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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

영화 <펠리시아의 여행> 1999년

by 노용헌

펠리시아의 여행(Felicia's Journey)은 영국에서 제작된 아톰 에고이안 감독의 1999년 드라마, 스릴러 영화이다. 밥 홉킨스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브루스 데이비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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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사람이 들어찬다. 말없이 신문을 읽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 시선을 돌린다. 모든 것이 — 사람과 집과 차, 철탑과 안테나 — 전부 자리잡을 만큼 넉넉한 공간은 없다는 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역이 아닌 곳에서 기차가 멈출 듯하자 사람들 얼굴에 초조함이 떠오른다.

조니도 일하러 갈 것이다. 펠리시아는 그를 그려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두르는, 하지만 태평하고 걱정 없는 그를.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 그녀가 아직 광장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버스에 오르던 그날 오후의 옆모습과 그의 느긋한 표정을 펠리시아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저 멀리서, 속삭이는 메아리처럼, 낮게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P15-16)


차가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손님들은 다시 호텔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조니 라이서트가 인도 위로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다 신부 들러리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았다. 살아 있는 한, 이 순간은 결코 힘을 잃지 않으리라. 그후 펠리시아는 거듭 되뇌었다. 회전문으로 들어가던 아버지의 등, 허옇게 센 머리 그리고 리본으로 장식한 웨딩카에 탄 오빠와 친구를 다시 한번 보려고 몸을 돌린 순간 마주친 지나가던 남자의 시선. 그가 미소를 지어 그녀 역시 미소로 답하던 순간. 나중에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알았다고, 그것이 사랑의 시작임을.

