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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5. 2024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

영화 <룸 넥스트 도어>  2024년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및 각본, 줄리앤 무어, 틸다 스윈튼 주연의 미국-스페인 2024년작 합작 영화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이자 미국의 소설가 시그리드 누네즈가 쓴 소설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우리 세계와 우리 문명이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온갖 힘들로 그것을 막아 세워 더 이상 버틸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이 인간 최대 적이라, 인류를 몇 번이라도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병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이나 허무주의자, 양심이나 공감 능력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의 손안에 들어가도록 방치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P15-16)     


자기돌봄, 일상의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 궁극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사회자체를 구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졌지요. 마음챙김을 향한 열광 역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또 다른 수단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마음챙김 명상은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타이태닉호를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시기적절한 행동은 내면의 평화를 얻으려는 개인의 노력도 아니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임박한 파멸에 대한 광적이면서 과도한 집단적 집착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P22)    

 

제 말은 수 세대 동안 인류가 해왔던 식의 가족계획이라는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 아이들이 사는 동안 지구가 전혀 살수 없는 곳이 되진 않더라도,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 세상으로 한 인간을 불러내는 일이 어쩌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 위험이 전혀 안 보인다는 듯이,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듯이 행동하는 일이 이기적이진 않은지, 어쩌면 심지어 비도덕적이고 잔인하진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게다가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는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절박하게 바라는 아이들이 이미 수없이 많지 않나요? 지금 수백만, 수천만 명이 온갖 인도주의적 위기로 고통받는데, 다른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아버리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미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곁의 하고많은 사람들에게는 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나요? (P23)    

 

내게 괴로웠던 일은 훨씬 늙어버린 그를 보는 것이었다. 잘 생긴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랑했던 사람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P38)     

기도란 무엇인가. 신은 과연 듣고 있기나 한가. 감독은 관객/훔쳐보는 자가 이 두 질문을 곱씹기를 바랐다. 극장을 나서는 내 머릿속엔 잘 알려진 고무적 격언이 떠올랐다. 친절하라.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흔히 플라톤의 말이라고들 한다. (P59)   

  

죽음에 대해서 그렇듯이 대부분은 나이 듦도 부인하니까. 주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도,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지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나로선 그것이 축복이라고 늘 생각했다. 나이 드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고 고통스러운지 다 아는 젊음은 전혀 젊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P65~66)     

인도 북동부 지역의 보도(Bodo)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인 보도어에는, 서로를 향해 품고 있던 사랑이 지속되지 못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사무치는 감정을 나타내는 ‘온스라(onsra)’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뜻을 그대로 옮길 영어 단어가 없었기에 ‘마지막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어 사용자 대부분은 ‘마지막 사랑’을 마침내 만나게 된 진정한 사랑, 영원히 지속될 사랑으로 이해할 것이다. 캐럴 킹의 노래 <마지막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 온스라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을 때 난 그 뜻이 완전히 다른 의미라고 보았다. 너무나 압도적인 사랑, 너무나 강렬하고 깊은 사랑을 경험하여 이후로 결코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뜻한다고. (P82) 

    

잘 죽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아. 고통 없이, 아니면 적어도 극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치지 않는 것. 침착하게 약간의 품위를 지키며 가는 거지. 깔끔하고 산뜻하게.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 사실 자주 있지 않아, 왜 그럴까? 그게 왜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P89)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untold)’은 그런 면에서 좋은 단어이다. 물론 이야기하거나 서술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또한 너무 버거워서 말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 고통. (P115)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P122)     


다들 그런 식이야. 친구가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기를 바라는 거지. 암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배워왔으니까. 환자와 질병의 싸움이다. 곧 선과 악의 싸움이다. 행동에도 옳은 방식이 있고 그른 방식이 있다. 강한 대응과 나약한 대응. 투사의 방식과 포기자의 방식. 이기고 살아남으면 영웅이 돼. 지면, 글쎄, 아마 온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은 거겠지. 고약한 멍청이 의사들이 내린 사형선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덕에 수년을 더 살 수 있었던 이런저런 사람들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넌 믿을 수도 없을 거야. 사람들은 말기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 친구가 말한다. 불치라거나 수술 불가능이라는 말도 그렇고. 그런 건 패배주의적 말이라는 거야. 살아 버티는 한 가능성은 있다 같은 정신 나간 얘기를 해. 의술의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는 말도. 매일 찾아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면, 누가 알겠느냐, 치료법이 나올지. 이런 말도 하지. 교육받았다는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들 암의 치료법이 금방이라도 나올 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P131)     


