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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영화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1964년

by 노용헌

<인간의 굴레>(1934), <인간의 굴레>(1946)


1934년 영화 <인간의 굴레>가 가장 유명하다. 레슬리 하워드와 베티 데이비스 등이 출연했다. 베티 데이비스는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음에도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들지 못해 논란이 있었다. 1964년 영화 <인간의 굴레>는 킴 노백과 로런스 하비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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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립이 블랙스터블에 온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백부를 몹시 언짢게 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아침 식탁에서 조그만 소포꾸러미 하나를 보았다. 런던의 죽은 케어리 부인 집에서 전교(轉交)되어 온 것이었다. 주소는 케어리 부인 앞으로 되어 있었다. 사제가 소포를 뜯어보니 케어리 부인의 사진이 여남은 장 들어 있었다. 얼굴과 어깨만을 찍은 상반신 사진들로, 머리 단장을 평소보다 수수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이마에 내려뜨린 모습이 여느 때와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얼굴은 야위고 초췌하였으나 병이 아름다운 용모를 해치지는 못한 듯 커다랗고 검은 눈에는 필립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리어 있었다. 죽은 여자를 본 순간 사제는 움찔 놀랐지만, 곧 당혹감이 뒤따랐다. 사진은 최근에 찍은 것 같은데, 도대체 이걸 누가 주문했단 말인가.

“필립, 이 사진 어떻게 된 건지 아니?” 사제가 물었다.

“엄마가 사진을 찍었다고 하신 말이 생각나요, 와트킨 아주머니께서 엄마를 야단치셨어요. 엄마 말씀이 이랬어요. 저 애가 큰 다음에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뭔가 남기고 싶다고요.”

케어리 씨는 흘끗 필립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맑고 높았다. 아이는 말은 기억하나 그 뜻은 모르고 있었다.

“한 장만 골라 가지렴. 네 방에 놓아두어라. 나머지는 내가 딴데 간수하겠다.” 케어리 씨가 말했다. (P33-34)


그녀는 결혼 때 사진을 찍어본 뒤로는 한번도 찍어본 적이 없었다. 결혼도 벌써 십년 전 일이다. 마지막 모습이나마 자식에게 남겨두고 싶었다. 사진이라도 남아 있으면 설마 제 어미를 깡그리 잊어 버리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하녀를 불러 일어나고 싶다고 하면, 말릴 것이 뻔하다. 의사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투거나 입씨름할 기력도 없다. 그녀는 침대를 빠져나와 옷을 주워입기 시작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바닥이 저려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단념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머리를 매만졌던 적이 없었다.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빗으려 하자 현기증이 났다. 아무리 해도 하녀가 하던 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름다웠다. 가늘면서도 풍성한, 짙은 금빛 머리카락이었다. 눈썹은 곧고 짙었다. 스커트는 까만 것을 입었지만, 웃옷은 제일 맘에 드는 이브닝 드레스로 입었다. 그 무렵 유행하던 흰 능직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살결은 투명했다. 하기야 얼굴에 핏기가 있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때문에 아름다운 입술이 더 붉어보였다. 서러운 울음이 북받쳐올랐다. 하지만 자신을 안쓰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주었던 털옷을 걸쳐 입고 -- 그것을 받고 얼마나 자랑스럽고, 얼마나 기뻤던가 -- 두근대는 가슴으로 살그머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사히 집을 빠져나와 마차를 몰아 사진관으로 갔다. 여남은 장을 찍을 수 있도록 값을 치렀다. 사진을 찍는 도중, 물 한 컵을 얻어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진관의 조수는 그녀의 병색을 보고 다음에 오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그녀는 마저 다 찍겠다고 우겼다. 마침내 사진을 다 찍고 나서 그녀는 다시 켄징턴의 그 음침하고 비좁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었다. 죽음을 맞기에는 끔찍한 집이었다. (P35-36)


어느 날, 그는 행운을 만났다. 레인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삽화에 사로잡혔다가 다음엔 마법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들도 마저 읽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딴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주변의 생활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사람들이 두세 차례 불러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필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독서 습관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필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써 나날의 현실 세계를 쓰라린 실망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P62)


싱거가 필립을 불렀으나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베개를 깨물고 있었다. 그가 지금 울고 있는 것은 팔이 아파서도 아니었고, 아이들이 발을 보고 말아 굴욕스러웠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발을 보여주고 만 제 자신에 대해 분통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삶이 아무래도 비참하다고 여겨졌다. 어린 마음에도 이러한 불행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에머가 그를 침대에서 안아다가 어머니 곁에 데려다주었던 그 추운 아침이 생각났다. 그 뒤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새삼스레 자기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자기를 꼭 껴안고 있었다. 문득 이 모든 게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죽음, 사제관에서의 생활, 이틀 동안의 이 끔찍한 학교 생활이 실은 꿈이 아닐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집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 사이 눈물이 말라 있었다. 이처럼 불행하다면 이건 꿈일 거야. 어머니는 살아 계셔, 에머도 곧 올라와서 잠자러 가겠지. 그는 잠이 들었다. (P76)


