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기완> 2023년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기도 했다.
브뤼쎌 시내지도를 펼쳐들고 내가 서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찾아본다.
‘Gare du Nord'
지도를 보고 나서야 나는 프렁스어 ‘nord'가 ’북쪽‘이라는 의미이고 ’gare'가 ‘역’을 가리키는 명사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오래전 나는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소설을 원서로 읽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프랑스어를 1년 정도 독학한 적이 있다.
지도를 착착 접어 옆구리에 끼운 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 유로라인 버스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정류장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브뤼쎌 북역을 통과하는 바람은 차다. 머리칼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자꾸만 헝클어진다. 버스가 그려진, 삐딱하게 서 있는 정류장 알림판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벨기에와 브뤼쎌을 반복해서 중얼거려본다. (P7-8)
그가 버스를 탄 건, 기차보다는 버스가 여권 검사에 소홀하다며 버스 티켓을 끊어준 브로커 덕분이었다. 그의 모습을 나는 상상의 영역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커다란 천가방을 메고 허름한 청바지에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다. 색이 바랜 갈색 모자를 썼고 유리가 금간 시계를 찼다. 보풀이 인 장갑, 목을 칭칭 감은 촌스러운 색의 목도리, 실밥이 터지고 때가 탄 운동화.... 버스에서 내린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그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두려움으로 흐려지곤 했을 것이다. 바쁘게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어깨라도 한번 치고 지나가면 순간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할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리라. 그의 성은 로, 이름은 기완, 스무살. 159센티미터의 단신, 47킬로그램의 마른 몸. 영어뿐 아니라 벨기에의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도 습득하지 못한 채 멀고 먼 가난한 나라를 혼자 떠나온 사람. 벨, 기, 에, 브, 뤼, 쎌, 벨, 기, 에, 브, 뤼, 쎌..... 아무리 발음해보아도 여전히 입에 선 이 이름들을 끊임없이 혀 안쪽에서 부드럽게 굴려가며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인 로기완은 남쪽을 향해 한발을 깊이 내디뎠다. (P9)
이니셜 L처럼.
나를 브뤼쎌로 이끈 것은 바로 그 이니셜 L의 문장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니셜 L이 시사주간지 “H"와의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고백한 한 줄의 문장이 나로 하여금 익숙했던 세계를 떠나오게 하였다.
각종 시사잡지를 읽고 관심 가는 기사를 스크랩하는 것은 나에겐 일의 연장이었다. 나중에라도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쏘스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서점에 들러 여러 시사잡지를 사와서는 밤늦게까지 뒤적이곤 했다. 그날도 서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보지도 않을 텔레비전을 켜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 시사주간지 “H"를 건성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주, “H"가 마련한 국제란 특별기사는 벨기에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탈북인들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는 두 명의 탈북인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기자가 2년여 전에 취재했다던 L이라는 사람의 사연은 한참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그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 파일에 넣은 후에도 그 문장은 여전히 내 손 끝에 남아 나를 불편하게 했다. (P10-11)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은 그의 피로하고 괴로운 듯한 얼굴을 벗어나 조금은 어두침침한 편집실 전체로 나아갔고, 이내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우리의 친밀했던 숨소리와 목소리까지 담아냈다. 순간, 모든 것을 화면처럼 남게 하는 인간의 기억 구조가 싫어졌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잊고 싶은 것과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볼륨을 줄여놓고도 고스란히 소리까지 재생되고 마는 그 체계적인 기억의 구조가, 이제 그와 업무적인 관계로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그를 기억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웃게 했던 그의 얼굴뿐 아니라 우리의 마지막 편집실과 그 순간의 불편했던 분위기, 그리고 쓸데없이 예민하게 듣고 있어야 했던 각종 편집 싸운드까지 연이어 떠올리게 될 터였다.
내 시선이 불편했는지 그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브뤼쎌에 갈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무언가에 떠밀리듯 나는 말해버렸다.
--브뤼쎌이라면, 벨기에 수도 말이에요?--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P13)
브뤼쎌에 거주하고 있는 “H"의 객원기자는 선뜻 약속장소에 나와주었고 바로 그 다음날 나를 한국 식당으로 데려가 한인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기자가 이메일에서 밝힌, L을 잘 알고 있다는 그 한인이었다.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기품과 자존심을 지키며 고집스럽게 늙어왔다는 인상을 주었다. 쓸데없는 감정적인 소모나 의도하지 않은 상처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해방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테의 두꺼운 안경 너머 눈동자는 고독해 보였다. 그는 내게, 안타깝게도 그 탈북인은 1년여 전 브뤼쎌을 떠났고 현재는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안타깝게도,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지금 당장 그 탈북인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판단할 수 없어 호칭은 생략한 채였다. 기자는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으나 어쩐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호칭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P20)
로가 이 방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북쪽을 향해 큰절을 올린 것이다. 어머니를 향한 인사였다. 방향감각이 없는 나는 북쪽을 찾지 못한다. 그 대신 핸드백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다. 로가 이 방에 들어와서 두 번째로 한 일이었다. 창을 열고 백화점의 주차장 건물을 건너다보며 조급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로는 떠나온 곳에 대해 생각했다.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있었고 학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관습이 있었으며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살아가야 함을 말없이 일깨워준 어머니가 있었던 세계, 바로 로의 고향.
