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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제방>

영화 <더 씨 월The Sea Wall> 2008년

by 노용헌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1957년에 르네 클레망 감독의 <해벽>, <This Angry Age>으로 영화화되었다. 앤소니 퍼킨스가 조제프를 연기했다. 영화 <더 씨 월>은 2008년 이자벨 위페르 주연으로 다시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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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칸나 위로 거의 십 분에 한 번씩 고개를 들고서 쉬잔과 조제프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둘이 함께 있으면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냥 소리만 질렀다. 방조 제방이 무너진 뒤로 어머니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하면 거의 매번 소리부터 질렀다. 전에는 어머니가 화를 내도 자식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방이 무너진 이후 어머니는 병이 났고, 의사 말로는 자칫 죽을 뻔했다. 이미 세 번의 발작이 일어났고, 의사 말로는 그 세 번 모두 치명적일수 있었다. 어머니가 잠깐 소리 지르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오래는 안 된다고, 화를 내다가 발작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의사는 제방이 무너진 충격을 발작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아마도 틀린 생각이다. 어머니가 품고 있는 그토록 깊은 원한은 아주 서서히,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쌓여 온 것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천 가지 이유가 있다. 무너진 방조 제방, 세상의 불의, 냇물에서 헤엄치는 두 자식의 모습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P20-21)


조제프와 쉬잔을 데리고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시트 로엥 B.12를 몰고서 어머니가 이곳 평야에 온 지 육 년째였다.

첫해에 어머니는 불하지의 절반에 작물을 심었다. 첫 수확을 거두면 방갈로를 짓느라 들인 돈을 거의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7월의 바닷물이 평야로 밀려왔고, 수확을 앞둔 작물들이 그 물에 잠겨 버렸다. 어머니는 바닷물이 그해만 특별히 세게 들이닥친 거라 믿었고, 그래서 평야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에 다시 시작했다. 바닷물도 다시 밀려왔다. 어머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불하받은 땅은 경작 불가능한 땅이었다. 매해 바닷물에 침수되는 땅이었다. 물론 바닷물이 매해 같은 높이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직접 덮치든 땅에 스며들어 죽이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물은 작물을 전부 말려 죽이기에 충분했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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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 불가능한 토지는 토지국 관리들이 경작 가능한 진짜 불하지에서 막대한 수입을 얻게 해 주었다. 신청자에게 토지를 골라 배정할 권한을 가진 그들은 경작 불가능한 넓은 땅을 비축해 두었다가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이익을 취했다. 주기적으로 불하되었다가 그에 못지않게 주기적으로 환수되는 그 땅은 말하자면 비상시를 위해 비축해 둔 완충 기금이었다.

캄 평야의 불하지 약 열다섯 곳에 토지국 관리들이 정착시키고, 망하게 만들고, 쫓아내고, 다시 정착시키고, 다시 망하게 만들고, 다시 쫓아낸 집이 100여 가구에 이를 것이다. 평야에 남은 사람들은 페르노나 아편을 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토지국 관리들은 변칙적인, 그들 말로는 ‘불법적’인 수입을 묵인하는 대가로 다시 일정 몫을 떼어 갔다. (P25)


방갈로를 내세워 유예 기간을 얻어 낸 데 고무된 어머니는 캄 토지국의 관리들에게 새 계획을 알렸다. 불하지에 인접한 땅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가는 평야의 농부들과 함께 바닷물을 막는 방조 제방을 쌓겠다는 계획이었다. 어머니는 모두에게 유익한 제방이 될 거라고, 태평양 쪽으로, 그리고 냇물 쪽도 7월의 바닷물이 닿는 경계까지 제방을 쌓겠다고 했다. 토지국 관리들은 놀라며 조금 유토피아적인 계획이라고 지적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계획안을 작성해서 보내 보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평야의 간척 사업은 총독부에서 관장하는 일이라고, 그러나 자기들이 아는 한 불하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제방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고, 단지 관할 토지국에 미리 알리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며칠 밤을 새워 계획안을 작성해 보내 놓고 승인을 기다렸다. (P27)


갑작스러운 광적인 희망으로 마침내 오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이 온 힘을 쏟아부어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제방이 태평양 파도의 단순하고 가차 없는 공격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마치 카드로 쌓은 성처럼 그대로 무너져 버린 광경을 어느 누가 비탄과 분노 없이 떠올릴 수 있겠는가? (P28)


조 씨의 눈길이 쉬잔의 머리카락에 점점 가까워졌고, 아래로 향한 두 눈에도, 그리고 이따금 그 눈 아래, 그녀의 입에도 가까워졌다.

