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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0. 2024

필립 지앙의 <엘르>

영화 <엘르Elle>  2016년

<엘르>(Elle)는 2016년 5월에 개봉한 파울 페르후번 감독의 심리, 스릴러 영화이다. 2012년 앵테랄리에상을 수상한 필리프 지앙의 소설 <Oh...>가 영화의 원작이다. '엘르'는 프랑스어로 "그녀"를 의미한다.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으로, 당시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다. 제89회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부문에 출품되었다. 제74회 골든 글로브상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에 비욘 지방 축제에 갔을 때 길어진 술자리 탓에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추락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고, 그때부터 내 삶을 지키기 위해 몇몇 징조에 유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종류의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것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이들을 무시했다. 웬지 모르지만 그중에서도 하늘의 신호는 내게 늘 가장 절대적이고 정확했다. 그러니 꽤나 드문 경우인 X자 형태의 구름은 대번에 나를 사로잡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위험 신호일 수밖에 없었다.             (P8-9)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고 부드럽다. 어떤 위협의 기운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토록 찬란한 날에 저 푸른 하늘이 내게 겪게 한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욕실이 태양의 홍수에 잠겼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아우성이 들려온다. 반짝이는 지평선이 보인다. 새들이며 다람쥐들……. 이렇게 좋을 데가. 이 목욕은 기적에 가깝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웠다고 할 순 없지만, 정신만큼은 완벽하게 추슬렀다. 예견된 두통도 오지 않았다. 나는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스시를 주문했다. (P11)     


오후 5시 무렵, 다시 강간범에 생각이 미쳤다. 불과 48시간 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내가 마르티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려, 상자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듯 문을 벌컥 밀치며 내 집에 침입했다. 불현듯 놈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놈은 호시탐탐 적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감시했던 것이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러 우편물을 챙기고 메모를 확인한 뒤, 전화 몇 통을 돌려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안나가 찾아 업무상 논의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자기 얼굴이 영 이상하네.” 나는 어리둥절한 체했다. “무슨 소리. 컨디션이 최상인걸. 오늘 날이 얼마나 화창해, 햇살은 또 얼마나 눈부시고.” 안나가 미소 지었다. 만일 내가 누군가와 의논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안나는 분명 가장 적절한 상대다. 우리는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저지했다. 내가 안나의 남편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일까? (P23)    

 

입주할 아파트를 나서며 벵상이 한 잔 사겠다고 호기롭게 제안했고, 우리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벵상은 하와이 맥주를, 나는 남아프리카산(産) 드라이 화이트와인을 주문했다. 우리는 마침내 내가 보증을 선, 작은 발코니가 딸린 방 두 칸짜리 20평 남향 아파트의 행복한 세입자가 된 것에 건배했다.

“이 계약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지, 벵상? 책임감을 갖도록 해. 네가 세를 내지 않으면 내가 고스란히 떠안게 될 거고, 그럼 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내 말 새겨들어, 이건 장난이 아니야. 벵상. 비단 너희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할머니 문제로 직결되기에 하는 소리야. 할머니 집세도 내가 내는 거 알고 있지? 요새 세상이 극도로 엄격해. 허투루 넘어가는 게 없다고. 네 계좌 하나 틀어막는 건 일도 아니야. 어떻게든 추적해서 네가 내야 할 돈을 뽑아갈 거고, 가져갈 돈이 없으면 법무사를 보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널 쥐어짤거야. 이쯤 해둘게. 밥줄을 쥐고 노는 자들은 피 흘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이미 손에 피를 흠씬 묻힌 자들이라는 걸 명심해.”             (P24-25)  

   

그런 식의 공방이 2년 이상 이어지다가 우리는 헤어졌고, 마침내 나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자유. 날로 성질이 고약해지는 남편한테서 해방되었고, 무엇을 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건지 모르는 아들한테서 해방되었다. 정작 로베르와의 관계는 별반 족쇄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부부 생활을 끝내는 기폭제가 되지 못했다.

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발견인가. 오늘날 한 발 물러나 돌이켜보니 고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요, 유일한 안식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좀 더 일찍 헤어졌어야 했다.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못 볼 꼴을 보였고, 각자의 바닥을 드러냈다. 상황에 따라 서로에게 저열하고 비루하고 추악하고 초라하고 패악스럽게 변덕맞게 굴었으며, 정녕코 거기서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리샤르에 의하면 자존감만 잃었을 뿐이고, 나도 동의하는 바다.