제 발가락을 가지고 놀면서도 그것이 옆에 있는 딸랑이가 아니고 제 몸의 일부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점차 고통을 통해서 제 육체의 실재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도 같은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 육체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유기체라고 의식하게 되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같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자신을 완전하고 독립적인 개성으로서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대체로 사춘기에 오지만, 그렇다고 자기와 남들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할 정도까지 발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의 행운아는 오히려 벌통 속의 벌처럼 자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 같은 활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다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성령강림절 다음 월요일에 햄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춤추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구경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 팰 맬 가의 클럽 창문에서 왕의 행렬을 구경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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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있다. 이제부터 장학금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다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필립은 설교에 짜증이 났다. 교장에게도 화가 나고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전 옥스퍼드에 갈 생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성직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나?”

“마음을 바꿨습니다.”

“왜?”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P132)


“넌 뭘 하고 싶니, 필립” 케어리 부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직 결정한 건 없어요. 하지만 뭘 하든 외국어를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요. 독일에서 일 년쯤 보내면 그 지겨운 곳에서 죽치는 것보다 훨씬 얻는 것이 많을 거예요.”

옥스퍼드도 결국 지금 생활의 연장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당장의 결심한 소망이었다. 게다가 옥스퍼드에 가면 동창도 얼마간 만나게 될터인데 동창이라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교 생활은 실패였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P139)


“좋다, 네가 정말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다. 독일은 언제 갈 참이냐?”

필립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었다. 마침내 싸움에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의 느낌이 오지 않는다.

“오월 초순입니다.”

“그럼, 돌아오거든 놀러와야 한다.”

교장은 손을 내밀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었더라도 필립은 마음을 바꿨을지 모른다. 하지만 교장은 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본 것 같았다. 필립은 교장의 사택을 걸어나왔다. 이제 학창 생활은 끝났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느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격렬한 환희는 느낄 수 없었다. 구내를 천천히 걸었다. 그지없이 울적한 마음이 그를 휩쌌다. 공연히 바보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후회가 되었다.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교장을 찾아가 마음을 바꿨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이야말로 용납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은 자신이 못마땅했고, 자신의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풀이 죽은 채로 그는 혼자 물었다. 사람이란 고집대로 하고 나면 언제나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것일까. (P149-150)


“글쎄요. 한 일 년쯤? 집에서는 그런 다음 옥스퍼드에 가래요.”

경멸스럽다는 듯, 워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옥스퍼드라는 학문의 전당에 경외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도 필립으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뭐 하러 그런 데를 가나? 기껏해야 우등생이나 될까. 왜 이곳 대학을 들어가지 않아? 일 년 가지곤 안 돼. 오 년은 있어야지. 알고 있나, 인생에 좋은 게 두 가지가 있네.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가 그것이지. 프랑스에서는 행동의 자유가 가능해.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다만 생각은 딴 사람들처럼 해야 하지. 독일에서는 행동은 딴 사람처럼 해야 하지만 생각은 마음대로 할 수 있네. 두 가지가 다 좋은 것들이지. 내 개인으로서는 생각의 자유를 더 중시하네. 한데 영국엔 둘 다 없지. 다들 인습에 짓눌려 살아.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어. 민주주의 나라이기 때문이야. 하기야 미국은 더 심하겠지.” (P158-159)