“우리도 그런 차가 있으면 저녁마다 람에 올 텐데. 삶이 달라지겠죠. 람은 물론이고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까.”

“돈이 행복을 만들진 않는답니다. 생각하시는 것과 달라요.”

조 씨가 무언가를 아련하게 떠올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늘 부르짖었다. “행복을 만드는 건 오로지 돈뿐이야.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인간들뿐이지.” 그리고 덧붙였다. “돈이 많으면 계속 현명하도록 애써야해.” 조제프는 더 단호했다. 돈이 행복을 만든다고, 군말이 필요 없다고 했다. 조 씨의 리무진만 있으면 조제프는 행복할 수 있었다.

“글쎄요.” 쉬잔이 말했다. “돈이 있으면 우린 어떻게든 그 돈이 행복을 만들 게 했을 것 같아요.”

“당신은 아직 어려서 그래요.” 조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어린 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부자인 거죠.” 쉬잔이 말했다.

조 씨가 쉬잔을 힘껏 껴안았다. 폭스트롯 곡이 끝나자 아쉬워했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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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미 방갈로 옆에 넓은 모판을 준비해 두었다. 제방을 같이 쌓은 농부들이 제방으로 둘러싸인 장방형의 넓은 땅에 모를 심었다.

두 달이 지났다. 어머니는 자주 내려가서 벼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벼는 계속 자랐다. 7월의 바닷물이 들이닥칠 때까지.

7월에 해마다 그렇듯이 바닷물이 들이닥쳤다. 제방은 버텨내지 못했다. 논에 사는 난쟁이게들이 이미 갉아 놓았다. 제방은 하루 만에 무너졌다.

냇가 초입에 옮겨 와 있던 세 가족은 보트와 살림살이를 끌고 해안의 다른 곳으로 떠났다. 불하지 인근 마을의 농부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 아무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조금 남아 있던 제방가지 무너졌다.

“우리 제방 사건은 그야말로 배꼽 빠지는 얘기죠.” 조제프가 말했다. (P58)


“그러니까…….” 쉬잔이 말했다. “우리가 산 건 땅이 아니었어요.”

“물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바다였어. 태평양.” 쉬잔이 말했다.

“똥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제정신이면 안 샀을 텐데…….” 쉬잔이 말했다

어머니가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정색을 했다.

“입 다물어. 계속 떠들면 따귀를 갈겨 버릴 테니까.” 어머니가 쉬잔에게 말했다.

조 씨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란 사람은 그 혼자였다.

“정말 똥 덩어리였지.” 조제프가 말했다.

“뭐, 똥이든 물이든 마음대로 생각해요. 우린 거기서 멍청이들같이 똥이 다 빠지길 기다리는 중이니까.”

“언젠간 없어질 거야.” 쉬잔이 말했다.

“500년 후쯤에.” 조제프가 말했다. “뭐, 우리야 가진 게 시간뿐이지만…….” (P59-60)


조 씨가 처음으로 값비싼 물건을 선물한 것은 만난 지 한 달 만이었다. 축음기였다. 얼핏 보면 담배 한 대 건네듯 그냥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그 선물을 통해 쉬잔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는 쉬잔이 절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돈, 그 돈이 가진 능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쉬잔 가족이 처한 감옥과 다름없는 현실에 틈을 내 주기로, 축음기를 통해 그 현실 밖으로 소리의 틈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날 조 씨는 쉬잔에게서 얻고 싶었던 사랑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다. 그러한 냉정한 깨달음이 창백해진 그의 얼굴에 번개처럼 스쳐 간 것은 나중에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기로 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들이 알고 지낸 내내 그때가 유일했다. (P68-69)


