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말코비치의 수치> 2008년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J.M. 쿳시의 동명소설 <추락>을 영화화한 <존 말코비치의 수치>는 소설이 지닌 심도 깊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회적 문제를 재해석하기 보다는 배우 출신 감독 답게 줄거리를 좇으며 인물의 표현에 집중한다. 존 말코비치를 비롯한 연기자들의 훌륭한 연기와 더불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이야기 전개로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는 아내와 가정과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자신이 1주일에 90분 동안 여자하고 같이 지냄으로써 충분히 행복해진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의 생리적 욕구는 나비의 그것처럼 아주 가벼워져 결국 날아가버린다. 가장 깊고, 가장 헤아리기 힘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도시 사람들을 잠들게 하는 차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혹은 시골 사람들이 접하는 밤의 침묵 같은 만족감의 저음이라고나 할까.
그는 오후에 무모한 섹스를 한 후, 만족감에 눈이 풀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엠마 보바리를 생각해 본다. 그래, 이게 행복이야! 엠마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며 말한다. 그래, 이게 시인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거야! 만약 가엾은 유령 같은 엠마가 케이프타운에 온다면, 그는 목요일 오후 그녀를 데리고 가서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라. 적당한 만족감, 적당해진 만족감. (P13)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시란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안 돼. 계시의 섬광과 반응의 섬광인 것인지. 번개처럼,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에 빠지는 걸까? 아니면 그런 과정이 지금쯤은 증기기관처럼 불필요하고 이상하고 쓸데없는 것이 돼 있는 걸까? 그는 그런 것으로부터 멀고 구식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유행에 뒤질 수도 있지만 대여섯 번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P24)
“여기 있어. 오늘 밤 나하고 같이 지내.”
그녀는 커피 잔 위로 그를 찬찬히 바라본다.
“왜요?”
“그래야 하기 때문에.”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왜냐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
그의 손은 아직도 그녀의 볼에 닿아 있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항복하지도 않는다.
“제가 이미 그걸 나눠가졌다면 어떻게 되죠?”
그녀의 목소리는 헐떡이는 듯하다. 구애를 받는 것은 언제나 짜릿하다. 짜릿하고, 감미롭고.
“그렇다면 더 광범위하게 나눠 가져야지.”
유혹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부드러운 말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그것들을 믿는다. 그녀는 자기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자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번식을 원하지. 미의 장미꽃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P28-29)
“우선 사실을 분명히 합시다. 그 얘기가 어느 정도 사실입니까?”
“전부 사실입니다. 나는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심각했습니까?”
“심각하다는 게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거나 더 좋게 만듭니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모든 연애는 심각한 겁니다. 심장마비처럼 말입니다.” (P66)
“나는 아이삭스양의 진술서를 읽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아이삭스양이 거짓말을 할 아무런 이유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전에, 실제로 진술서 내용을 읽어보는 게 신중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삶에는 신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P76)
“아닙니다. 나는 카운슬링을 받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성인입니다. 카운슬링을 받을 만큼 유연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카운슬링 영역 밖에 있습니다.”
그는 마타바니를 향해 말한다.
“나는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이 모임을 계속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P76-77)
“마나스, 우리는 어제 참회에 대해서 얘기했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얘기했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학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출두했어. 나는 속세의 위원회 앞에서 속세의 죄를 인정했어. 유죄 인정만으로 충분해야해. 참회는 여기서도 아니고 저기서도 아니야. 참회는 다른 세계, 담론의 다른 세상에 속하는 거야.” (P89)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사람은 뭔가 뒤에 남겨두고 싶어한다. 아니면 적어도 남자는 뒤에 뭔가를 남겨두고 싶어한다고 말해야 맞을까. 여자한테는 그게 더 쉽잖아.”
“왜 그게 여자한테는 더 쉬워요?”