누군가를 떠나려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두뇌가 터져버린 좀비라든가 간간이 마주치는 단순한 영혼이 아닌 이상은,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고, 후반에는 거의 신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P34)

    

과연 이번엔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그가 우리를 다시 이길로 이끈 것이, 이미 겪을 대로 겪었기에 그 혹독함과 고통을 익히 아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다시 끌어들인 것이 몹시 원망스럽다. 내게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걸 다시 겪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채 봉합되지도 않은 상처를 다시 열 수 있는 것인지? 그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정녕코 독한 저주가, 겉보기엔 정신이 말쩡한 것 같고 그렇기에 첫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스스로 졸작임을 인지할 수도 있을 것 같건만, 자기의 작업이 가치 있다고 굳게 믿는 저런 인간들은 대체 머리에 어떤 벼락을 맞은 것일까? 대체 어떤 두터운 진흙으로 눈이 감긴 것일까? 어떤 맹목성이 두뇌를 마비시킨 것일까? 뇌의 어떤 기능이 장애를 일으킨 걸까? 리샤르에게 집에 들르라고 연락했다. 그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회사에서 가져온 일을 중단하고는,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했다.             (P40-41)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집 근처에 은밀하게 주차되어 있다. 나무에 아직까지 끈질기게 붙어 있는 무성한 이파리들로 반쯤 가려졌다. 이틀 연속이다. 어제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늘은, 준비되었다. 좀 전에 자동차가 주차되었을 때 해가 완전히 떨어졌고 나는 쌀을 헹구느라 창문 앞에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차 안의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을 만큼 사위가 어둡다. 달도 하늘 높이 드리워진 구름의 베일에 가려 한 귀퉁이만 모습을 드러낸 채 가늘고 파리한 빛만을 내뿜고 있다. 차종도 가려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운전석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신경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맹렬히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한 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두렵지 않다. 그동안 수차례 경험을 통해 더는 물러설 수 없을 때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상황이다. 나는 결연하다.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내게 오기를. 나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채 그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를 맞을 준비가 됐다. (P49)    

 

놈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희미한 아릿함과 엷어져가는 몇군데의 멍 자국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육체적 파장이 아니라-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문제를 오직 삽입에 국한하면 그보다 좋지 않은 경험들도 있었다- 정신적 파장이다. 핵심은 그가 나를 강제로 덮쳤다는 것이고, 그 순간 내 팔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P50)     

침실 창가에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귀가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차에서 내렸을 때, 노트북마저 끈 채 망원경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우리가 원만한 이웃의 징표로서 가벼운 손짓만을 주고받았던 때 내가 받았던 인상보다 훨씬 괜찮다. 그가 첫인상으로 내게 남긴 그 억지웃음의 사내보다 훨씬 쾌활하고 박력 있다! 나는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손쉬운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내로 나가서 보다 폭 넓은 선택을 하는 편이 훨씬 신중하다는 걸. 파트릭은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랄까. 꾸민 태도의 서글서글한 유형. 나르시시즘적이고 스스럼없으며 랄프 로렌을 입는 부류. 더 나은 상대를 찾기란 어렵지 않겠지만 그런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더러 손쉬운 해결책이야말로 지혜의 징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침실의 어둠 속에서 남자를 염탐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P74~75)  

   

가면이 벗겨지는 두려움.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그 모든 죽음과 그 모든 부당함과 그 모든 광기에 직면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두려움은 여전히 끈질기고 파급력이 강하다. 이렌느는 결국 세월과 함께 우리도 안전해졌다고 여겼지만, 나는 결코 설득당하지 않은 채 다 자라서도 엄지손가락을 빠는 늦된 아이처럼 경계하는 습관을 이럭저럭 유지했다. 생각해보니 덜 경계했는지도 모르겠다. 뭇 여자들처럼 성폭행을 당하고야 말았으니.           (P119)    

 

“뭐가 소름이 끼쳐?”