사람들이 이 병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웅 서사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나봐. 생존자는 영웅이다. 도대체 왜 암이 한 사람의 패기를 판단하는 일종의 시험이 되어야 하는 거지? 그런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할 수도 없어. 지금까지 들은 말 가운데 진부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말이 없었어. 그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소셜 미디어도 그만뒀어. 암 환자 지원 공동체가 정말 최악이야. 암을 선물이자 정신적 성숙의 기회, 자기 자신도 몰랐던 자질을 발달시킬 기회로 생각하라. 최고의 자아에 이르는 여정의 한 단계로 생각해라. 진짜라니까.  (P132)     


모험? 모험이라면, 우리는 서로 다른 두 모험에 나선 것이었다. 친구의 모험은 나의 모험과 완전히 달랐고, 앞으로 아무리 함께 생활을 한다 해도 우리는 다분히 혼자일 터였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적어도 둘이 있지만, 떠날 때는 오로지 혼자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P149)     

누구나 항상 그렇듯 그도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식적인 말. 하지만 그의 탓이 아니다. 우리 언어가 거칠고, 속 비고, 말라비틀어져서, 감정 앞에서 언제나 어리석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니까. (P164~165)     


내가 피트니스 클럽을 나설 때 그가 말했다. 그런 일을 겪고 있다니 정말 힘드시겠어요. 자기관리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눈을 치켜뜨는 게 보일까 봐 난 눈을 감았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미안해요. 그가 내게로 뛰어와서 말했다. 이렇게 가시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더니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나를 따뜻하게 꼭 안아주었다. 

집으로 오면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 모습을 상상했지만, 곧 그럴 수 없겠다고 깨달았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P166~167)     


다들 어떻게 해나가는 걸까. 수년 동안 한집에서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혹은 감히 같다고 믿는) 미래의 계획을 세우며 삶을 함께한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고는 어떤 일도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지점에 이르고-- 

“사진 있어?”

--그리고 믿을 수 없지만 바로 그 생애에 (결국 얼마나 짧은지) 상대방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조차 전혀 모르게 되는 날이 온다.

“물론이지. 하지만 정말로 보고 싶은 거 아니잖아. 예의상 하는 말이지.” (P172)

     

피자집 창문 안쪽 그의 모습을 보았다. 순식간에 정열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그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서 있었지만, 그는 전화를 붙들고 뭘 하느라 너무 바쁘다. 내가 쓰라리게 한탄하게 되었다시피 ‘잃어버린 시절’. 식당의 다른 손님들이 왜 저러나 힐끗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안을 들여다보면서, 왜 이 정도 감정뿐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한때는 전부이던 것이 있었는데, 왜 이제는 그 무엇도 그럴 수 없는지. (P173)  

   

인간의 재생산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신념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사실 고대부터 있었다. 삶은 고행이고, 탄생함으로써 죽음이 생겨나고, 결정권이 전혀 없는 존재를 이 세상에 내놓는 일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반출생주의 철학의 주장이다. 그 삶이 한 개인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한다. 아예 태어나지 않으면 삶의 즐거움을 놓칠 일도 없으니, 일단 태어나면 노화나 질병이나 죽음의 고통 같은 수많은 육체적, 정서적 고통을 견디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앞으로 고통이 대단히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한들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고통을 정당화할 수 없다. 현대의 주요한 반출생주의자에 따르면 어쨌든 더 행복한 미래란 환상일 뿐이다. 인간 본성이 주된 문제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인간 종이 아예 달라져야 한다. 인간이란 배울 줄을 모른다. 같은 실수를 거듭거듭 저지른다.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용인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지금 겪는 바를 굳이 겪으라고 하는 건 용인할 수 없는 일이죠. 그들 편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고요.”

