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라이튼 로크Brighton Rock> 1948년
소설 <브라이턴 록>은 미국추리작가협회와 영국추리작가협회 선정 세계 100대 추리소설에 포함된 장편 스릴러다. 영국의 스릴러 대가이면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고찰한 작가 그레이엄 그린(1904~1991)의 아홉 번째 소설. 1930년대 휴양지 브라이턴을 배경으로 살인자와 그를 추적하는 탐정의 대결을 그린다. 전형적인 탐정 누아르 장르지만 천국과 지옥, 선과 악, 구원과 같은 종교적 메시지와 상징, 그리고 가톨릭의 교리를 담았다. 평단에서는 이 작품을 범죄 소설의 형식을 빌린 종교 문학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영화 <브라이튼 로크Brighton Rock>는 1948년과 2010년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1948년에 제작된 영화는 영국영화협회 선정 20세기 베스트 영국영화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는 팰리스 잔교 근처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꼬인 철삿줄이 풀려 나가듯 둘씩 짝을 이루어 끝없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군중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다들 흥겹게 놀아보겠다고 진지하게 결심한 듯한 행색이었다. 붐비는 기차를 타고 빅토리아에서부터 줄곧 서서 온 그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것이고, 자정에는 반쯤 졸면서 덜커덩거리는 기차를 타고 비좁은 거리로 돌아가서 문 닫은 술집으로, 혹은 집으로 지친 걸음을 옮길 터였다. 그들은 이 긴 하루로부터 눈곱만큼의 재미와 즐거움을 얻어 내기 위해, 즉 이 햇볕, 이 음악, 달가닥거리는 모형 자동차, 수족관 산책로 아래에 꾸며진, 크게 웃고 있는 해골들 사이로 뛰어드는 유령 열차, 막대 모양의 브라이턴 록, 종이로 만든 세일러 캡 따위를 얻어 내기 무진 고생을 하고 무진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아무도 헤일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아무도 <메신저>를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은 자국이 있는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카드 한 장을 조심스럽게 조그만 쓰레기통 뚜껑 위에 올려놓고 나서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진을 세 잔째 마신 뒤에 밀려든 감정은 고독감뿐이었다. 그때까지는 군중을 경멸했으나, 지금은 유대감을 느꼈다. 그 역시 그들과 똑같은 서민 출신이면서도 더 많은 봉급을 받는 탓에 그들과 다른 것을 원하는 척 가장하며 살아야 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잔교나 요지경 같은 것에 끌렸다. 그는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독의 표시인 비웃음을 띠며 해안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 어디선가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브라이턴을 떠나왔을 때.” 기네스 맥주에 얼근히 취한, 울림이 큰 목소리, 한 술집의 일반 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걸음을 돌려 그 술집의 특실로 들어간 헤일은 두 개의 바와 하나의 유리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그 여자의 만개한 매력을 지켜보았다. (P11-13)
-- 일을 계속해야 했다. 해안 도로를 걷다가 가능한 한 빨리 인파에 섞여 들어가, 좌우를 살피고 양 어깨 너머로 뒤쪽을 번갈아 살피며 나아가야 했다. 낯익은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인파에 묻히면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마치 원주민이 군데군데 치명적인 복병을 배치해 놓은 무성한 숲처럼 보였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플란넬 셔츠를 입은 남자 너머를 볼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리면 이번에는 진홍색 블라우스에 시야가 가로막혔다. 노부인 세 사람이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부드럽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평화로이 멀어져 갔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다. (P21)
다 끝났다. 아이다는 캘리포니아 양귀비 향이 나는 손수건에 어렵사리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짜냈다. 그녀는 장례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유령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면서 좋아하는 식이었다. 그녀에게 죽음은 충격적인 것이고, 삶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믿는 것은 유령, 위저보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탁자, 구슬프게 꽃 이야기를 하는 작고 서툰 목소리 같은 것들뿐이었다. 죽음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나 해당될 터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삶이란 것은 삶 뒤에 오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었다. 신과 하나가 되는 것 — 그것은 햇볕 따스한 날의 기네스 맥주 한 잔에 비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렇다고 그 가늘고 투명한 존재를 불멸의 존재로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널빤지가 삐걱거리는 소리, 심령 연구 본부의 유리장 안에 든 엑토플라즘, 언제가 교령회(交靈會)에서 들은 적인 있는 “위쪽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아주 아름다워. 어디에나 꽃이 있어”라고 하던 목소리..... 그런 것들을 불멸이라 할 수는 없었다.