어머니는 앞에 앉은 남자가 그냥 당하지 않기 위해 맞서야 할 상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라모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이들. 어쨌거나 바로 그녀가 저 아름다운 아이들을 만들어 냈다. 아이들은 함께 춤추며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가 보기에 두 아이는 닮았다. 둘은 어깨가 똑같다. 어머니의 어깨 그대로였다. 얼굴색도, 약간 붉은 머리카락도, 가슴도 같고 행복한 오만함이 담긴 눈빛도 같았다. (P100)


어머니는 마음이 급했다. 쉬잔이 결혼만 하면 조 씨에게서 돈을 구해 방조 제방을 다시 쌓고(이번에는 전보다 두 배 크고 시멘트 들보로 받쳐서), 방갈로 공사를 마무리하고, 지붕의 이엉을 새로 이고, 자동차를 바꾸고, 조제프의 이를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계획이 지체되는 책임을 모두 쉬잔에게 돌렸다. 쉬잔에게 꼭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씨와의 결혼은 그들이 평야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방조 제방의 실패와 다름없는 또 한 번의 실패였다. 어머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조제프가 결론을 맺었다 .“절대 안 될 거예요. 안 되는 편이 쉬잔한테도 낫고요.” 쉬잔 역시 이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다. 조 씨에게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조 씨는 그들이 결혼했을 때 쉬잔이 갖게 될 돈과 자동차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했다. 이제 그런 대화는 소용없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조 씨가 조르는 짧은 여행과 그의 다이아몬드도 소용없었다.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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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이아몬드는 지금 끼고 있는 것보다 세 배 더 굵다. 그러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다이아몬드는 다른 세상에 속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광채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가격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교환 가능성에서 나왔다. 다이아몬드는 과거와 미래를 매개하는 물건이었다. 미래를 열고 과거를 봉인하는 열쇠였다. 마침내 다이아몬드의 순수한 물을 뚫고 미래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그 안에 들어서도 빛에 눈이 멀고 정신이 멍했다. 은행에 남은 어머니의 돈은 1만 5000프랑이 전부였다. 불하지를 사기 전에 어머니는 한 시간에 15프랑을 받으며 개인 교습을 했고, 십 년 동안 매일 하룻저녁에 40프랑을 받으면서 에덴 시네마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매일 40프랑씩을 모아서 십 년 후 마침내 땅을 불하받았다. 쉬잔은 그 모든 액수를 다 알고 있었다. (P129)


“그 사람이 싫어. 진저리 나게 싫어. 반지는 영영 돌려주지 않을 거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조제프가 말했다. “좀 드시라고요.”

“그렇지 않니? 누구라도 우리처럼 안 돌려줄 거야!”

어머니는 발을 구르며 악을 쓰다가 조용해졌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커피 마셔요. 커피라도 마시라고요.” 조제프가 말했다.

“생각 없다. 난 늙었고, 피곤하고, 지쳤구나. 진절머리 나는 자식들 때문에…….” (P138)


반지는 그들에게 첫 성공이었다. 기회가 아니라 성공. 몇 년 전부터 기다려왔는데 그저 기다리기만 해서 마침내 반지를 얻었다.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반지가 왔다. 반지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넘어왔다. 그들의 세상으로 왔다. 이제 반지를 손에 넣었다. 조 씨가 이 반지를 내어놓은 것은 쉬잔에게 다가오기 위해서, 다리밑 그늘에서라도 계속 그녀에게 다가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모든 공격을 버티고 얻어 낸 그 승리를 아무하고도 나누지 못하다니. 심지어 조제프하고도.

“그깟 반지가 뭐라고. 싫다고 하는 게 죄 짓는 거지.” (P143)


“우리가 원하면 부자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원하면 우리도 남들만큼 부자라고요, 젠장,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돼요. 그러면 정말로 부자가 돼요.”

다같이 웃었다. 조제프는 주먹으로 식탁을 여러 번 세게 내리쳤다.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조제프는 영화 속 인물이 되었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렇겠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정말로 원하면 부자가 되는 거야.”