“뭐가 소름이 끼치느냐고? 글쎄, 그냥 둘이 맺은 관계, 그 남자만 아는 엄마의 어떤 면, 둘의 나이 차, 둘만의 내밀한 것들..... 정말 끔찍한 건 뭔 줄 알아? 엄마는 두 가지를 원했어. 재혼하고 싶어 했는데 내가 반대했지, 강력하게. 이게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관련된 거야. 엄마는 너무 늦기 전에,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줄을 놓기 전에 내가 적어도 한 번쯤은 아버지를 보러 가기를 원했어. 그것도 거절했지. 당신은 이런 날 어떻게 생각해? 적어도 표창장 감은 아니지, 안 그래? 어쩌면 랄프가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기쁨을 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 혹여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사람이 절대 나는 아닐 거고, 난 그 사실이 지독하게 부끄럽고 끔찍하게 슬퍼.”                       (P149)     


나는 불 앞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작업실로 올라가 선물 몇 개를 포장했다. 준비가 좀 늦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생활 체계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어서 카드를 써서 선물 안에 미끄러뜨린 뒤 하품을 했다.

내 손이 아직 입을 막고 있었을 때, 누군가 내게 왈칵 달려들며 나를 그대로 바닥으로 –카펫이 깔린- 넘어뜨렸다. 침입자와 함께 추락하며 나는 책상에 있던 전등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턱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침입자는 복면을 썼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더 한층 악을 쓰며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이번엔 그가 힘을 잘 쓰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날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그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의 무기소지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온힘을 다해 나를 짓누르며 내 목을 졸랐다. “사람 살려! 도와줘!”라고 악을 쓸 때마다 얼굴로 손이 날아왔지만 실신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거셌다. 그가 내 바지를 내리려 하는 동안 나는 책으로 가득 찬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서 등으로 땅을 밀며 그 반동으로 그의 정수리를 발로 찼고, 그렇게 그의 압박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P162~163)

     

바에 갔다가 파트릭과 마주쳤다. 이 파트릭은 두 얼굴이 섞인 파트릭이다. 그를 매력적인 동시에 혐오스럽게 만드는 두 얼굴의 부적절한 중첩. 내 아버지와 그리 다르지 않다. 나는 그와 몸이 닿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물었다.

“괜찮아요? 지루하지 않아요?”

그는 몇몇 아는 얼굴을 만난 듯했고 내게 자기들과 함께 한 잔 들자고 청했다. 나는 대체 누구인지 멀리서 살폈다. 런던 소호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끔찍한 프랑스 여자였다. 나는 벵상과 급히 해결해야 할 자동차 문제가 있다는 것을 구실로 황급히 그 자리를 모면했다. 순간 파트릭의 얼굴에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제 표정을 회복했다. 그의 자제력을 칭찬해주기 위해 나는 손으로 몰래 그의 손을 스쳤다.              (P254)     

오직 나만이 진실을 안다. 오직 나만이 그것이 연출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 벵상을 위해서 그편이 백 번 천 번 낫다. 만일 벵상이 자기가 단지 자기 친엄마와 변태적 놀음을 즐겼을 뿐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 지금처럼 나에게 호의적인 감정일 수 없을 것이다. 확신한다. 나는 그쪽으로는 안심한 채 정원의 꽃들에 물을 주고 있다. 꽃들이 말라 있다. 유난히 더운 날이다. 아직 6월 중순인데 한여름이라고 해도 될 날씨다. 찬물을 뿌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기우는 태양에 내 양 볼이 익을 정도다.         (P262)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추악한 놀음을 수락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섹스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사실 나는 내가 지나치게 강인한 동시에 지나치게 나약할 뿐이지, 그리 이상하거나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놀랍기 짝이 없다. 고독의 체험, 지나간 시간의 체험이란 놀랍기 짝이 없다. 자아 체험이라고 할까. 가장 담대한 자들이 비틀거리는 법. 나는 비틀거린 것 이상이었다. 인정한다. 이따금 우리의 부둥킴을 다시 보기도 한다. 왠지는 몰라도 마치 내가 땅바닥을 구르며 격투를 벌이는 두 성난 남녀의 몇 미터 위에 붕 떠서 그 장면을 목도하는 기분이 된다. 나의 활약과, 나의 분노와, 나의 무시무시한 비명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바로 그 비명 때문에 벵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벵상이 내가 숨이 넘어가는 중이라고 착각했으리라. (P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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