꽃이라. 아이다는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그건 생명이라 할 수 없어. 생명이란 황동 침대 기둥에 내려앉은 햇빛, 루비 포트와인, 내가 응원한 승산이 없어 보이던 말이 결승점을 통과하고 깃발이 힘차게 올라갈 때의 벅찬 심장 박동 같은 것이지. 생명이란 엔진이 요란스럽게 진동하며 달리는 택시 안에서 가엾은 프레드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이야. 천상에는 꽃이 있다는 얘기나 하게 하는 거라면 죽는 의미가 어디 있어? 프레드는 꽃 같은 것은 원치 않았다. 그이가 원한 것은..... 그 생각을 하자 헤네키 술집에서 느꼈던 달착지근한 비애감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생명이란 것을 몹시 소중히 여겼다. 자기가 믿는 유일한 것인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불행을 끼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애인을 잃는 것 --‘살인의 아픔’-- 은 ‘언제나 회복되기 마련’이라고 말하곤 했으며, 불구가 되든 장님이 되든 ‘살아 있기만 하다면 다행스러운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헤네키 술집에서 웃고 있을 때든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울고 있을 때든 그녀의 낙천주의에는 뭔가 위험하고 무정한 것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화장장에서 나왔다. 머리 위로 솟은 쌍둥이 탑에서 프레드의 마지막 흔적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화장로에서 나는 한줄기 가느다란 회색 연기였다. 꽃이 핀 교외 지역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날은 화장터로서는 바쁜 날이었다. 프레드는 알아볼 수 없는 회색 재가 되어 분홍색 꽃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런던 하늘의 매연물질의 일부가 되었고, 아이다는 눈물을 흘렸다. (P72-74)
소년은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여 수상쩍은 빗속으로 몸을 내밀며 천천히 말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한번 살인을 하게 되면 다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더군.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에게는 살인이라는 말도 ‘상자’, ‘옷깃’, ‘기린’ 같은 말 이상의 의미를 띠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스파이서, 넌 거기 근처엔 가지 마.”
상상력이 아직 깨어나기 전이었다. 그게 소년의 힘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거나 다른 사람의 신경으로 느끼지 못했다. 오직 음악만이, 심장을 뒤흔드는 현의 소리만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은 용맹이 애초의 싱싱함을 잃어버리는 것 같고, 노화가 찾아오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의 경험이 뇌를 두드려 대는 것 같은 불안이었다. (P93-94)
“그럼......”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만나겠죠. 안 만날 수도 있을 테고.” 그는 민원실을 지나가면서 다시 히죽 웃었다. 그러나 양쪽 광대뼈 부분은 유난히 붉게 달아올랐다. 비록 히죽 웃으며 참고 있었지만, 혈관 속에서는 독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리라, 그는 생각했다. 내가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서 놈들이 나를....... 그는 자기 부하를 죽인 기억을 떠올리며 좁은 어깨를 으쓱 뒤로 젖혔다. 이 형사 놈들은 자기들이 정말 똑똑한 줄 알지만 실은 그것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종자들이지. 그는 자신의 영광의 구름을 직접 끌며 나아가고 있었다. 미성년인 그의 주위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P138)
“난 겁 안 나요, 핑키..... 당신이 곁에 있으면.”
그는 화가 나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잊어야 할 것은 다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다 잊어버렸다. 황산이 든 병도 잊어버리고...... 그때는 자신의 말에 겁을 집어먹곤 했었다. 그 뒤로 자기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정말로 믿고 있었다. 그래, 이건 ‘야외 나들이’니까,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스파이서의 농담을 다시 떠올렸다. 소년은 쥐를 연상시키는 소녀의 머리통, 그리고 앙상한 몸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가 처졌다. 거의 한 마리가 맨 끝 쪽 화단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토요일’,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토요일이군.’ 옛날 자기 집의 방이 머리에 떠올랐다. 주말마다 침대 위에서 벌이는 엄마 아빠의 무섭고 겁나는 운동. 그는 그 모습을 자신의 싱글 침대에서 훔쳐보았다. 녀석들이 내게서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침대에 눈독을 들였다. 그의 내부에서 동정(童貞)의 순결이 성욕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들은 성(性)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사람을 죽이고 패거리를 관리하고 콜레오니를 굴복시킬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이제 돌아가자.” (P183-184)
두 녀석은 숨을 헐떡였다. 녀석들은 웃느라 숨이 가빠졌고, 소년의 폐는 아직 싱싱했다. 그래서 이제는 녀석들만큼 달릴 수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손을 감쌌다. 그리고 얼굴의 피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옷으로 흐르도록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모퉁이를 돈 다음 녀석들이 당도하기 전에 빈 차고로 들어갔다. 소년은 면도날을 꺼내 든 채 어두운 차고 안에 서서 회개하려고 해 보았다. ‘스파이서’를 생각하고, ‘프레드’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추격자들이 다시 나타났을 것 같은 길모퉁이에 대한 생각에 막혀 그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소년은 자신에게는 회개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222)
소년은 이 집 주인이 증오스러웠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 증오스러웠다. 인형도 유모차도 망가진 흔들 목마도 증오스러웠다. 빼곰히 얼굴을 내민 조그만 싹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녀석들처럼 그를 짜증 나게 했다. 소년은 배가 고프고 어지럽고 몸이 떨렸다. 그는 고통과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어둠이 이곳 평지로 밀려든 지금은 차분히 회개하기 좋은 때였다. 등자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사이에는 그럴 시간이 없다. 한순간에 생각의 습관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습관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꼭 들러붙어 있는 법이다. 소년은 세인트판크라스역에서 놈들의 습격을 받은 뒤 대합실에서 죽어 가던 카이트를 떠올렸다. 한 짐꾼이 불 꺼진 난로에 분탄을 붓고 있던 대합실에서, 카이트는 죽어 가는 동안 내내 누군가의 젖가슴에 대해 얘기했었다.