“젠장!” 조제프가 말했다. “부자가 되면 누구든 깔아뭉개 버려요. 보일 때마다 다 깔아뭉개 버리자고요.”

조제프는 가끔 이런 식으로 이상해졌다. 그러면 물론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영화처럼 멋졌다.

“그래, 그러자! 깔아뭉개자꾸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생각을 말해 주고, 깔아뭉개자!” (P168)

넓고 아름다운 강 양편으로 10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대도시였다.

식민지 도시들이 늘 그렇듯이 그 안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백인들의 도시이고, 백인이 아닌 이들의 도시가 하나 더 있었다. 백인들의 도시 안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번화한 도심을 둘러싸고 별장과 주택이 지어진 지역은 제일 널찍하고 쾌적했지만 무언가 세속적인 느낌이 났다. 그 안에 들어 앉은 중심지는 거대한 도시가 사방에서 가하는 힘에 밀려 해다마 더 위로 빌딩들을 밀어 올렸다. 그곳은 공식적인 권력인 총독부 관저 대신 심층의 힘, 이 메카의 사제들인 금융가들의 자리였다.

그 시절에는 세계 어느 곳이나 식민지 도시의 백인 거주 구역은 완전히 청결을 자랑했다. 도시만 깨끗한 게 아니라 백인들도 깨끗했다. 그들은 식민지에 도착하자마자 아기들처럼 매일 목욕하는 법을 배웠고 식민지의 제복, 면책과 순수의 상징인 흰옷을 입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식민지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흰 피부에 흰옷이 더해지면서 백인들과 다른 이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진흙 섞인 강물로 몸을 씻는 이들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처음의 차이는 몇 배로 늘어났다. 사실 흰색은 너무 쉽게 때가 타는 색깔이다.

백인들은 늘 씻은 몸에 늘 말끔한 새 옷 차림으로 더없이 하얘졌다. 쉽게 더러워지는 옷을 입은 야수들은 별장의 그늘에서 오수를 즐겼다. (P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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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고 식민지 지배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백인들은 부자 백인들이 사는 도심 지역과 원주민들이 사는 변두리의 중간 구역으로 밀려났다. 그곳에는 가로수가 없었다. 잔디도 없었다. 백인을 위한 상점들 대신에 조 씨의 아버지가 비법을 찾아낸 원주민용 칸막이 주택들이 있었다. 그곳의 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물을 뿌렸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모여 신이 나서 떠드는 소리, 열기 가득한 먼지 속에서 행상들이 목이 쉬도록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와 쉬잔, 조제프가 도착한 곳은 그 구역에 자리 잡은 상트랄 호텔이었다. 한쪽에는 강이 흐르고 또 한쪽은 도심 지역을 둘러싼 전차 선로를 바라보는 반원형의 건물 2층이었다. 1층에는 정해진 값에 여러 나라 음식을 파는 식당, 아편 흡연장, 중국 식료품점 들이 있었다. (P177)


카르멘이 보기에 쉬잔은 지금껏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너무 고분고분하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좋다고 믿는 무기가 아닌 다른 무기로 자유와 존엄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카르멘은 어머니를 잘 알았고, 방조 제방 얘기도 불하지 얘기도 잘 알았다. 카르멘은 어머니를 보면 주변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평야에서 살아온 농부들의 평화를 무너뜨렸다. 심지어 태평양에 맞서 이기려 했다. 카르멘에 따르면 조제프와 쉬잔은 어머니를 경계해야 한다. 어머니는 너무 많은 불행을 겪으면서 강력한 마력을 지닌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불행을 위로하느라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어머니에게 그대로 삼켜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딸이 어머니를 떠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쉬잔은 카르멘이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들이 듣기 거북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특히 제방이 무너진 뒤로 어머니는 위험해졌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쉬잔의 남편이 될 세관원과 상관 없고, 조 씨는 더더욱 아니었다. 카르멘은 문제를 단순화해 버렸다. (P188-189)


카르멘은 이유를 오래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는 매춘부들이 좋다고, 자기도 매춘부라고, 하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고, 그 여자들이 제일 정직하기 때문이라고, 적어도 식민지라는 이 거대한 매음굴 안에서 제일 덜 추잡스러운 존재라고 말했다.