유럽을 휩쓴 자유의 열풍이 이때만큼 만인의 가슴을 뜨겁게 불지핀 적이 없었다. 이 열풍은 1789년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던 절대주의와 폭정의 요소를 일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 인간 평등과 인권 옹호 사상을 열정적으로 신봉했던 무슈 뒤끄로는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파리의 바리케이드 뒤에서 싸우기도 하다가, 오스트리아 기병이 밀라노를 공격하기 전에 탈출하며, 여기서는 투옥당하고, 저기서는 추방당하는데, 그러면서도 마법과도 같은 그 말, 자유라는 말에 늘 희망을 걸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다 마침내, 병과 굶주림에 몸이 망가지고, 나이가 들어 이제는 어쩌다 얻어걸리는 가난한 학생들의 개인교습밖에는 입에 풀칠할 재간이 없는 신세로 전락하여, 이 아담한 소읍에서 유럽의 어떤 폭정보다 더 잔인한 생활의 폭압에 신음하고 있다. 비록 침묵 속에 숨기고는 있지만, 그는 젊은 시절의 위대한 꿈, 그 꿈을 버리고 안일의 흙구덩에서 게으르게 뒹굴고 있는 인류에 대해 한없는 경멸감을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삼십 년의 혁명 운동을 통해 인간에게는 자유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어, 결국은 찾을 가치도 없는 것을 찾는데 인생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머지 이것도 저것도 다 싫어 오직 죽음의 해방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지. (P167)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확신은 굳어갔다. 다음 몇 주일 동안 의심에 보탬이 될 만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본능적인 느낌을 확인하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신앙을 버린 것은 딴 이유보다 그에게 종교적인 기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밖에서 강요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것은 환경과 범례의 문제였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범례를 통해 그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신앙을 간단히 벗어던져 버렸다. 마치 몸에 맞지 않게 된 외투처럼, 비록 깨닫지는 못했지만 신앙이 오랫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지라, 그것을 버리고 나자, 처음에는 삶이 낯설고 외롭게 보였다. 지팡이에 의지해 오던 사람이 갑자기 지팡이 없이 걷게 된 기분이었다. 낮은 더 춥고, 밤은 더 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벅찬 감격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삶이 더 아슬아슬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이윽고, 내던져버린 지팡이, 벗어버린 외투가 오히려 힘겨운 짐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에게 신앙의 핵심을 이루었던 부분은 수년 동안 강요되었던 종교의 의례였다. (P194)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에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적인 책들, 그리고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대화, 이 두 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 이상한 것은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억제할 수 없는 내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그 환멸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P200-201)


케어리 부인 생각에 신사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네 가지 전문직, 곧 육군, 해군, 법률가, 성직자뿐이었다. 시동생이 의사여서 거기에 의사를 추가시킨 적이 있지만, 자신이 젊었을 적에는 아무도 의사를 신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앞엣것 두 가지는 고려에서 제외되었고, 필립으로서는 성직자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남은 것은 법률 분야뿐이었다. 블랙스터블의 의사 말로는, 신사들도 요즘에는 공학 쪽을 많이 택한다고 했지만, 케어리 부인은 당장 반대했다.

“전 필립이 장사일 하는 거 싫어요.”

“그래요, 전문직을 가져야 해.” 사제도 말했다.

“부친처럼 의사를 하도록 하지 그래요.”

“전 싫어요.” 필립이 말했다. (P232-233)


“그 사람, 말은 잘하더군, 하지만 내용은 엉터리였어, 예술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얘기하더라구.”

“그렇지 않다면, 우린 여기에 뭐 하러 왔죠?” 필립이 물었다.

“자네가 여기 뭐 하러 왔는지 난 모르네. 내가 알 바도 아니고, 하지만 예술이란 일종의 사치야. 인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기 보존과 종족 번식이지. 이 본능이 충족될 때라야만 인간은 작가나 화가, 시인이 제공해 주는 오락에 빠질 수 있는 거지.”

크론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잔을 들이켰다. 그에게는 이십년 동안 깊이 생각해 왔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얘기를 잘 나오게 하니까 술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술 먹을 구실을 만들어주니까 얘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P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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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자넨 재미있을 거네만, 아다시피 난 가난해서 조그만 다락에서 살고 있어. 미용사들하고 카페의 보이들이랑 짜고 나를 등쳐먹는 상스러운 여자하고 말이지. 영국 독자를 위해 쓰레기 같은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욕먹을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보고 논평을 쓰기도 하지, 하지만 자네,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말할 수 있겠나?”

“글쎄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아닐세. 자네 스스로 답을 발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필립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라, 는 것인가?”

“그런 셈이죠.”

“기독교로구먼.”

“아녜요.” 필립은 분개해서 말했다. “그건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보편적인 도덕률일 뿐이죠.”

“보편적인 도덕률 같은 건 없네.” (P348-349)


“자넨 괜찮은 친군데 술을 안 마셔. 정신이 멀쩡하면 대화가 안 되지. 헌데 내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고 말할 때는......”