“그 자체의 생명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있으니까 더 쉽지.” (P96)
“지금은 청교도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것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나는 그들의 뜻헤 따르지 않으려 했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려 했다. ‘실제로 말하면, 그들은 나를 거세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딸에게 할 수 없다. 사실, 그걸 다른 사람의 귀를 통해서 들으니, 장황함이 지나치고 감상적으로까지 들린다.
“그래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고, 그들도 그랬다는 거로군요. 그렇게 된 건가요?”
“대충.”
“아버지,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어떡해요. 고집부리는 게 영웅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아직도 생각해 볼 시간은 있나요?”
“아니,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다.”
“항소도 하지 않아요?”
“항소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불평하지 않아. 비도덕적인 혐의에 대한 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이 쏟아져 들어오기를 바랄 수는 없거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런 법이야.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법이다. 그저 멜빵을 풀어놓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거야. 자기 시간을 채우는 거지.”
“그것 참 안 됐군요. 여기 계시고 싶은 만큼 계세요. 이유가 뭣이든지요.” (P101-102)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동물과 공유하는 거예요. 베브같은 사람들이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저는 그 모범을 따르려 해요.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려는 거예요. 저는 개나 돼지와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밑에서 사는 개나 돼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은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P112)
“교회 목사들이 그들에 관해서 오래 토론을 하다가, 결국 그들에게는 바른 영혼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단다. 그들의 영혼은 몸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죽으면 같이 죽는다는 거지.”
루시가 어깨를 으쓱한다.
“저한테도 영혼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설령 그것을 본다 해도 알아 보지 못할 거예요.”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가 영혼이야. 우리는 모두 영혼이야.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었어.” (P118-119)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 차 한 대, 구두 한 켤레, 담배 한 보루. 너무 많은 사람들에 너무 적은 물건들. 모든 사람이 하루 동안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순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론이다. 이론을 따르고, 이론이 주는 위안을 따르고, 인간의 사악함이 아니라 거대한 순환 시스템일 뿐이다. 동정이나 두려움은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과 아무 관련도 없다. 그런 식으로 이 나라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도식적인 방법으로 그걸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다. 차들, 구두들, 그리고 여자들. 그 시스템 안에는 여자들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위한 어떤 자리가 있어야 한다. (P148)
열한 시가 넘었다. 하지만 루시는 나타날 기미가 없다. 그는 무작정 정원 주위를 거닌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단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다. 어제 있었던 일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줬다. 몸이 떨리고 약해지는 것은 그러한 충격에 대한 피상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는 그의 몸 안에 있는 중요한 조직을 능욕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그의 가슴도 그랬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뼛속까지 피곤해지고, 희망도 없고, 욕망도 없고, 미래에 무관심한 노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맛본다. 악취나는 닭털과 썩은 사과 무더기 가운데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로부터 고갈되는 걸 느낀다. 그에게서 완전히 피가 마를 때까지는 몇 주, 아니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피를 흘리고 있다. 그는 그것이 끝날 때쯤이면, 거미줄에 걸려 있는 파리 껍질처럼, 닿기만 해도 부서지고, 나락의 겨보다 더 가벼워, 어디론가 떠내려가버릴 태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루시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루시는 조용히 인내심을 갖고, 어둠 속에서 자기 길을 찾아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녀가 자신을 다시 찾을 때까지, 일상을 꾸려갈 책임이 그에게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갑자기 다가왔다.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짐이다. 농장, 정원, 개집, 루시의 미래, 그의 미래, 이 땅의 미래, 이런 것 모두가 무관심한 문제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 건 모두 개들한테나 줘버려라.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거기에 왔던 그 자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들에게 무엇이든 해가 있었으면 싶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단순한 여파겠지. 침략의 여파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영혼인 나는 다시 나의 옛 자아를 찾겠지. 하지만 그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렸다. 시냇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산들바람에 날리는 한 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그는 종말을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본다. 그것은 그를 절망감 —이 말은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으로 채운다. 생명의 피가 그의 몸을 떠나고 있고 절망감이, 가스처럼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영양도 없는 절망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칼날이 목에 닿는 순간조차, 그것을 들이마시고, 수족의 긴장을 풀고,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P162-163)
왜 그는 그런 일을 택했는가? 베브 쇼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럴 경우, 쓰레기 더미에 자루를 놓고 가버리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개를 위해서? 하지만 개는 죽어 있다. 개들이 명예와 불명예에 대해서 뭘 알 것인가?