카르멘은 당연히 호텔에 묵는 모든 매춘부들에게 남자들한테서 다이아몬드를 얻어내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사무실에 걸어 둔 안내문을 그대로 만들어 전용실 여섯 곳 모두에 걸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왜 다이아몬드를 팔게 되었는지까지 들려주었다.

“당연하지! 누가 그 어머니한테 다이아를 사 주겠어.” 카르멘이 씁쓸하게 말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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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 있던 남자가 사라지면 곧 조명이 켜지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백만장자들이 저러고 놀죠.” 존 바르너가 말했다.

쉬잔은 그와 마주 앉았다. 주위에는 식민지를 수탈하는 주요 흡혈귀들, 쌀과 고무와 은행과 고리대금의 흡혈귀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춤을 추었다.

“난 술은 안 마십니다. 한잔 드시겠어요?” 바르너가 물었다.

“코냑 마실래요.” 쉬잔이 대답했다.

쉬잔은 상대가 자기를 싫어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써 미소 지을 필요가 없는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조제프는 떠나 버렸고 어머니는 죽기만을 바라는 지금, 정말로, 매일 더 욕구가 간절해졌다.

“어머님께선 어디 편찮으신가요?” 질문을 찾아낸 바르너가 물었다.

“오빠를 기다려요. 그래서 병이 났고요.” 쉬잔이 대답했다.

아마도 카르멘한테 이미 들었으리라.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여자를 만났을 거예요.”

“오! 그게 무슨 이유가 됩니까?” 바르너가 분개했다. “나라면 절대 어머니를 버리지 않겠어요. 사실 우리 어머니는 성녀나 다름없죠.”

쉬잔은 바르너 어머니의 성스러움에 전율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오빠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쉬잔이 말했다. (P213)


“차로 바래다줄게요.”

쉬잔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조 씨의 차에 올랐다. 차를 타니 편안했다. 조 씨가 쉬잔에게 한 바퀴만 돌아보자고 했다. 조 씨의 자동차는 자신의 동족들인 번쩍거리는 차들이 가득한 도시를 부드럽게 달렸다. 어둠이 내린 뒤에도 자동차는 여전히 도시 속을 달렸다. 한순간 도시가 불을 밝혔고,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뒤섞인 혼돈이 펼쳐졌다. 이제 그 혼돈 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고, 조 씨의 자동차가 지날 때 흩어졌던 혼돈은 차가 지나자마자 뒤에서 다시 한곳으로 모였다. 자동차는 그 자체로 해답이었다. 사물들은 차가 그 속을 나아가는 데 따라 의미를 띠었다. 또한 영화였다. 목적지 없이 끝없이 달리는 자동차는 삶에서는 별로 볼 수 없지 않은가. (P230)


“사랑해.” 조 씨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쉬잔이 지금까지 읽은 단 한 권의 책 속에서, 그 뒤에 본 영화들 속에서, 사랑해, 이 말은 연인들의 대화에서 단 한 번, 겨우 몇 분 동안 이어지지만 수개월의 기다림을, 끔찍한 이별을, 끝없이 이어진 고통을 지워 버리는 대화에서 단 한 번 말해졌다. 이제껏 쉬잔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들은 것은 오로지 영화에서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이 말한 뒤에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순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평생 단 한 번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한번 하고 나면 평생 다시는 할 수 없다고, 다시 하게 되면 끔찍한 불명예를 떠안게 된다고,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다. (P232-233)