이 말은 아까 이야기의 계속임을 알 수 있었다. “관습적인 뜻에서 그렇다는 거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에 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나는 인간 행위에 위계를 정하고 어떤 것은 가치 있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네.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하는 말은 내게 의미가 없네. 나는 칭찬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아. 받아들일 뿐이야. 만물의 척도는 나 자신이니까. 세계의 중심은 나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타인들도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난 나 자신만을 위해 말하네. 타인은 내 행위를 제약하는 존재들로서만 인식하지. 그야 세상은 그 하나하나의 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돌기도 하지. 누구에게나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ㅑ. 타인에 대한 나의 권리는 내 힘이 미치는 범위에 국한되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일 수밖에 없네. 인간은 군집성이라 사회를 이루어 살고, 사회는 강제력을 수단으로 유지되고 있지. 강제력이란 무기의 힘 -그게 경찰이지-과 여론의 힘 -그게 미세스 런디일세- 그 두 가지 힘을 말하네. 한편엔 사회가 있고 다른 편엔 개인이 있네. 두 가지가 다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유기체지. 힘과 힘이 맞서 있어. 나는 홀로 서서, 어쩔 수 없이 사회를 받아들이지만, 그게 반드시 싫은 것은 아니야. 왜냐, 내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사회는 약자인 나를, 나보다 강한 자의 폭압으로부터 보호해 주거든. 하지만 내가 사회의 법에 복종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야. 난 법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아. 난 정의를 몰라. 권력만을 알 뿐이지. 그리고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경찰에게 봉급을 지불한다면, 그리고 징병제도가 시행되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내 집과 땅을 침략자로부터 지키는 군대에 복무한다면, 나와 사회는 서로 빚이 없는 거지.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난 사회의 힘에 내 꾀를 써서 대항하는 거네. 사회는 자기보존을 위해 법을 만들고, 내가 그 법을 어기면 날 가두거나 죽이지. 사회는 그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어. 내가 법을 어기면 국가의 보복을 받겠지만, 난 그걸 벌로 간주하지 않고 내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느끼지 않을 걸세. 사회는 명예심이라든가, 재물이라든가,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것들로 내가 사회에 봉사하도록 유혹하지. 하지만 난 사람들의 평판 따윈 관심도 없고, 명예를 경멸하고, 재산이 없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다네. (P351-352)


그는 미겔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장엄한 투쟁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서글퍼졌다. 그는 훌륭한 작가가 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재능이 없었다. 필립은 자신의 작품을 보았다. 거기에 뭔가 있기는 있는가. 아니면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성취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으며, 자신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필립은 패니 프라이스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굳게 믿고 있었고 의지력도 대단했다.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난 그림을 포기하겠어요.” 필립이 미겔에게 말했다. “이류 화가가 되어 무얼하겠어요.” (P389)


클러튼은 눈 위에 두 손을 얹고 말하고자 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려고 했다.

“화가는 자기가 보는 대상에서 독특한 감각적 인상을 받아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네. 그런데, 왠지는 몰라도, 화가는 선과 색채로서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거야. 음악가도 마찬가지지. 시의 한두 줄을 읽으면 어떤 음들의 결합이 마음속에 떠오른단 말야. 왜 그 말이 왜 그러한 음들을 떠올리는지는 자기도 몰라. 어쨌든 그리 될 뿐이야. 그리고 말야, 비평이 왜 의미가 없는지 두 번째 이유를 말해 주겠네. 위대한 화가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도록 강요하네. 하지만 다음 세대에는 또 다른 화가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그 사람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대 화가를 통해 평가하네. 바르비종 화가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나무는 이러이러하게 본다고 가르쳤지. 그런데 마네가 나타나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니까 사람들은 나무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야. 어떤 화가가 나무를 그런 식으로 볼 뿐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단 말이네.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네. 우리가 우리의 시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위대0한 화가라고 부르지. 그러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해, 그러나 우리 자신은 마찬가지야. 위대하다든가 시시하다든가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리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었으니까.” (P404-405)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필립은 이런 느낌이 들었다. 진정한 화가나 작가, 음악가에게는 자기의 일에 완전히 몰입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삶을 예술에 종속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어떤 힘에 굴복하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본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느라 그들의 인생은 살아보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필립에게는, 인생이란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다양한 체험을 추구하고, 삶의 매 순간이 주는 모든 감동을 향유하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행동을 취하고 그 결과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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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자신에 이로운 행위를 미덕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덕이라 부른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그 이상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죄란 자유인이 벗어나야 하는 편견이다. 사회는 개인과의 경쟁에서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법, 여론, 양심이다.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간지(奸智)로 대항할 수 있다. 꾀는 강자에 맞선 약자의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들키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세상의 말은 이 현실을 잘 말해 준다. 하지만 양심은 내부의 반역자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회를 편들어 싸우며 개인으로 하여금 적의 번영을 위해 자신을 바치도록 만드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희생이다. 분명한 사실은 국가와 의식화된 개인, 이 양자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이용할 뿐으로, 방해자는 짓밟아버리고, 충실하게 복종하는 자에게는 훈장, 연금, 명예 등의 상을 준다. 후자는 독립적인 사람의 경우에만 강할 뿐인데, 편의상 국가 안의 삶을 요령껏 살아나가면서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돈도 내고 봉사도 하지만 의무감은 전혀 갖지 않는다. (P433)


