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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8. 2024

테사 데 루의 <안나와 로테>

영화 <쌍둥이 자매>  2002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독일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 안나와 로테. 여섯 살에 부모를 잃고 안나는 가난한 독일 할아버지 집으로, 로테는 부유한 네덜란드 삼촌 집으로 보내지면서 삶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 68년 후 온천 휴양원에서 둘은 노인으로 재회한다. 2002년 '쌍둥이 자매'로 영화화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네덜란드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벤 솜보가트 감독이 연출했고, 지나 리차르트 등이 주연으로 출연, 한네케 니엔스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너희 아버지가,” 일곱 자매 중 한 사람이 속옷을 입히면서 말한다. “ 간밤에 돌아가셨단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안나가 부츠의 끈을 힘들게 묶으며 한숨을 내쉰다. “그럼 아버진 더 이상 기침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슴 통증도 느끼지 않을 거야.” 로테가 거든다.               (P32)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안나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독특한 장소에서…… 이건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게 분명해.” 로테는 종이컵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심오한 뜻 같은 건 믿지 않았다. 그저 우연의 일치를 믿을 뿐. 지금, 그 우연의 일치가 그녀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P37)     

어느 날 로테는 아버지가 커다란 깃발을 달기 위해 그 탑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꼭대기 위에서 펼쳐진 돛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옆에 서 있는 아주 작은 형체를 보았을 때,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날려가는 게 모든 아버지들의 운명인 것일까?                (P44) 

    

로테는 약간 어지러웠다. 그 기이한 가족사가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쉬잇, 그런 건 더 이상 생각하지 마. 그런 일은 일어난 적 없어. 하지만 그렇게 그녀가 아주 오래전에 밀봉해놓았던 쓰라린 수수께끼의 봉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느닷없이 깨어지고 있었다.            (P45)   

  

“독일 놈들은 절대로 믿지 마, 한 번 독일 놈은 영원히 독일 놈이야.” 로테의 네덜란드 아버지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신중하게 구분해야 했다. 그건, 그래야만 했다. 그런 확고한 구분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나치 협력자냐 아니냐.’ 그 구분은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사라졌고, 단지 시제만 달라졌다. ‘나치 협력자였느냐 아니었느냐.’            (P186)     

“로테,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 그런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전체적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전혀 몰랐고, 그래서 질문할 수도 없었어.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니?”

“우린 몰랐다.....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그 말을 들었지.”

안나는 포크로 타르트의 아랫부분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동작이 로테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희들은 하나같이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지.” 안나가 화난 목소리로 딱딱거렸다. “너희는 45년 동안 계속 그래왔어. 하지만 그러기는 쉬워. 독일 국민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너희들은 그렇게 소리치지.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걸 되묻고 싶어. 서쪽의 너희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었지? 너희는 우리가 조용히 재무장하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뒀어. 베르사유조약하에 개입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야. 너희는 우리가 라인 지방으로, 오스트리아로 행군해 가는 걸 묵인했어. 게다가 너희는 우리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었지. 프랑스, 영국, 아메리카로 건너간 독일 이민자들은 경고했어. 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 너희들은 왜 멈추는 게 가능할 때도 그 멍청이를 제지하지 않았을까? 너희들은 왜 우리의 운명을 우리에게 내맡겨서 독재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내버려둔 거지?”

“그래, 결과적으로 ‘우린’ 그랬어!”

“왜, 왜 그랬는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거야.”

로테의 눈이 반짝였다.

“안나, 너는 상황들을 그럴듯하게 왜곡하는 재주가 있구나.” 로테는 적의를 띤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독일인들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너의 그 논거는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것 중에 최고야.”                 (P191-192)

     

로테는 독일인들에 대해 투덜대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더 독일인들에게 애정을 품게 되었다. 그가 내뱉는 부정적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녀에게 다시 안나와 만나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가 독일인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98)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다가갈 수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것이었다.                     (P241)     


“아버지는 안 계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일을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순 없습니다.” 그녀는 문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아무도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회피하듯 쳐다보았다. 지칠 대로 지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인 그 노인은 어떤 재앙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같아 보였다. 너무 왜소하고 너무 가벼워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라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처럼.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침묵이 부끄러워졌다.                             (P337)     