로의 일기에는 고향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로가 태어나서 자란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는 훗날 그가 난민 신청국 심문실에서 직접 작성한 자술서에만 나와 있을 뿐이다. 나는 로기완이라 불리며 1987년 5월 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A4 용지 다섯장 분량의 자술서는 절반 정도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로가 다섯 살 때 탄광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로의 아버지는 제3작업반에서, 로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는 제5작업반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나는 그 자술서를 통해 알게 됐다. 1965년 11월 23일 함경북도 온성군 제5작업반에서 태어나 2007년 9월 11일 중국 연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외과병동에서 사망한 최영애가 바로 로의 모친이었다. 몇 장의 종이에 기록된 그녀의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왔다.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셔본다. 지금 이순간 나 하나 정도 이 세상에서 조용히 소멸한대도 누구 하나 가슴치며 아파하지 않을 거라는 아픈 상념이 매운 연기 속으로 스며든다. (P36-37)
제이는 연민이란 자신의 현재를 위로받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는, 철저하게 자기만족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았다. 시청자들은 전화를 걸어 천원을 지불하며 자신의 나쁘지 않은 현실을 새삼 깨닫고 일주일 분의 상대적인 만족감을 사는 거라고. 언젠가 술에 취해 비꼬듯 말한 적도 있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화면 속 당신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내 삶이 그만큼 처절하게 비극적일 때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순간, 나 역시 불우한 땅을 딛고 있는 가엾은 존재가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물론, 재이를 만난 이후부터 갖게 된 생각이었다. (P52-53)
몇몇 남자들은 원색의 글씨가 씌어진 피켓이나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 게다가 경찰들은 인도에 서서 무전기로 교신을 하거나 가슴에 야광띠를 엑스자로 맨 채 차들의 진로를 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로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정부에 반대의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즐겁고 유쾌하고 흥겨운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입을 맞추면서 정부의 어떤 정책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
그곳은, 정말 지옥이었던가.
멈춰선 채 가두행진을 하는 시위대를 눈으로만 좇아가며 로는 언젠가 연길의 한인교회에서 들었던 목사의 설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연길에서 로의 어머니는 열심히 한인교회에 다녔다. 진정으로 교회가 약속하는 구원을 믿었다기보다는 어디든 기대고 싶은 뿌리뽑힌 자의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길에서 만난 남쪽 선교사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남한으로 가 진정한 자유를 찾으라는 그들의 언어는 달콤하고 현란했지만 구체적인 약속을 해준 적은 없었다. 남한 교회를 돌며 최대한 비극적인 언어로 북의 현실을 고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과정을 간증해주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해주겠다고 단언하다가도 로가 용기를 내어 다가가면 한발 뒤로 물러서며 자신들의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로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예배에 참여하긴 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진 않았고 오히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로는 신을 믿지 않았고, 사람들이 굶어주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무력한 신이라면 더더욱 믿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아예 발을 끊게 된 건, 예배중 목사가 북조선은 생지옥이므로 하루 빨리 북조선의 길 잃은 양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로는 자신의 조국이 가난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곳이 지옥이라고는 단 한번도 여기지 않았다. 대체 지옥이란 무엇인가 말인가, 로는 궁금했다. 가난이 지옥이라면 자본주의에도 지옥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자본주의 국가는 일부만이 그 지옥을 경험하지만, 자신의 조국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절박한 지옥을, 너무도 조직적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뿐, 그뿐이라고 로는 생각했다. 국가가 부강하여 뭐든 줄 것이 있었다면 기꺼이 베풀었을 거라는 믿음이 로에겐 있었다. 로는 나눌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던 자신의 조국을 생지옥으로 규정하는, 줄 것이 있음에도 줘야 하는 순간에는 망설이고 도망가는 자들이 경멸스러웠다. (P73-74)
정보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다른 국가와 비교하여 자국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눈앞의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컸기에 그런 식의 해석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로가 살던 세선리에도 가난의 풍경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마을 부근의 산속 나무들은 껍질이 벗겨진 채 비루하게 서 있거나 그나마도 연료용으로 잘려나가기 바빴고, 먹을 수 있는 풀은 자라기가 무섭게 뽑혀갔다. 집안의 생필품을 장마당에 내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로 뛰쳐나와 반국가적인 구호를 외치거나 선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차질 없이 적당한 양의 배급을 받았고 학교에는 늘 학용품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명절에는 새 옷도 입을 수 있었던 오래전의 소박한 풍요가 어서 빨리 다시 오기만 숨죽여 기다렸을 뿐이다. 로가 그날 거리의 시위대를 건너다보며 괴로워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기다림의 시간을 그 누고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발견한 뒤늦은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 것도, 중국에서 공안의 눈을 피해 골방에만 갇혀 있다시피 살았던 것이나 어머니를 잃고 그 돈으로 이름도 몰랐던 벨기에라는 나라에 오게 된 것 역시, 그 모든 것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그 기다림의 시간 때문일 거라는 차가운 분노, 살기 위하여 살아왔을 뿐인데 고향을 떠나온 순간부터 쫓기고 숨어야 하는 범법자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한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었던 것까지 송두리째 잃어야 했던 그 불가해한 시간들을 고는 입술을 깨물며 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다림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모이고 모여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어질 때까지 체제 안의 사람들도, 바깥의 구경꾼들도 똑같이 침묵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운 마음 하나만으로 고향을 추억하는 달콤한 시간은 자기 삶에 없을 것임을 로는 깨달았다.