그런데 스파이서는..... 소년은 생각이 필연적으로 스파이서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놈들이 스파이서를 해치웠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어 준 일에 대해서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는 그 참견쟁이 여자에게 로즈 말고는 증인이 없게 되었고, 로즈는 자신이 다룰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지극히 안전한 상태가 되면, 그때는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두컴컴한 조그만 고해실, 신부님의 목소리, 그리고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분홍빛 유리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등불 앞이나 조각상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흐릿한 향수에 잠겼고, 그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동안 그에게는 영원한 고통이란 것이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면도날에 베이는 아픔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P224-225)
“그럼 네 생각에, 그 사랑은 결국 어떻게 끝날 것 같아?”
“모르겠어요.”
“넌 아직 어려, 그래서 그런 거야.” 아이다가 말했다. “너무 낭만적이야. 나도 한때는 너 같았지. 너도 나이를 먹으면 달라질거야. 네겐 경험이 좀 필요해.” 넬슨플레이스 소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굴로 쫓겨 들어간 이 작은 동물은 산들바람 부는 밝은 세상을 내다보았다. 굴 안에도 살인, 성교, 극빈, 정절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 등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작은 동물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사람들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직 드넓고 번지르르한 바깥세상에만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지 못했다. (P252-253)
긴 도정.... 그러나 그는 한 걸음도 잘못 디딘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스노 식당에 가서 그 여자애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지금 피고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스파이서를 죽이지 않았다면.... 한 걸음도 잘못 디딘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는 압력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꼬치꼬치 캐묻는 여자, 스파이서를 겁먹게 한 전화 내용.... 소년은 생각했다. 내가 그 애랑 결혼하면, 그땐 이 일이 끝나게 될까? 이 일이 어디까지 날 몰아붙일까? 그는 입을 씰룩이며 생각했다. 얼마나 더 안 좋아질까? (P306-307)
소년이 씁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다시는 고해하러 갈 필요없어..... 우리 둘 다 살아 있는 한은.” 그는 고통을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캠퍼스에 찔렸고 그다음엔 면도칼에 베임으로써 고통을 통과해 왔다. 이제 헤일과 스파이서를 죽인 일조차도 사소한 행위이자 아이들의 놀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이제 유치한 일들은 걷어치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은 이 일로 —이 타락한 일로— 인도한 것에 불과했다. 소년의 내부에 자신의 힘에 대한 경외감이 차올랐다. “이제 가는 게 좋겠어.”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다정하게 만졌다. 전에도 한 번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소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P347)
“배석한 분들이라.” 소년이 그렇게 말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게 프리윗, 댈로, 당신들이란 말이군.” 그는 펜을 쥐고 서명했다. 관청에서 쓰는 펜촉에 종이가 긁혀 보풀이 일었다. 문득 옛날에는 이 같은 증거 문서에 피로써 서약을 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뒤로 물러서서 로즈가 어색하게 서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얻는 그의 일시적 안전.... 이것이 대죄임을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음울한 희열과 자부심이 차올랐다. 지금 그는 천사들이 자신을 보고 눈물을 흘릴, 완전히 자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P351)
“가지 마요. 난 무섭단 말이에요. 핑키.”