겨울학기 삼 개월 사이에 시월에 입학한 학생들은 이미 구분이 뚜렷해져 있었다. 우수 집단, 똑똑한 집단, 열심히 하는 집단, <농땡이> 집단의 구분이 뚜렷했다. 필립은 그의 실패가 자신에게만 놀라운 일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 간식 시간이라 의학교 지하층에 가면 많은 학생들이 차를 마시러 내려올 것이다. 시험에 합격한 친구들은 희희낙락할 것이고,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듯 그를 쳐다볼 것이다. 불합격한 친구들은 위로를 받기 위해 그를 위로하려고 할 것이다. 이 일이 다 잊혀질 때까지 한 주일 동안은 병원에 가지 말자는 것이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죽도록 가기 싫었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갔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순간 그는,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빠르라>는 인생의 좌우명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아니면,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의 본성에는 이상하게 병적인 데가 있어 자기 학대에 음울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P480)


필립은 자신을 태우는 그 열병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 것은 아니었다. 인간사란 죄다 덧없는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는 끝이 있게 마련임을 알고 있었다. 그날을 그는 애타게 기다렸다. 사랑이란 심장에 서식하는 기생충인가, 저주스럽게도 그의 생명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다. 이 기생충이 그의 삶을 얼마나 세차게 빨아대는지 필립은 다른 일에서 도대체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전에는 슨트 제임스 파크의 아름다움에 기쁨을 느낄줄도 알았다. 벤치에 앉아 하늘에 실루엣을 던지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곤 했었다. 일본의 판화 같은 풍경이었다. 그림 같은 선창들, 거룻배들이 오가는 아름다운 템즈 강에서도 끊임없이 마술적인 매혹을 느꼈다. 런던 하늘의 다채로운 변화를 보노라면 그의 영혼은 유쾌한 공상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이제 아름다움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밀드레드가 곁에 있지 않으면 지루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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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립도 자신의 행복을 알아차릴 만한 지각은 있었다. 그녀는 한 사람의 아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결코 그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다. 노라는 지금까지 사귄 친구들 가운데 가장 멋진 친구였다. 그녀가 가진 공감의 마음은 남자에게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적인 관계는 우정의 가장 강한 고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정을 완성시켰으나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립은 성적 욕구가 충족되어서인지, 성격도 차분해지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필립은 이따금 그 끔찍한 연정에 사로잡혔던 겨울을 생각했다. 그런 때면 밀드레드에 대한 혐오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P19)


머캘리스터는 <너의 모든 행위가 만인의 보편적 행위 원리에 맞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定言命令)울 상기시켰다.

“제겐 전혀 의미 없는 말처럼 들려요.” 필립이 말했다.

“대단하군. 임마누엘 칸트의 말에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왜요? 남의 말이나 존경하는 건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 아녜요? 사람들은 남의 말을 너무 지나치게 존경해요. 칸트의 사상이 반드시 맞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생각한 것에 불과하죠.”

“그래, 자넨 정언 명령을 어떻게 논박하려는가?”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제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처럼 이야기했다.)

“정언 명령은 사람이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또한 이성이 가장 확실한 안내자인 듯이 말하고 있죠. 왜 이성의 명령이 감정의 명령보다 우월해야 되는 겁니까? 서로 다를 뿐이지요. 제 말은 그겁니다.”

“자넨 정념의 노예로서 만족하나 보군.”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는 것이지 만족하는 노예는 아니지요.” 필립은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필립은 밀드레드를 쫓아다닐 때의 미친 듯한 열병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긴 하면서도 얼마나 갈등했으며,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꼈던가.

<정말 다행이야, 이제 해방되었으니.>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P28-29)


다시 한번 버튼의 책을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읽으면서도 한사코, 나는 왜 이리 바보일까, 하는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같이 여행을 가라고 한 사람도 자기였고, 거기에다 돈까지 대주었으며, 사양하는 것을 억지로 받게 한 사람도 자기였다. 그리피스를 밀드레드에게 소개해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신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그처럼 정신없이 반했으니 그리피스도 쉽게 욕정이 일지 않았겠는가. 지금쯤 옥스퍼드에 도착했을 것이다.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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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에게 그처럼 많은 돈을 써버린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또 닥친다면 그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 생각하고 웃는 일이 있었다. 그가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행동도 굼뜬 편이라 친구들이 그를 강직하고, 신중하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친구들은 그를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의 상식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차분한 표정이 나비의 보호색 같은 기능을 하는 가면(假面)--물론 자기도 모르게 쓰는 가면이지만--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 자기의 의지 박약에 놀라곤 했다. 가벼운 감정에도 마치 바람결의 낙엽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격정에 사로잡히면 한없이 무력해진다. 자제력이라고는 없었다. 자제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에 무관심하기 때문이었다. (P129)


초진 환자들이 들어왔다. 남자의 병은 거의 과음 때문이었지만 여자의 경우, 영양실조가 많았다. 여섯시경이 되자 진료가 끝났다. 필립은 탁한 공기 속에 서서 내내 보조를 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끌고 동료들과 차를 마시러 학교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하고 보니 일은 아주 흥미로웠다. 거기에는 가공되지 않은, 예술가가 다루어야 할 재료 그대로의 인간이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예술가이고 환자들은 손 안의 진흙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야릇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파리 시절을 떠올리며 흐뭇한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절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보겠노라고 색채며 색조며 명암이며 하는 것들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을 직접 접촉해 보니 전에 느껴보지 못한 힘의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한없는 흥분을 느꼈다. (P153-154)


박사는 벨을 울려 다음 환자를 불렀다.