하사의 아내와 딸은 보통 때는 벼를 찧고 음식을 만들고 물고기를 잡고 닭들을 돌보았다. 하사는 어머니의 모든 일을 거들었다. 위쪽 5헥타르의 논에 벼 모종을 심는 일과 수확하는 일 외에도 어머니가 어떤 변덕을 부려도 다 해냈다. 자갈을 깔고 꽃과 나무를 심고 다시 옮겨 심고 가지를 치고, 그러다 뽑아 버린 뒤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다시 심었다. 밤에도 어머니가 토지국 혹은 은행에 보낼 편지를 쓰거나 장부 정리를 하는 동안 늘 식탁 맞은편 자리에 늘 어머니의 일에 찬성하는 침묵과 함께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하사가 잘 듣지 못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나서 내보내고 싶을 때가 없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사의 다리 때문이라고, 그 다리를 보면 절대 쫓아낼 수 없다고 했다. 하사의 다리는 너무 많이 얻어맞아 피부색이 푸르죽죽했고, 마치 올이 성긴 무명천처럼 얄팍했다. 그 다리 때문에 어머니는 해가 갈수록 청력이 나빠져도 그를 데리고 있었다.

하사는 어머니가 집에 거느린 유일한 하인이었다. 도시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하사에게 이제 더는 봉급을 줄 수 없다고. 먹여 주기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사는 남기로 했고,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는 어머니의 가난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가난이 자신의 가난과 공통의 척도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P252)


쉬잔을 데리고 람에 가는 길에 조제프는 조만간 여자가 데리러 올 거라고 털어놓았다. 자기가 같이 떠나기 전에 보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면서 덧붙였다. “이 아수라장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나 봐. 그래야 마음이 안 흔들릴 테니까.” 이제 곧 여자가 올 터였다. 자기가 평야를 떠나고 나면 어머니와 쉬잔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고. 오래 생각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미래는 불하지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불하지는 어머니에게 불치병 같은 악습이었다. “장담하는데, 어머니는 매일 밤 태평양을 막을 제방을 다시 시작해. 어머니 상태가 좋으냐 아니냐에 따라 제방의 높이가 100미터냐 2미터냐 달라질 뿐이지. 제방이 크든 작든 어차피 어머니는 매일 밤 다시 시작해. 너무 멋진 생각이긴 하니까.” 그러면서 조제프는 자기도 결코 방보 제방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어머니를 잊지 못할 거라고. 정확히는 어머니가 견대 낸 것들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건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 것과 마찬가지야. 절대 있을 수 없지.”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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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음을 앞두고 농부들에게 말할 겁니다. “여러분 중 누구든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기쁨을 주고 싶다면 캄 토지국의 관리 셋을 죽여 줘요.” 딱 때가 왔을 때 말할 겁니다. 지금은 그저 “숲 언저리에 있는 우리의 제일 좋은 땅을 빼앗아 후추나무를 심은 중국인 농장주들은 어디서 왔어요?” 하고 농부들이 물으면 당신들 때문이라고. 농부들이 땅문서를 안 가진 것을 이용해서 그 땅을 중국인 농장주들에게 팔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다시 묻죠. “땅문서가 뭔가요?” 난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있지만 그건 여러분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요. 냇가 초입의 새들과 원숭이들이 그냥 사는 것처럼 여러분은 그런 것 없이 살죠. 만일 있다면 누가 여러분에게 줘야 할까요? 여러분의 땅을 마음대로 팔아먹기 위해서 그것을 만들어 낸 바로 그 토지국의 개자식들이죠.”

그래요, 경작할 수 없는 내 불하지를 두고 나는 그냥 이런 얘기만 합니다. 하사에게 말하고, 다른 농민들에게 말하죠. 방조 제방을 쌓으러 왔던 농부들에게도 말했어요.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도 쉬지 않고 설명한답니다. 어린아이가 죽을 때마다 이렇게 말해요. “캄 토지국의 개자식들이 좋아하겠네요.” 그러면 그들이 묻죠. “그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데요?” 그때 내가 진실을 말해 줍니다. 아이들이 많이 죽을수록 이곳 인구가 줄어들고, 그럴수록 토지국 개자식들이 더 확실하게 평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보다시피 난 진실만 말합니다. 죽은 어린아이 앞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왜 그들이 키니네를 안 보내 줄까요? 왜 이곳엔 의사가 없을까요? 왜 의료시설 하나 없고, 건기 동안에 맑은 물을 걸러 낼 명반도 없을까요? 왜 예방 접종 한 번을 안 하는 걸까요?” 내가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설령 내가 농부들에게 알려주는 진실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이곳 평야에 대한 당신의 개인적인 주장과 동떨어졌다 해도 여전히 진실입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공을 들여도 그 진실은 닥칠 겁니다. (P298-299)