본인은 자식이 있느냐는 질문에 반출생주의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P183-184) 

    

포크너는 당대의 젊은 작가를 얼마나 심하게 꾸짖었는지. 마치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종말을 바라보듯이 글을 쓴다고.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고.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두려워서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두려움. 폭파된다는 두려움. 하지만 작가라면 그러한 두려움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1950년, 그날, 스톡홀름에서 포크너가 요구했던 건 용맹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오랜 보편적 진리ㅡ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없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포크너는 경고했다. (P202) 

    

만사가 끔찍하고 미래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면 세상을 뜨기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내가 사라진 이후,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운 세상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어. 그마저 빼앗기면 위안이라고는 없는 거지. (P202~203)

     

금빛 시간, 마법의 시간, 뢰르 블뢰. 변화하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며 우리 둘 다 가만히 몽롱함에 잠기는 저녁 시간. 비스듬히 떨어지는 해의 빛이 잔디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우리 발에 닿는가 싶더니, 느리고 긴 축복처럼 우리 몸을 타고 올라오면, 만사가 아무 문제 없다고 당장이라도 믿을 수 있을 심정이었다. 달을 보라. 별을 세어보라. 거기 당신은 없는 모든 시간이.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세상이 한없이. (조이스.)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운. 다 괜찮을 거야. (P207)

     

그래도 내겐 그말이 들렸다. 난 강해지고 싶었어. 내가 알아서 제어하길 바랐어.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

주변이 평온하고 질서 정연하기를 바랐을 뿐인데. 

차분하고 말끔하고 품위 있고, 심지어 —안 될 게 뭐야?— 아름다운 죽음.

내가 생각한 건 그것이었는데.

어느 멋진 여름 밤, 풍광 좋은 마을의 훌륭한 집에서 맞는 아름다운 죽음.

그것이 친구가 스스로 마련한 끝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물론 내 잘못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게 오롯이 잘못이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을까?

거기 앉아 친구를 위로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내려 했다. 호스트에게 뭐라고 설명하지? 끔찍이도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한시도 미룰 수 없었다. 그들이 보험회사에 즉각 연락해야 할 테니까. (P211)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P213)     


내가 쓰려고 했던 일기, 친구의 마지막 날들의 기록 —그건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작은 했지만, 매번 바로 멈춰버렸다. 몇 쪽을 쓰긴 했지만 저장하지도 않았다. 결국 글로 쓴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배신행위로 느껴졌다. 친구의 사생활에 대한 배신행위가 아니라 경험 그 자체에 대한 배신행위. 내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어는 전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결코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겨우 무언가 묘사해내더라도 기껏해야 결국 실재의 옆자리를 차지할 뿐임을, 문을 열면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나가버리는 고양이처럼, 실재 자체는 어느새 나를 지나쳐 빠져나가버릴 것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알았다.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과 관련해 그럴듯한 이야기야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그런 단어들은 절대 찾아낼 수 없다. 놓아야 할 곳에 차례로 단어를 내려놓지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차례로라니, 아니, 그건 전혀 맞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언어로 담아보려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발레를 하는 꼴이다.  (P217~218)     

전 애인에 따르면 이것으로 인간 고통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농담이라고 여기겠지만, 그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러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언어를 지녔으므로 그 뜻이 저 자신에게는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미소를 띠며, 떠보듯이, 기대하면서, 내가 물었다. 우리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그저 미소만 보였다. 하지만 몇 년 후, 쓰라린 헤어짐의 순간에 쓰라린 대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그렇지. (P220)     


이 모든 일(이 모든 일: 가차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그것)이 먼 과거의 기억이 됐을 때는 과연 어떨지 알고 싶다. 더없이 강렬한 경험이 결국엔 얼마나 자주 꿈과 비슷해지는지, 난 늘 그것이 싫었다. 과거를 보는 우리의 시야를 온통 지저분하게 뭉개놓는 그 초현실적 오염 말이다. 실제 일어난 그토록 많은 일이 어째서 진짜로 일어나지 않은 듯이 느껴지는 걸까? 인생은 한갓 꿈일 뿐. 생각해보라. 그보다 더 잔인한 관념이 과연 있을 수 있나?

기억.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고, 그레이엄 그린은 생각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P239)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P251)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실패한하 한들 무슨 상관인가.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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