“신사 여러분, 잘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다원적이고 다양하다고 할까. 눈물과 웃음이 있었다. 행복과 슬픔이 있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고, 무정하기도 했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소란스럽고 격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기도 했다.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하찮기도 했다.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기쁨이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있었다. 욕망이 무거운 발을 끌면서 병원의 방들을 지나갔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 홀로 된 아내들과 비참한 아이들에게 벌 주면서, 술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벗어날 길 없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병원의 진찰실에서는 죽음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불쌍한 소녀를 공포와 수치로 몰아넣으며 생명의 탄생을 진단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선도 악도 없었다. 사실만이 존재햇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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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크론쇼는 냉큼 대답하지 않았다. 할말을 찾는 모양이었다.

“때론 두렵네. 혼자 있을 때는.” 그는 필립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자네는 그걸 벌이라고 하겠나? 아닐세. 난 두려움을 꺼리지 않네. 어리석지 않나. 언제나 죽음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저 기독교의 말 말일세. 삶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죽는다는 걸 잊는 것일세. 죽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네. 현명한 인간이라면 죽음의 공포 따위에는 전혀 영향받지 않아. 그야 나도 죽을 때에는 살려고 몸부림치겠지. 그리고 미칠 듯이 무섭겠지. 또 나를 그런 식으로 몰아온 내 인생을 뼈저리게 후회하지 않곤 못 배기겠지. 하지만 말일세, 난 그 후회를 인정하지 않네. 내 지금 비록 허약하고, 늙고, 병들어 가난하게 죽어가고 있지만 난 여전히 내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고 있네.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페르시아 융단을 기억하십니까?”

지난날의 저 여유 있는 미소가 크론쇼의 입가에 떠올랐다.

“자네가 인생의 의미가 뭐냐고 물어서 내가 그 융단이 해답을 줄 거라고 했지. 그래, 해답을 찾아냈나?”

“아뇨.” 필립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해 주시지요.”

“아냐, 아닐세. 그럴 수 없네. 스스로 찾지 않는 해답은 의미가 없네.” (P164-165)


필립은 젊은 시절의 크론쇼를 상상해 보았다. 몸은 호리호리하고 발걸음은 경쾌하며, 머리카락이 더부룩한 청년, 활달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청년 크론쇼를 머릿속에 그려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필립이 세웠던 삶의 원리, 그러니까 길모퉁이 저쪽에 있는 경관을 조심하면서 자신의 본능을 따르는 것, 그 원리도 이 경우에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크론쇼가 바로 그런 원리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저처럼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는가. 본능이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필립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다. 그러한 삶의 원리가 소용없다면 도대체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런 방식이 아니고 저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결국 감정에 따라 행동하리라. 하지만 그 감정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결과가 좋게 끝난다거나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삶이란 얽히고설킨 혼돈만 같았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사로잡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목적도 증발해 버린다. 그저 뛰기 위해 뛰고 있는 것만 같다. (P185)


필립은 진리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깐깐한 편인지라 이같이 가벼운 태도가 적이 놀라웠다.

“그럼 선생께서 참되다고 믿지 않는 것을 애들이 배우고 있어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름다운 것이라면 참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난 별로 상관하지 않아요. 심미적 감각뿐만 아니라 이성까지도 만족시킨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니까. 난 베티가 카톨릭 교도가 되길 바랐어요. 종이꽃 관을 쓰고 개종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이 여자는 죽으나 사나 신교도죠. 그것도 그렇지만 종교란 체질적인 문제이기도 해요.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거나 믿게 돼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신앙을 쏟아넣든 헛일이에요. 결국 그걸 버리게 되니까. 도덕을 가르치는 데는, 모르긴 몰라도, 신앙이 제일 좋을 겁니다. 신앙이란 당신네 의사들이 내복약에 사용하는 약과도 같아요. 다른 약을 용해시키는 약 말입니다. 그런 약은 자체로는 효과가 없지만, 다른 약의 흡수를 돕죠. 우리가 도덕을 받아들이는 건 그것이 바로 종교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종교를 잃게 되면 도덕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되죠. 사람은 허버트 스펜서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선을 배우게 되면 착한 사람이 되기 쉬워요.”