내가 번 돈, 불하지를 사기 위해 한 푼 두 푼 모은 그 돈, 맙소사, 그 돈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그 돈은 지금 어디 있죠? 이미 황금으로 무거운 당신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겠죠. 당신들은 도둑이에요. 죽은 아이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듯이 내 돈, 내 젊음도 결코 되찾을 수 없겠죠. 당신은 그 5헥타르의 땅을 내어놓든가, 아니면 언젠가 비포장도로 변의 도랑 안에서 시체로 발견될 겁니다. 도로를 낼 때 동원된 도형수들이 바닥에 산 채로 묻힌 도랑이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합니다. 무엇으로든 살아야 하기에, 희망마저 없다면,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어쨌든 새 제방에 대한 희망으로도 살 수 없다면 난 더없이 경멸스러운 캄 토지국 관리들의 시체들로라도 살아갈 겁니다. 배 속에 집어넣을 게 없는 사람에게는 무서울 게 없답니다. (P301)


아고스티 가족은 모두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토지국이나 은행에 편지를 써야 할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왔다. 그래서 쉬잔은 그 집 일을 자기 집 일만큼 잘 알았다. 아고스티네가 버텨 내는 것은 무엇보다 바르 영감의 중개로 장 아고스티가 페르노와 아편 밀매를 하는 덕분이라는 것까지 알았다. 그 덕분에 장 아고스티는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다줄 수 있었고, 람의 회관에 방을 하나 빌릴 수 있었다. 아고스티는 여자들을 그 방으로 데려가서 잤다. 하지만 쉬잔만큼은 파인애플밭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쉬잔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P340)


“철자법이 다는 아니잖아요.” 아고스티가 말했다. 어머니가 자기를 두고 얘기한다고 느껴져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혹은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또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지. 네가 편지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럼 뭔가가 없는 셈이지. 그래, 말하자면 팔 하나가 없는 셈이야.”

“어머니가 토지국에 수없이 편지를 써서 무슨 소용이 있었는데요?” 쉬잔이 물었다. “다 쓸데없었죠. 그 작자한텐 어머니가 보낸 수많은 편지보다 오빠가 공중에 대고 쏜 총 한 발이 훨씬 효과가 있었잖아요.”

어머니는 아고스티와 쉬잔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철자법을 둘러싼 대화가 이어질수록 어머니는 두 아이를 설득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해서 점점 더 절망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공중에 총을 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개자식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면 다른 게 필요하단다. 너희가 그걸 이해했을 때쯤이면 이미 늦겠지. 결국 조제프는 개자식들한테 당하고 말 테고. 그 생각을 하면 차라리 그 애가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P353-354)


어머니는 아고스티가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쉬잔은 어머니의 몸 위로 웅크리고 있었고,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같이 죽고 싶었다. 너무도 열렬히 죽고 싶었다. 아고스티도, 아직 기억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그와 나누었던 쾌락도 쉬잔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년기의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무절제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아고스티가 쉬잔을 어머니의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내 조제프의 침대에 눕혔다. 아고스티도 곁에 누웠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품에 안아 주었다. 쉬잔이 잠드는 동안에 아고스티는 그녀가 조제프를 따라 떠나게 두지 못할 것 같다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P363)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 보셔도 됩니다.” 조제프가 말했다.

“모두 들어와서 보세요. 아이들까지 전부.”

“이곳을 떠날 건가요?” 한 남자가 물었다.

“영원히 떠날 겁니다.”

여자는 원주민들의 말을 몰랐다. 낯선 세계에 당황한 그녀는 조제프와 농부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자들이 불하지를 몰수하러 올 테니 총 하나는 남겨 둬요.” 남자 하나가 다시 말했다. (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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