로는 다시 걸었다. (P75-76)
--벨기에로 가시오.
어느새 다시 나타난 브로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보통 때처럼 일행을 떠나보내자마자 예약해놓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홀가분하게 중국행 비행기를 타려 했던 브로커는 무슨 생각에선지 걸음을 돌려 로에게 다가가 그렇게 말했다. 브로커에겐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벨기에? 로가 그렇게 되묻자 브로커는 벨기에는 작은 나라지만 국제조직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진 않을 거라고. 또한 복지가 잘되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난민 신청도 수월할 거라고 일러준다. 벨기에는 로가 염두에 두고 있던 목적지와는 달랐지만 브로커의 말을 들은 로는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브로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여행책자를 꺼내 주 벨기에 한국 대사관의 주소를 적어준다. 브로커가 적어내려가는 메모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로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을 것이다. 브로커는 버스로 국경을 넘을 때에는 여권 검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공항 근처의 유로라인 사무실에서 브뤼쎌행 버스 티켓도 끊어준다. 브뤼쎌이 벨기에의 수도라는 것과 벨기에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주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 브로커는 찬찬히 설명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로가 몇 번이나 감사의 뜻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브로커는 덤덤하게 말한다.
--살아남으시오.
브로커는 이어 말한다.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보지 않겠소. (P84-85)
그애가 자주 나 자신처럼 여겨졌던 것도, 어쩌면 그애의 그런 무모할 정도의 인내와 자신에 대한 냉정한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사춘기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다. 재이 앞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운다는 건 자신의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행위라고 쓴 바 있다. 그 철학자의 명제를 사랑뿐 아니라 관계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면, 나는 내 고통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내가 취하게 될 자세와 그 자세에 맞게 조율될 마음까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므로 나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던 것이리라. 진심, 진짜, 진실. 어쩌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그리고 윤주나 재이 역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로가 한참을 기대어 울다 간 그 담벼락의 구체적인 위치를 사실 나는 알지 못한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래오래 걸었지만 로의 환영은 손 끝에 닿지 않는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지면서 나는 스르르 주저앉는다. 이쯤에서 나도 그만 울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가족이나 동료들이 동참할 수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그 누구의 따뜻한 위로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마음의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P93)
어머니의 시신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 돈이면 유럽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어차피 어머니의 시신은 중국 당국에 의해 처리될 것이고, 그 과정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도 했다. 로는 놀라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고 악의적인 술수인 듯했다. 네가 살아남는 것, 그것이 네 어머니도 사는 길이다. 친천ㄱ은 로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패 하나를 던졌다. 로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일주일 후 4,000달러가 로에게 왔다. 로는 어머니가 다니던 한인 교회를 찾아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추위에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덜덜 떨면서 선교사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나타나자 십일조를 내고 추모예배를 부탁했다. 비행기 티켓과 남한 국적의 위조 여권이 포함된 브로커 비용은 2,800달러였다. 여행용 가방과 편한 신발, 목도리와 장갑을 사는 데도 약간의 돈을 써야 했다. 남은 돈과 친척이 보태준 돈을 유로로 환전하니 650유로가 로의 손안에 들어왔다. 로는 방수포를 구해와 그 돈을 몇 번이나 쌌다. 비에도, 땀에도, 눈물에도 젖지 않게 하리라. 구르는 돌에도, 나뭇잎 사이로 흘러가는 무심한 구름에도 상처받지 않게 하리라, 보호해주리라. 베를린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로는 단 한번도 그 방수포를 풀지 않았다.