그 사랑에 이끌려 오게 된 이 도시의 외곽에 이르렀을 때도, 그 순간은 여전히 생생하다. 검은 피부의 점원들이 작은 상점의 문을 닫고 있다. 신문가판대가 입구에서 치워지고 진열된 채소가 안으로 옮겨진다. 이 외딴 상점들 사이사이에 있는 집들은 칙칙하다. 콘크리트는 대부분 빛이 바랬고 부실한 창문들은 페인트칠 사이로 녹슨 철제 부분이 드러나 있다. 쓰레기가 널린 풍경이 이어진다. 도로에서 바람에 실려왔거나 쓰레기통에서 쏟아진 것들이 상점 앞마다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고 쌓여간다.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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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아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의 장면들이 세세하게 떠오르며 잠을 방해한다 — 멀미, 화장실에서 그녀의 칫솔을 집어든 여자, 보안담당자의 질문, 기차, 그리고 또다른 기차, 공장이 어디 있는지 묻고 다닌 일, 뾰족한 얼굴의 숙소 주인이 텅 빈 식당으로 셰퍼드 파이와 과일 통조림을, 뒤이어 차를 내온 일. 그때, 전날의 피로와 좌절을 덜어주는 조니가 나타난다. 그의 잿빛이 감도는 초록색 눈, 검은 머리카락, 단정한 턱 끝, 도드라진 광대뼈. 그녀는 공장 사람들 무리 속, 톰슨 캐스팅스에서 나오는 일들 중 제일 앞에 있는 그를 본다. 마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서두르는, 빠르고 절도 있는 움직임. “그날 난 네가 신부인 줄 알았어.” 그가 초크스 앞 거리에 서 있던 펠리시아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한 건 결혼식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그녀는 그날 그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어떤 꿈이나 상상보다도 좋다. 왜냐하면 그건 진짜니까. “어머, 아뇨,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자신은 영영 신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초크스 쇼윈도에서 한 여자가 마네킹 옷을 갈아입히며 여름 분위기를 지우고 있었다. “조니 라이서트.” 그녀가 신부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기억나긴 해?” (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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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는 할머니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하지만 잘 안 된다. 그녀는 — 그 아름답고 뭔가 달랐던 월요일 저녁 — 실수로 식탁에 에이든 몫까지 차린 일이 떠오른다. 이제 에이든은 맥그래튼 스트리트에, 처갓집인 자전거와 유모차 상점 근처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여섯시가 되자 채석장에서 돌아온 다른 두 오빠, 생김새만큼이나 과묵한 성격도 꼭 닮은 그들이 곧장 식탁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래, 할머니는 계속 버텨내고 계신다.” 아버지가 침실에 들어갔다가 할머니의 기(氣)를 안고 나오며 소식을 전한다. 노인의 존재는 그 안에 유령 하나를 다시 불러냈고, 노인의 역사는 그의 감성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다. 칠십오 년 전, 노인의 남편이 된 지 한 달 된 이가 두 동지와 함께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끈질긴 고집으로 가족 내에서 하나의 진실로 숭상되어왔다. 그 비극으로 노인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와 함께 빈곤한 처지에 놓였고, 남은 인생을 사무실과 가정집 바닥을 닦아 번 돈으로 먹고 살아야했다. 그러나 그 고생도 오랜 대의에 대한 믿음이 있어 고귀하게 여겨졌다. 노인은 뿌린 피를 명예롭게 생각하며, 태어난 딸과 사위, 그리고 딸 부부에게서 난 외아들의 아내까지 앞세우고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적 사고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은 지금, 펠리시아의 아버지가 몸소 그 뿌린 피를 명예롭게 기렸다. 그는 저녁때 자주 그 혁명 시절 스크랩북을 들고 앉아 있곤 했다. 세 권짜리 벽지 무늬 카탈로그로, 철물점을 하는 멀틸리가 그 벽지들이 유행 지난 구식이 되자 아버지에게 준 것이었다. 펠리시아가 기억하는 한 그녀는 평생 달리아와 장미, 물방울 무늬와 줄무늬, 매끈하거나 올록볼록한 면 위에 깔끔하게 오려붙인 신문 기사와 사진들, 서류 사본을 보고 또 봐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뒷받침하는 주장 한가운데에 — 수집품 전체의 닻이 되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그녀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한 — 이 지역 애국자 세 사람의 합동 부고가 있었다. 증조할머니가 몇 안되는 소지품과 함께 간직하고 있다가 스크랩북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거기에 보관해둔 것이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패트릭 피어스의 1916년 4월 24일자 임시정부 선언문을 손으로 베껴쓴 필사본으로, 서명 일곱 개가 모두 법원서기 같은 필체로 쓰여 있었다. 중앙우체국 전투와 보런드 제분소 사건들, 로저 케이스먼트가 바나 해변에서 독일 유보트에서 내린 일, 리버티 홀 포격을 다룬 신문 기사도 있었다. 베거스 부시 병영과 멘디시티 인스티튜트 공격, 영국의 셸본 호텔 점령과 페트릭 피어스와 톰 클라크 처형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이곳 애국자들의 미사 카드와 애도하는 이들이 보내온 편지, 관들을 찍은 사진도 한 장 있었다. 예전 형법, 아일랜드 군대에 관한 글도 붙어 있었다. 코네마라에 있는 페트릭 피어스의 오두막을 그린 엽서 한 장, 깃대에서 펄럭이는 아일랜드 삼색기가 담긴 또다른 엽서 한 장도. 그리고 <병사의 노래> 가사 전문이 있었다.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이 벽지 스크랩북이 민족을 기리는 기념물이자 용감한 한 여인이 받아 마땅한, 그녀의 가치 있는 희생의 기록이라고 믿었다. 그는 붉은 잉크로 작고 단정한 메모를 남겨 이 사건들의 연속성이 보이도록 여기저기 붙였다. 얼굴을 내민 꽃들 가운데 에이먼 데벌레라의 신성한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꿈꿔온 아일랜드는 물질적 부란 오직 올바른 삶의 기초로서만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소박한 안락함에 만족하는 사람들, 여유 시간을 영적인 것을 위해 쓰는 사람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시골은 아늑한 농가들로 밝게 빛나고, 들판은 산업의 소리로 흥겨운 땅이 될 것이다. 튼튼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젊은이들이 체력을 겨루고, 어여쁜 처자들이 웃음 짓는 땅, 난롯가에서는 노인들이 지혜를 나누는 땅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라고 하느님이 바라신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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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소녀가 이 모든 기억을 일깨운다. 새로운 친구가 항상 그러듯 그녀가 그런 것도 당연한 일이다. 기억의 뒤안길은 늘 그곳에, 늘 그늘진 채로, 때론 완전히 어둠에 파묻혀 있고, 그러다 무언가가 그곳에 불을 밝힌다. 힐디치 씨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기억의 뒤안길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것은 크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 법이고, 또 어떤 것은 심지어 혼잣말로도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냥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잊고 지내는 것이 최선이다. 밤이면 그는 자주 잠에서 깨어 누운 채로 그 반짝임이 — 엘시와 베스와 또다른 이들이 담긴, 떠도는 그 작은 스냅사진들이 — 돌아오기를 바란다. 자기를 보라고 손을 들어올린 엘시, 노란 스웨터를 입은 베스, 프림리 리틀 셰프의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샤론, 마켓 드레이턴의 전자제품 가게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게이, 차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재키.