……이 만남은 그녀들이 화해할 수 있는 마막 기회였다. 한 사람은 간절히 화해하고 싶은 엄청난 욕망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못지않은 깊은 불신 때문에 계속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기억이 그녀들의 치료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계속에서 유령들을 불러냈고, 그래서 유령들이 곁에 와서 있었다. 그들의 상처박은 영혼과 함께, 화약 냄새와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무거운 하늘 아래에서. 생명권, 자유, 인가에 대한 사랑, 가톨릭적인 자애를 상기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위대하 비가. 벽과 기둥들을 통과해서 온 유령들은 그녀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뿌리 깊은 흔적들을 남겼다.                     (P393) 

   

그녀 귀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녀 주위에는 절대적인 정적만 가득했다.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에이셀 다리 위에서도, 철로 공습 때도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두려움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P434)    

 

상황이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고 긴장은 점점 더해갔다. 에른스트는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아 서투른 청혼을 했다. 어색해하며 힘들게 말을 꺼내는 그의 태도에 감동받은 로테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남자답지 못한 나약함과 상처받기 쉬운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점 때문에 그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의 삶이 과연 정상적인 사이클을 되찾을 수 있을까, 라는 은밀한 두려움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 엄청난 대가족,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소중한 하나의 소우주가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그녀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줄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남겨질 공허감에서 달아날 수 있기를 바랐다.                (P479)   

  

싸움을 잠시 멈춘 그녀들은 계속 싸우라고 재촉당하는 개들처럼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로테는 안나 어깨 너모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더 이상 안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기기 힘들었다. 맹렬하고 속 좁은 적개심이 그녀의 혀를 흥분시켰다. (중략)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피곤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두 개의 다른 행성,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행성이야.             (P498)   

  

“넌 네덜란드 여자야. 아주 다르지. 나는 배불리 먹고 살았던 사람들에겐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아. 우리 군인들은 비쩍 마른 데다 병에 걸려 있었어. 그들에겐 더 이상 국가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었다구. 그들은 내 동지들이었어.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너는 엄청나게 불결한 군 병원에 독일 군인들과 함께 있어보지 못했으니까. 만약 그걸 경험했더라면 너도 분명히 생각이 달라졌을 거야.”

그것은 최후의 일격이었다. 안나에게 선제 공격을 당한 로테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테는 마치 진도가 더딘 학생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 교사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은 나치 독재 정권으로부터 너희들을 해방시켜 주었잖아.....” 로테는 지대한 노력으로 간신히 말을 끝냈다.

“하......” 안나는 냉소적으로 웃으면서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정말로 그들이 우리를 구해주러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들은 우리의 과학자들을 붙잡아 미국으로 데려갔어. 화학자들, 생물학자들, 원자 연구자들, 군사 전문가들을 말이야. 게다가 바르비 같은 게슈타포들을 CIA에 끌어들였고, 그런데도 넌 나더러 그들을 해방자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군.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SS친위대를 희생양으로 만들었어. 대신 수백만 독일 병사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 장성들을 전혀 처벌하지 않았지. 미군은 그들을 신사로 대우해줬어. 점잖게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신사야.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그 재판관들은 또 어떻고.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낸 인물들이야. 하지만 그들 대부분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그럼 아이히만은 어때?”

“비젠탈같은 사람도 있긴 했지. 그리고 뉘렌베르크 재판에서의 그 재판관. 그는 이상주의자였어. 지극히 예외적인 인물이었지.”

로테는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주장들이 낯설지 않았다.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의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그녀가 이런 주장들을 어디에서 들었던 걸까?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다른 주장들을. 그녀는 안나의 목소리 너머로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다. 그녀의 아버지. 그는 지금의 안나와 똑같이 열을 내고 고함을 질러가며 미국인들에 관해 말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건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완전한 자력으로 미국의 가면을 벗긴 스탈린의 카리스마에 감동받아서 시작되었지만.                 (P499-500)    

 

“삶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지.....” 안나는 자기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가 큰 상실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하지. 힘 내, 삶은 계속돼. 그건 상투적인 말이지만, 씁쓸한 만고의 진리이기도 해. 우리의 도시들은 돌무더기 속에 파묻혔고, 우리의 군인들은 죽거나 불구가 되고, 환상에서 깨어났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량 학살이라는 집단적인 죄를 저질렀어.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산했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계속되더라. 나는 공부, 내 일에 뛰어 들었어.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러 갔지. 오 하느님.....”

그녀는 벌컥벌컥 한 번에 잔을 비우고 나서, 혼자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재건은 일종의 거대한 작업요법이었어.”

로테는 멍하니 자기 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울한 평화에 대한 기억들이 서서히 지나갔다. 그녀는 그때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때가 더욱더 생각났다.                  (P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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