그렇다면 그 자신을 위해서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 처리하기 쉽게 하려고 삽으로 개의 시체를 두드리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위해.
개들은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에, 우리가 숫자가 너무 많아서(because we are too many), 병원으로 끌려온다. 바로 그곳이 그가 개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그는 그들의 구원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들이 일단 자신들을 전혀 돌볼 줄 모르는 상태가 되면, 베브 쇼조차 그들로부터 손을 떼면, 그들을 돌볼 준비를 한다. 개를 보는 사람. 페트루스는 언젠가 자신을 이렇게 일컬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신이 개를 보는 사람이 되어 있다. 개 장의사, 개 혼례사, 하리잔.
자신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죽은 개를 위해 봉사하다니 신기하다. 세상에,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에, 자기를 바치는 더 생산적인 다른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아이들에게 몸에 독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타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더 다부지게 먹고 앉아서 바이런 대본을 쓰는 것조차 아쉬운 대로 인류에 대한 봉사로 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
동물 복지, 재활, 심지어 바이런에 관한 일 —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는 동물 시체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한다. 그는 그렇게 어리석고, 미치고, 비뚤어진 인간이 돼가고 있다. (P219-220)
“내가 그걸 후회하느냐고요? 모르겠소. 케이프타운에서 생긴 일 때문에 나는 이곳으로 왔소.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불행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 당시, 그 당시에는 그걸 후회하셨나요?”
“그 당시요? 그 일이 한창 벌어졌을 때 말이오? 물론 아니오. 일이 한창 벌어질 때에는 의심하고 말고 할 틈도 없는 법이오. 당신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거요.” (P222)
“루시, 정말로 이제는 네가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추악한 기억들로 가득찬 집에 계속 살면서 너한테 일어난 일을 계속 생각하든지, 아니면 모든 걸 뒤에 남겨두고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든지 말이다. 내가 보기엔, 그게 너한테 남은 선택이다. 나는 네가 여기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길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냐? 우리 두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냐?” (P234)
그가 운전한다. 놀랍게도, 루시가 집으로 가는 도중, 중간쯤에서 불쑥 얘기를 꺼낸다.
“그것은 너무나 개인적이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했어요.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더 간담이 서늘해지더군요. 나머지는...... 예상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더 기다린다. 하지만 더 이상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설명을 한다.
“그것은 역사가 그들을 통해서 말을 하는 거야. 죄악의 역사가 말이다. 도움이 된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라. 그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을 게다. 그것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그렇다고 그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제가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충격이 가시지를 않아요. 그 행위중에요.” (P235)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깨지지만 않는다면.” (P253)
“당신은 미안하며, 당신에게 서정적인 게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한테 서정적인 게 있었다면, 우리가 오늘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발각이 되면 미안해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아주 미안해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해 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P261)
크로누스와 하모니의 결혼. 부자연스럽다. 모든 좋은 말을 다 벗겨내고 보면, 바로 그것을 처벌하려고 위원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판. 부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 늙은 씨, 피곤해진 씨, 생기없는 씨를 뿌린 것에 대해. 자연에 반한 것(contra naturam)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내면, 종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고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었다. 문학의 반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종족을 위하여,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 치는 젊은 여자들.
그는 한 숨을 쉰다. 감각적인 음악에 묻혀, 나 몰라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사람들. 이곳은 나이든 남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회한. 회한의 음조를 탄 외출. (P286)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