그가 기다리는 그 특정한 버스는 사십 분에 한 대씩 오지만, 힐디치 씨는 기다리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기억을 떠올리며 생긴 힘이 이미 감각 속을 부드럽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오데옹 극장의 매니저가 로비에서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베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레스터에 위치한 극장이었고, <돌아온 핑크 팬더>를 보았다. 서덤의 레스트폴 트레이에서는 멀찌감치 앉은 젊은 남자가 엘시를 향해 씩 웃으며 작업을 걸었고, 그녀는 테이블 맞은편을 가리키며 함께 온 사람이 있음을 알렸다.

재키가 종교를 믿던 시기에 한번은 교회에 가고 싶어해, 두 사람은 콜빌에 있는 침례교회에 갔다. M6 고속도로에 있는 한 휴게소에서는 게이와 안면이 있는 소년을 만났다. 잘해야 150센티미터 정도인 그 소년은 한쪽 귀에 장식용 면도칼을 달고 빡빡 민 머리에 술냄새를 풍기는 땅딸막한 문제아였다. 러프버러 근처 휴게소에서 베스는 식사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에 잠겨서였고, 그럴 권리는 어느 여자에게나 있었다. <Five Foot Two, Eyes of Blue>. 베스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 노래가 떠오르는데, 경쾌하고 짧은 리듬이 어쩐지 그녀에 대한 기억과 잘 어우러진다.

버스가 또 한 대 들어온다. 아일랜드 소녀가 타고 있다. (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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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그녀는 또다시 그 침실에서 깨어날 것이다. 같은 절망 속에서 또다시 찾아오는 새벽, 여섯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눈을 뜨는 고단함, 또다른 하루의 시작, 화요일이면 다시 그 비좁은 계단을 닦아야 하고, 주말에는 노인의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한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오빠들은 복수를 벼를 것이다. 코니 조는 남부끄러운 출산을 기다리는 집안에 시집온 일을 후회할 것이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냉정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다. 맙소사, 이 바보야, 카멀은 그렇게 말할 것이고, 로즈는 너 천치냐, 하고 말할 것이다.

둘이 함께 있는 것만이, 둘의 사랑만이 구원을 가져오리라.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그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1월에 눈이 내렸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2월 첫 주가 되어 세찬 바람이 불었을 때, 그의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전 조니 친구예요. 라이서트 부인.” 지금, 쇼핑백을 들고 선 채로 어찌할 바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초조함이, 자신의 더듬거리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면 회상이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그 거리감이 흘러간 시간을 강렬하게 만들어서? 빤히 쳐다보던 그의 어머니의 시선,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그 차가운 시선. 처음에 그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닫을 기세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좁은 통로가, 부엌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뭐지?”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눈 아래 허연 흉터 줄기가 밝은 빛 속에 더 도드라졌다. 야생 자두처럼 씁쓸하지, 사람들은 여인에 대해 그렇게 말하곤 했다. (P73-74)


온종일 감돌던 흥분의 전율이 그 아일랜드 소녀와 다시 말을 나누고 온 지금 극도로 강렬해진다. 집에서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던 여자는, 실제로 공장 부지에서 그에게 접근한 여자는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 엘시 커빙턴은 유톡시터에서, 베시는 울버햄프턴에서, 게이는 마켓 드레이턴에서 불쑥 나타났다. 샤론은 윅스턴에서, 재키는 월솔에서. 그들 모두 아일랜드 소녀처럼 멀리서 왔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아무 곳으로나 그냥 가고 있었다. 흔히 말하듯 집 앞마당은 더럽히지 않는 것이, 동네에서는 쇼핑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고 최선을 다해 그 원칙을 지키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나무를 흔들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떨어진 격이다. 인연이군, 싶어진다. 아마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가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힐디치 씨는 좋은 예감이 든다. 이번에는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이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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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그 녀석은 만나지 않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지.”