이것은 필립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그는, 기독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나야 할 굴욕적인 굴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210)


필립은 스페인 신사들의 초상을, 그들의 주름 달린 옷자락, 뾰족한 수염, 엄숙한 검은색 의상과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부옇게 드러나 보이는 얼굴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엘 그레코는 영혼(靈魂)의 화가였다. 그리고 이 신사들, 지쳐서가 아니라 마음의 억압 때문에 창백해지고 쇠약해진 이 신사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이 내부의 마음으로만 향하여, 보이지 않는 영광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세가 내세로 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음을 이보다 냉혹하게 보여준 화가가 있을까. 그가 그린 사람들의 영혼은 각자의 눈을 통해 저마다 불가사의한 그리움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의 오관은, 소리나 냄새나 빛깔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미묘한 감동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반응한다. 귀족이 수도승의 마음을 품고 걷고 있으며, 그의 눈은 수도원의 성자들이 보는 것을 보고 있고, 그런데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입가에는 미소조차 어리어 있지 않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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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관념주의에 대해 얼마간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삶에 대해 늘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태껏 만난 관념주의는 대체로 삶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처럼 여겨졌다. 관념주의자는, 번잡한 인간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몸을 빼낸다. 싸울 힘이 없는 그는 삶의 투쟁을 비속(卑俗)하게 여긴다. 그는 자만심이 강하며, 남들이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는 만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들을 경멸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필립이 보기에, 그 전형은 헤이워드였다. 잘생기고, 게으르며, 이제 너무 살이 찐데다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옛 미모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확실치는 않지만 언젠가는 굉장한 일을 하고 말겠노라는 뜻을 아직도 그럴싸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풍 뒤에는 길거리의 천박한 연애와 위스키밖에 없었다. 헤이워드로 대표되는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필립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불결, 악덕, 불구에 그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인간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비열성이나 잔인성이나 이기심, 혹은 탐욕의 예를 목격할 때, 그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파리 시절, 그는 삶에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진실뿐임을 배웠다. 미의 탐구는 감상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름다움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풍경화에 <쇼콜라 므니에>의 광고판을 그려넣지 않았던가? (P218-219)


그것은 강한 것, 힘찬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다양함을, 삶의 활력을, 아름다움과 추함, 고매함과 비열함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것 역시 리얼리즘이기는 하지만 한 차원 높은 현실주의, 사실들에 더 강렬한 빛을 던져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변모시키는 리얼리즘이었다. 필립은 지금은 죽고 없는 저 카스티야 귀족들의 준엄한 눈을 통해 사물을 더 심오하게 보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격렬하고 뒤틀려 보였던 성자들의 몸짓도 이제는 어떤 신비스런 의미를 띠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 중요하긴 하지만 미지의 언어로 되어 있어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 같았다. 그는 늘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그 의미가 있는 듯이 여겨졌다. 다만 그것은 불투명하고 애매했다. 그는 깊은 번민에 빠졌다. 그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이 폭풍우 몰아치는 어두운 밤, 번개의 섬광에 한순간 드러난 산맥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도(目睹)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우연에 맡길 필요가 없다는 것, 사람의 의지란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또한, 자기통제라는 것이 격정에 굴복하는 의지만큼이나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 자세일 수 있다는 것, 내면의 삶도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미지의 땅을 탐험한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다채롭고, 풍부한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P219-220)


그는 방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묘석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기원전 사오세기경에 아테네의 석공들이 만든 것이었다. 아주 단순한 형식으로 대단한 기교를 들이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아테네의 뛰어난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 세월은 대리석 묘석을 어딘지 히메투스의 벌꿀을 연상시키는 벌꿀색으로 바꾸어놓고 윤곽선도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나체상 모양도 있었고, 죽은 자가 사랑하는 이들과 하직하는 모양, 죽은 자가 살아남은 사람과 손을 붙들고 있는 모양의 조각도 있었다. 어느 묘석에든 <잘 가시오>라는 슬픈 말이 새겨져 있다. 그 말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 간결함이 오히려 마음을 무한히 슬프게 했다. 친구가 친구와 이별하고, 아들이 어머니와 이별했다. 이 감정의 억제가 살아남은 이의 슬픔을 더욱 뼈저리게 했다. 아득하게 먼 옛날의 일이다. 이 사별의 불행이 있은 뒤 세월은 몇백 년이 흐르고 흘렀다. 이천 년이 흐르는 사이, 운 사람이나 울린 사람이 이제 모두 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슬픔만은 아직도 살아 있다. 슬픔에 가득 찬 필립의 가슴속에서는 연민이 솟구쳐올랐다.

