에만 공급되었다. 민간인 의사나, 심지어 민간인 병원에서조차도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구입할 수 없었다. 페니실린 암거래가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비교적 해로움이 적은 편이었다. 군 병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페니실린을 훔쳐다가 오스트리아 의사들에게 아주 고가로 팔아 넘겼다. 페니실린 한 병에 70파운드까지 받았다. 이러한 방법을 분배의 형태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부유한 환자에게만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불공평한 분배의 형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의 유통 방식으로는 공평함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 암거래는 얼마 동안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끔 병원 보조원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지만, 그러한 위험은 페니실린 가격을 올려놓는 결과만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암거래는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거물들은 조직 내에서 거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장물을 훔친 도둑은 적은 액수의 돈을 받았지만, 대신 확고한 안전 보장을 얻어냈다. 때문에 사고가 생겼을 때엔 그는 보호를 받았다.

인간의 본성은 마음으로는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이상야릇하게 뒤틀린 추리력을 갖고 있는 법이다. 그러한 본성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만다. 스스로 봉급 생활자처럼 당당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에 만일 죄가 될 것이 있다면 그 죄과는 지도자들의 것이 된다. 그런 면에서 암거래상의 조직은 전체주의의 정당과 흡사한 점이 있다.

여기까지를 나는 종종 2단계라고 불렀다. 3단계가 시작되는 것은 범죄의 조직자들이 그들에게 떨어지는 이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을 내릴 때부터 시작된다. 페니실린을 합법적으로 구입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조직자들은 사업이 잘 되는 동안에 더 많은 돈, 더욱 신속한 돈을 바라게 되었다. 그들은 페니실린에 물감을 들여 농도를 묽게 했으며, 페니실린이 분말인 경우에는 모래를 섞어 분량을 늘렸다. 나는 책상 서랍 속에 그들이 사용하던 페니실린을 모두 수집해놓았으므로 그 견본들을 마틴스에게 일일이 보여주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며 아직도 이야기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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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말이 오고, 비행기가 항로에서 곤두박질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어느 누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인가.

20년 전 학교의 복도에서 출발한 자연스러운 우정,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 그리고 믿음을 지닌 그 모든 세계가 마틴스의 면전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추억들 — 길다랗게 펼쳐진 잔디밭의 오후, 브릭워드 공원에서의 불법 사냥, 미래에 대한 수많은 꿈, 산책, 해리 라임과 공유했던 모든 경험들이 원자폭탄으로 부서져 흩어진 오물처럼 오염되고 말았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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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해리가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보았던 그대로의 해리를 기억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사람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에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이에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해요.” (P122-123)


“자네는 서부극을 써서 1년에 얼마쯤 벌고 있나?”

“천 파운드 정도 되지.”

“세금 제하기 전의 액수겠지. 나는 세금이라곤 한 푼도 내지 않고 3만 파운드를 버네. 그것이 요즘의 세상 형편이란 말일세. 여보게, 최근에 인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정부에서도 생각지 않는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생각해야 하나? 정부는 국민이 어떻고, 무산 계급이 어떻고 하지만 나는 얼간이들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네. 결국은 말장난일세. 그들은 나름대로 5개년 계획을 세우지만 나는 내 계획을 세우는 것일세.”

“자네는 가톨릭 신자였지 않나.”

“오, 지금도 나는 가톨릭 신자지. 신과 자비와 모든 것을 믿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어떤 사람의 영혼도 해치고 싶지 않거든. 죽은 사람들은 행복한 죽음을 맞았지. 그들은 이곳 지상의 생활을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 불쌍한 사람들이지.”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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