그러나 그는 이제 다시는 겁을 집어먹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마장에서 도망칠 때 그는 두려웠었다. 고통이 두려웠으며,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가 연신 땡그랑거렸고, 종에 연결된 긴 철사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현관 안에 퍼졌다. 침대 위의 알전구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자, 세면대, 검댕이 낀 더러운 창, 굴뚝의 무미건조한 형상, “사랑해요, 핑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이런 것이 바로 지옥이었다. 걱정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지옥은 단지 자신의 친숙한 방일 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돌아올게. 걱정 마. 돌아올게.” (P376)
“그이는 나랑 결혼했어요.”
“왜 결혼했을까? 아내에게는 증언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지. 너도 내가 아까 얘기한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증인이란 말이야, 이 아가씨야.” 그녀는 다시 그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 했다. “난 널 구해 주고 싶을 뿐이야. 그 애는 자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널 죽일 거야.”
로즈는 침대를 등진 채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빵을 잘 만들 것 같은 큼지막한 손을 로즈의 어깨에 얹었다. “사람은 변해요.” 로즈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를 봐. 이제껏 조금도 변한 적이 없잖아? 그건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 같은 거야.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막대 사탕 말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인 거야.” 그녀가 로즈의 얼굴에 대고 구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에서 달콤한 와인 냄새가 났다. (P408-409)
“이 일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야.”
“그러나 당신은 확신이 너무 지나쳐, 아이다. 너무 저돌적이야...... 물론 좋은 뜻으로 그러는 것이겠지만, 저 핑키라는 애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게다가,” 그가 그녀를 비난했다. “당신은 재미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프레드는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아니잖아.”
그녀는 반짝이는 커다란 눈을 그에게로 돌렸다. “뭐,” 그녀가 말했다. “재미가 없었다고 말하진 않겠어.” 그녀는 이제 일이 다 끝나 버린 것이 꽤나 아쉬웠다. “그런데 그게 뭐가 나빠? 난 옳은 일을 하는 게 좋아. 그뿐이야.” (P457)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그가 갑자기 말을 꺼내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인생은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라는 생각?”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거 믿지 마. 내가 인생이 뭔지 말해 줄게. 인생은 감옥이야. 돈을 구하려 해도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게 인생이야. 기생충, 백내장, 암..... 2층 창을 통해 새된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 그건 아이들이 태어나는 소리야. 인생은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이라고.” (P466)
나에게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 수호천사라면, 그 수호천사는 악마처럼 얘기하고 있어. 나로 하여금 덕을 행하도록 유혹하면서 마치 그게 죄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거야. 총을 던져 버리는 것은 배신이야. 비겁한 행위라고. 그건 내가 그이를 영원토록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걸 선택하는 행위나 다름없어. 예전에 들은 설교나 교육이나 고백의 말씀 중에서 기억나는 현학적이고 근엄한 어조의 도덕적 격언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에게 간청하라’ 따위— 이 그녀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모호하고 암시적인 말처럼 여겨졌다. 악의 행위야말로 정직한 행위였다. 대담하고 충직한 행위였다. 고상하게 말하는 것은 단지 용기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권총을 들어 올려 귀에 댔으나, 욕지기를 느끼며 다시 내려놓았다. 죽는 걸 두려워하는 것은 보잘것없는 사랑이야. 나는 대죄를 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잖아.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핑키는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의지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핑키를 믿을 수 있었다. 다시 총을 들어올렸다. (P497)
그녀가 말했다. “자살할 걸 그랬어요. 저는 자살했어야 해요.” 노신부가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으나 그녀가 신부의 말을 끊었다. “저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용서는 원치 않아요. 전 그이처럼 되고 싶어요. 지옥에 떨어지고 싶어요.”
노신부는 쌕쌕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로즈는 신부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조롭게 되풀이했다. “자살할 걸 그랬어요.” 그러면서 비참한 심정으로 가슴에 두 손을 꼭 얹었다. 나는 고해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생각을 하러 온 거야,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집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난로는 불이 꺼져 있고 아버지는 침울한 기분이고 어머니는 —그녀는 어머니가 에둘러 물어보는 질문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핑키가 돈을 얼마나 남기고 갔는지 궁금해하는 그런 집에서는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라는 그 모호한 세계에서 그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은총이 한 사람에게만 작용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없다면, 그녀는 지금이라도 자살할 용기를 낼 수 있을 터였다. 로즈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 그 여자는 천벌을 받아야 해요. 그이가 날 없애고 싶어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그 여자는 사랑을 몰라요.”
“그 여자가 옳았을 수도 있어.” 나이 많은 신부가 나직이 말했다.
“신부님도 몰라요.” 그녀가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을 창살에 바짝 붙이고 사납게 말했다. (P505-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