“정말 가엾고 불쌍들 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입을 벌린 구경꾼들, 안내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뚱뚱한 외국인들, 상점에 바글거리는 천하고 평범한 사람들, 째째한 탐욕과 저속한 걱정거리들을 가진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죽을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들 역시 사랑을 하며, 사랑하던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아들은 어머니와, 아내는 남편과, 그런데 이들의 삶이 추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들의 사별은 더 비극적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P36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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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답을 알아맞히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답을 듣고 나면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주를 돌고 있는 별의 한 위성 지구 위에서, 이 유성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조건에 영향을 받아 생물이 발생했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듯이 그것은 다른 조건 아래에서는 끝장을 볼지도 모른다. 다른 생명체보다 하등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 그 인간도 창조의 절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물리적 반응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P364-365)


삶에 아무런 뜻이 없음을 마치 수학 공리의 증명처럼 힘있게 입증해 준 상상의 분출과 함께 또 하나의 사상이 용솟음쳤다.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알지 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 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P366)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迷妄)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P367)


이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새출발을 해서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지난 이 년 동안 겪어야 했던 궁핍한 삶이 한스럽게만 여겨졌다.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발버둥치는 사이 삶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 일용할 양식을 얻으리라.> 이 말은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기보다 생존을 감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향유(香油)가 아닌지.

필립은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었다. 인생을 양탄자의 무늬로 보게 된 자신의 사상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겪은 불행이란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권태이든 격정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무늬를 더 풍부하게 하니까. 그는 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찾았다. 학생 시절, 학교 구내에서 대성당의 고딕식 건물을 바라보고 그것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대성당 쪽으로 발길을 옮겨 구름 낀 하늘 아래 솟아 있는 거대한 잿빛 형상, 그리고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찬양과도 같이 높이 솟아 있는 중앙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연습장에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다들 민첩하고 강하고 팔팔하다. 듣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외침과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청춘의 외침이 듣기를 강요한다. 눈앞의 아름다운 사물을 바라보는 이는 자신밖에 없었다.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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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칠백 정도는 수입이 되네. 자네 몫이 얼마가 되느냐는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내게는 조금씩 갚아나가면 돼. 그러다 내가 죽으면 자네가 이어받아서 하고 말이지. 내 생각엔 이삼 년 동안 이 병원 저 병원 떠돌아다니다 자네 힘으로 개업할 수 있을 때까지 조수일을 보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네만.”

의사직을 가진 사람이면 대부분 냉큼 받아들일 좋은 기회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의사직은 만원이었다. 그가 아는 사람의 반은 이 정도의 수입이라도 확실히 보장되면 감지덕지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사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제가 여러 해 동안 계획해 왔던 일을 다 단념해야 합니다. 저는 그 동안 이런저런 험한 고생을 해왔습니다만 늘 한 가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면허를 따면 여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엔 아침에 눈을 뜨면,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어디라고 딱히 정한 곳은 없습니다만 제가 가보지 않은 데면 아무 데나 떠나고 싶습니다.”

이제 그 목표도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내년 여름쯤이면 성누가병원의 근무도 끝날 것이다. 그러면 스페인으로 가리라. 그리고 자기에게는 낭만을 상징하는 그 나라를 돌아다니며 대여섯 달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배를 얻어 타고 동양으로 간다. 인생이 앞에 있으므로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내키면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곳을 찾아, 낯선 삶을 사는 낯선 민족들 사이를 방랑할 수도 있으리라. 자신이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삶에 대해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느낌, 풀면 풀수록 더욱 불가해해지는 삶의 신비를 깨우치는 무슨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설사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가슴을 갉아대는 불안만큼은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닥터 사우스는 지금 그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다. 애매한 이유를 대고 제의를 거절하면 호의도 모르는 불손한 사람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필립은 되도록 사무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면서, 수줍은 태도로, 자기가 그 동안 절실하게 열망해 왔던 그 계획을 실천하는 일이 자기에게 왜 그처럼 중요한 일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P46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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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기나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필립은 과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삶을 그처럼 힘들게 만들었던 불구도 받아들였다. 불구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불구 때문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내면 성찰의 힘을 기를 수 있었음도 아울러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조롱과 멸시를 엄청나게 받아왔지만 그 조롱과 멸시는 그의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했고, 영원히 그 향기를 잃지 않을 정신의 꽃들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그러고 보면 온 세상이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까닭이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은 불구이고 마음은 비뚤어진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병이 들어 심장이 허약하거나 폐가 허약했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에 병이 들어 의지가 나약하거나 밤낮없이 술만 찾았다. 이 순간 필립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와 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맹목적인 우연의 무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필립은 그리피스의 배신을,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밀드레드를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네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한가지 분별 있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잘못은 참아내는 일뿐이다. 그리스도가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P49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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