“무슨 말씀이세요?”

“라이서트에 관해 들리는 이야기가 있어.” 아버지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펠라시아 쪽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심각한 얘기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고 싶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진짜란 말은 아니다. 그저 들리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야.”

“무슨 이야기요?”

“그 녀석이 영국군에 입대했다는 이야기.”

“조니는 공장 창고에서 일해요. 잔디깎이 부품 창고요.”

그는 알겠다는 듯 생각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살짝 찌푸렸는데, 사실 관계를 정확히 하려 애쓸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어했다.

“그 녀석이 군 입대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창고에서 일한다니까요.”

아버지는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말을 할 때도 침착한 어조를 유지했다. 그는 근거 없는 소문은 없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 녀석보다 나은 청년들이 주위에 있잖니, 얘야. 아일랜드 청년들은 아일랜드에 있어야 한다.”

“조니는 여기서 일자리를 못 찾아서 영국으로 간 거예요.”

“영국군은 북쪽으로 파견될 수도 있어. 그 녀석이 우리 민족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조니는 군대에 있지 않아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신 거예요.”

“시히스 술집에 같이 갈 괜찮은 아일랜드 청년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네게 할 말은 그것뿐이다.” (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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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집에 사는 한 점령군 놈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 우리 집안은 뭐가 중요한지 알고, 늘 그래왔어. 네 증조할아버지와 애국자 동지들은 이 작은 마을을 떠나 전장의 한 가운데로 갔고, 용감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팔 세기 동안, 한 시간도 빼놓지 않고 꼬박, 그 긴긴 세월을 아일랜드 사람들은 언어와 종교 인간 자유의 억압을 받으며 살아야 했잖니. 칠십오 년 전 부활절 기간에 더블린 거리에서 하나의 비전이 생겨났다. 비전은 실현되지 못했고, 그 잠재력도 아직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네 주위를 한번 둘러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니. 게다가 영국 불한당들의 군홧발이 아직도 우리 여섯 개 카운티에 남아 있단 말이다. 우리가 사는 곳처럼 소박한 도시의 거리들에 여전히 죽음과 고문이라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어. 내 자식은 어느 누구도 절대로 저쪽 편에 서서는 안 된다.” (P92-93)