로도 알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시신을 내준 댓가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뼈를 녹이는 듯한 후회와 고통으로 견뎌내야 할지에 대해. 후회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고 고통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한참을 달려왔다 믿어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의 선택에 대해 준엄한 질문을 던질 것이며, 로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언제까지고 자기모욕적인 언어로 얼룩져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로의 시간이 궁금하다. (P122-124)
그러나 내가 지금 알 수 잇는 것은 없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누군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몰랐으며 항상 너무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서 고조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삶 속으로 유입되어 그들의 깨어 있는 시간을 아프게 점령하는 것인지, 나는 영원히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위로나 체온도 없이 가까스로 그 시간을 지나온 후에야 조금은 지친 모습으로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로가 인터뷰 도중에 기자에게 한 말이었다. (P124)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이어 말한다. 박은 심각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외로 숙인다. 한참 후 박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지는 것이 가능하냐고 다시 묻는다. 나는 경직된 말투로, 5년 전의 그 간암 말기 환자가 지금도 그렇게 자주 생각나는 것은 자신이 그 환자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고 따지듯이 되묻는다.
“아니, 김작가가 틀렸소. 안락사라고 해서 무턱대고 환자의 몸에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아니오. 마지막 결정은 환자가 하는 겁니다. 환자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나의 경우엔 환자가 혼자 누워 있는 방에 약물과 술을 섞은 컵을 갖다놓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컵을 들어 그 약물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 하는 결정에 의사로서의 나는 개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개입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개입하지 않았소.”
“하지만 그 컵을 갖다주었기 때문에 그 환자는 자신의 선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거겠죠.”
“죽음 앞에서 당사자의 의지보다 더 결정적인 건 없어요.” (P125-126)
내무부 직원들을 따라 고아원을 떠난 로는 그들의 도움으로 내무부 내 외국인 사무국에서 난민 신청서를 제출한다. 사진 촬영과 지문 채취, 간단한 신체검사 같은 여러 절차를 마친 후엔 브뤼쎌 내 월유에 쌩삐에르에 있는 수용소에 임시로 머물게 된다. 이 수용소에 머물던 로가 외국인 사무국으로부터 면담에 응하라는 호출장을 받은 것은 나흘 후였다.
벨기에의 난민 신청국 심문실, 바로 이곳에서 로는 박을 처음 만난다. 오디시옹(audition)이라 불리는 이 첫 번째 면담은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그 자리에는 박뿐 아니라 내무부 직원 두 명도 동석해 있었다. 주로 직원들이 질문을 했고 로는 대답했으며 박이 그 사이에서 그들의 질문과 대답을 통역했다. 하지만 그 만남에서 박이 단순히 통역자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 박은 로의 말투, 사용하는 어휘, 북한에 대한 지식 등을 꼼꼼하게 검열하는 검사관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면담 내용을 바탕으로 로가 진짜 북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내무부 직원들이지만 그들의 판단에 박의 의견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P145-146)
이니셜 L. 아니 로기완을 만나러 가는 데 꼭 필요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열쇠일 것이다.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박의 지갑에서 나온 그 작은 메모지에 감히 손을 대지는 못한 채 다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박은 설명한다.
“기완이가 영국에서 일하고 있는 중국 레스또랑 주소와 약도요. 라이카는 필리핀 아가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더군. 브뤼쎌에서처럼 말입니다. 필요하지 않소?”
“그 사람을 만나보라는 강요 같군요,”
“늙은이는 강요 같은 거 안합니다.”
자신이 늙음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박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순간적으로 나는 웃고 만다. 박은 웃지 않는다.
“그런데 이거, 조금 늦게 알려주시는 건 아닌가요?”
“가만히 김작가를 보니 기완이를 만나는 것 자체보다 그 만남을 준비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 같았소.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거요. 내가 틀린 겁니까?”
“..........”
지금 박은 만나는 과정 자체가 만남에 포함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어쨌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브뤼쎌에 와서 로의 자술서와 일기를 읽고 그가 머물거나 스쳐갔던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로기완은 이미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이제 나는 로에게도 나를, 그 자신이 개입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로기완이 내 삶으로 걸어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P171-172)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느 순간 로기완은 조금 전처럼 또 한번 환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커다란 앞치마에 반죽이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 활짝 문을 열어준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한다. 나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가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언뜻 박의 이름을 듣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로기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덥석 내 손을 잡아준다.
체온이 있는, 진짜 두 손으로.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홀 안쪽에서 앳된 인상의 여자가 삐죽 고개를 내밀더니 금세 달려와 나를 빈 테이블로 안내한다.
라이카는 차를 준비하러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지금 내 앞에는 로기완이 앉아 있다. 살아 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쉬는 사람.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