이미 몇 시간 전 이 도시의 노숙자들은 제각기 밤을 보낼 자리를 찾아갔다 — 건물 입구나 실수로 열어둔 지하도, 버려진 자동차, 허물어버린 집의 버려진 정원 등으로. 마치 구더기가 벽돌의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가듯 거리의 사람들은 묘지와 공사장, 뒷골목과 안마당 등 하룻밤의 거처로 기어들어가 쓰레기통을 가까이 당겨 담을 쌓고 근처에 있는 무엇으로든 지붕을 만든다. 어떤 이들은 비계를 타고 올라가 아직 타일을 깔지 않은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방수포 아래 한 모퉁이를 차지한다. 또다른 이들은 한때 식기세척기나 냉장고가 들어있었을 종이 상자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보이지 않게 자리잡은 거리의 사람들은 술에 취해, 혹은 절망감에 휩싸여 잠이 들고, 꿈속에서의 한때 그들의 것이었던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구걸용 문구를 곁에 둔 채, 잠에서 깬 순간의 고통을 덜어줄 넉넉히 남은 술병을 옆에 낀 채,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손에 쥔 채 몸을 누인다. ‘집도 없고 내내 고픕니다’, 그들이 판지에 쓴 호소문인데,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다른 사람의 것을 베껴 휘갈겨썼을 뿐 중요한 것은 돈이다. 그렇게 찾아낸 장소에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이,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몸을 누인다. 가족에게서 거부당한 이들은 더 이상 임시변통의 베개 위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또는 때 이른 탐욕 때문에 몰락한 이들은 말없이 잠을 청한다. 한때 성직자였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불명예를 곱씹지 않으며, 대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 꿈을 꾼다. 거절당한 남편, 버림받은 아내, 우연의 희생자들은 비통함을 넘어섰고, 지금은 자신의 에너지를 온통 체온 유지에 쏟아붓는다. 정신이 불안한 이들은 한밤중에 어떤 목소리에서 위안을 받곤 하는데, 종종 그 목소리는 일어나 걸으라 부추기고,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순순히 그 말을 따른다. 실패한 남자들은 홀로 누워 낮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현실을 꿈꾼다. 커다란 호텔과 공손한 웨이터, 한때 소유했던 권력, 수족 같은 비서들을, 한때 아름다웠던 여자들은 다시 아름다워진다.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오만함이 없으며, 잠자는 그들의 얼굴에는 고집스러운 자부심도, 과거에 타락했다는 분명한 흔적도 없다. 절망의 단계는 이미 지나왔으며, 여자들 중에는 몰락의 과정에서 몸을 팔았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트고 갈라진 얼굴, 때에 쩌든 손톱, 이젠 그 일조차 할 수 없다. 남자 서넛이 이 거리에서 카드 세 장으로 하는 도박 게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헝클어진 수염, 엉겨붙은 머리, 때가 앉아 시커메진 피부, 이젠 우연히 지나가다 그들에게 돈을 거는 사람도 있을 리 없다. 꿈속에서 그들은 때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받고, 목소리와 헛것이 전부 사라지고, 그래서 내일이면 망각에 저항하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환상을 본다. 노숙자 생활을 자처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예전의 안정된 생활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거리가 자신이 있을 곳이라 느낀다. (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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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는 것이 놀랍다. 앞마당에서도, 십 분 후 주방에 들어갔을 때도, 그의 사무실과 붙어 있는 다른 사무실들의 창문을 통해서도, 아무도 그를 달리 보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힐리치 씨는 이들 중 누구도, 아직 여덟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 새벽 한 시 이십분에 그가 자기 집 현관에 서서 그런 초대를 했고, 그 결과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일랜드 소녀가 그와 한집에 있게 되었음을 모른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어른이 된 후 평생 규칙에 따라 살아왔다. 깨어있는 매 순간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해왔다. 그런데 한순간에 그 규칙을 모두 저버린 것이다. 단 한 번도 베스나 엘시 커빙턴, 혹은 다른 여자들을 그의 지붕 아래에 들이겠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다. 전에는 한 번도 아내에 대해 언급하거나 군대 전통에 따른, 검을 드는 결혼식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만나서 몇 시간 함께 보내며 눈에 띄어도 안전한 동네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 그 이상을 필요로 한 적이 없었다.

어젯밤 리틀 셰프에서 그릇을 치우던 여자가 분명 다른 여자에게 뭐라고 중얼거렸고, 두 여자 모두 그가 아일랜드 여자에게 막 들어서던 청년을 보라고 한 후 그녀가 고개를 젓는 모습을 건너다보았다. 여자들은 그녀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아직 겉으로는 거의 표가 나지 않지만 여자들은 남자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한다는 것을, 그는 구내식당에서 이따금 전해 듣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여자의 통찰력을 화제로 삼으면서. (P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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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정이 끝날 때면 늘 찾아오던 감정을 다시 느낀다. 텅 빈 것 같은, 그의 한 부분이 빠져나가버린 듯한 느낌. 그 아일랜드 여자도 이미 기억의 뒤안길에 있는 다른 여자들과 합류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 둥근 얼굴이, 그 휘둥그래진 눈이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 이미지는 베스나 엘시 커빙턴의 이미지만큼이나 아주 선명하고 생생하다. 그는 이별을 겪고 나면 언제나 가능한 한 빠르게 소풍을 계획하는데,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게이가 떠난 다음날도 그는 이 대저택에 왔다. (P238)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어렴풋이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인식하고는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기억에 착란이 일어나는 거라고 여긴다 — 그들이 떠난 순간이 매번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무의식이 그와 관련된 구체적 상황을 지워버렸다고. 처음에, 베스가 떠났을 때, 그는 이 기억의 착란이 걱정되어 그 순간으로,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보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P241)


그는 그녀에게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 모두 슬픈 사연 한 가지씩은 갖고 있다. (P274)


나중에,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사생활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절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이 생기는 것도. 그는 매번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는 매번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P300)


여자 아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 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P306-307)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가을날 결혼식 신부 들러리도 아니고 자동차 뒷자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썼던 아이도 아니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또다른 아침, 눅눅한 밤을 보내고 맞는 화창한 아침에 길을 걸으며, 그녀는 자신을 감싸는 평온함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이 깃든 그 평온함을 기뻐한다. 쇠꼬챙이를 떨어뜨린 것은 두 손이 긴장했기 때문이다. 불을 켠 것은 현관문을 더듬었지만 걸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아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그 일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를 기도했다. (P312)


유일한 죄책감은 그녀의 아기를 빼앗아가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앞을 내다볼 뿐 지난 일을 곱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한때 애인이었던 사람의 배신도 곱씹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들을 살해한 남자를 떠나왔다. 그녀는 떠나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되짚어 내린 결론이다.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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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그녀의 생각이 옮겨진다. 부엌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에게로, 그후 다정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가져다준 조개껍데기에게로, 녹색 점박이 알들, 존 카운트의 노래, 그 무렵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던 아버지의 쓸쓸한 눈. 떠나버린 남편이 안긴 치욕에 대한 답이었던 형벌 같은 상처, 아들을 향한 암(癌)처럼 조용한 사랑, 살인을 한 남자의 저 깊은 곳에도 다른 영혼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이, 한때는 분명 순수했을 영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색이, 한때는 생경했던 그런 생각이 펠리시아의 하루를 채운다.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그럼에도 생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혼자서, 더 이상은 아이도 소녀도 아닌 것을 감사한 일이라 굳게 믿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두발을 싸매고서, 비가 와 옷에 스며들면 젖은 채로, 배수구 웅덩이에 얼음이 얼면 그녀의 몸도 얼어붙은 채로, 낮이면 구름이 종종걸음치며 흩어지거나, 꼼짝도 하지 않거나, 잿빛을 드리워 해를 가려버리거나, 아니면 단단히 뭉쳐 시커메진 모습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험악한 괴물처럼. 구름이 다시, 바람을 타고 온 연기 꼬리들로, 오리털처럼 부드러운 커다랗고 하얀 솜뭉치로, 아침의 진홍빛 기다란 줄무늬들로 그곳에 나타난다. 때때로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온통 푸를 때도 있는데, 뿌옇게 안개가 낄 때든 맑고 환할 때든 가느란 겨울나무의 배경이 되어주고, 다시 한번 여름 녹음의 배경이 되어준다. 밤이면 도시에 잔광이 어린다.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손바닥에 있던 잎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다시 실려간다. 그녀를 지켜보던 갈매기가 여전히 허기진 채 있지도 않은 빵부스러기를 찾으면서 난간 위를 거드름 피우며 걷는다. 그럴 필요가 없는 어떤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멍청한 해나를 위해 구급차를 불렀다. 해나가 의식을 잃고 거리에 쓰러졌던 것이다. 여자들이 밤에 스프를 가지고 온다. 선의로, 결코 잊지 않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자 치과의사는 아픈 걸 참지 말라고 했다. 그 치과의사는 자신의 존재를 부랑자들의 썩은 이에, 부랑자들의 악취와 불결함에 바쳤다. 그녀의 선량함은 한 남자가 내뱉은 모든 말과 그가 한 모든 행동을 왜곡시킨 사악함보다도 더 큰 미스터리다. 새로이 떠오른 생각인데,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말하는 게 쉽지 않다.

얼빠진 멍청이, 아무데나 떠도는 바보, 피로감이 섞인 동정 한 조각이 거리의 사람을 향해 던져지고, 눈길은 서둘러 다른 데로 옮겨간다. 다른 도시도 있을 테고, 다른 도시와 거리와 도로도 있을 것이다. 태퍼와 조지, 리나, 케브, 다보, 멍청한 해나 들도 있을 것이다. 자선단체와 보호소가, 자비와 경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어디에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르는 운명이 존재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같은 사람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돈다. 성자들과 빈민구호회 수녀님들, 엘시 커빙턴과 베스, 샤론, 게이, 재키, 보비, 단 하루도 나이를 더 먹지 않은 그녀의 어머니까지. 그들은 정말 향기로운 꽃들 사이에서 모두 함께, 안전하게 축복받고 있을까? 만일 그 일이 일어났더라면 그녀도 그들과 함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회의가 들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만을 선택하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P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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