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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hna Apr 13. 2020

부모가 되면, 꼰대가 된다

육아수학교육 에세이, 점박이 01편

내가 아빠가 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드라마나 소설 같은 창작물에서는 어떤 캐릭터가 스스로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책임감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행복에 휩싸이거나 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음, 내가 아빠인가?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사실이 내게 불행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헤헤헤 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던가. 어쨌든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냥 새로운 손님이 하나 찾아오는 느낌.


나는 그때까지 매우 오만하게도,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내가 공부하고 이루어 왔던 모든 가치들을 사랑했었다. 만화와 애니를 통하여 독자적으로 익혔던 일본어, 그에 따라 익히게 된 언어학적 지식, 군대에서 병사와 장교를 모두 겪었던 경험, 교육장교 실무를 통해 얻은 업무적인 능력, 택견을 익히면서 얻은 몸을 쓰는 능력, 요가를 배우면서 얻은 철학, 그리고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등등.


그때 나는 그것이 내게 큰 가치라고 여겼고, 그것을 새로 태어날 아이가 일부라도 배울 수 있다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질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고민했었다. 뭐, 나만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그런데 한동안 이런 고민을 하고 난 후, 난 내 아이를 잘 교육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내 인생을 스스로 반추하면서 깨달은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어렸을 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는 못 하였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어느 정도 경제적인 형편이 피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돈을 버느라 바쁘셨다. 우리 집은 불고기 식당을 했었는데, 집과 식당의 구분이 없어서 손님들이 식사를 모두 끝내고 가면, 그 방에서 밤늦게 이불을 펴고 자고 학교에 갔다.


그런 이유로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것은 일요일 아침식사 뿐이었고, 이 식사시간을 나는 매우 싫어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렸을 때 고기를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 고기를 싫어했는데, 우리 집이 불고기집이라 식단에 고기가 자주 올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해는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고, 고기반찬은 그렇게 자주 먹을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고기를 먹으면 토했으니까. 나의 아버지는 내 그런 꼴을 보는 걸 매우 싫어하셔서 일요일 아침에 나는 항상 혼이 났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던 건 아닌데, 그저 그때는 모두가 바빠서 어린 나를 안아줄 사람이 없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으며, 외가 쪽은 너무나 멀리 있어서 1년에 한번 볼까말까 했었으니까, 보통 아이들이 무조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고 하는 존재도 내겐 없었다. 아, 나의 아버지는 내가 생각해도 그 당시에 조금 철이 없으시긴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의지하는 걸 잘 하지 못 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고,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왠만하면 다 구입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뭐 밥 먹으면서도 책 바닥에 놓고 밥과 반찬도 모두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읽었고, 길을 걸어다니면서 책을 읽다가 위에 걸려있는 입간판을 못 보고 머리에 부딪힌 적도 꽤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누가 내게 지금까지 몇권 정도 읽었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대충 2000권 정도 읽었던 것 같다고 대답하자 거짓말이라고 욕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대충 그 당시에 한달에 읽는 월간 잡지만 해도 5권 정도였고, 부모님이 사주신 소년소녀 명작소설 같은 것도 전질로 수백권 정도 있었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사서 보던 만화책도 꽤 많았기 때문에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엔 책을 그렇게 읽는 사람이 많이 없긴 했을 것 같다.


또한 우리 집은 어린아이가 크는데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꽤나 유명한 식당이었고, 손님들은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조금 함부로 하기도 했으며, 욕설과 술과 담배가 항상 내가 손을 뻗는 범위 내에 있었다. 집과 식당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온 후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는 저녁 6시부터 자기 전까지 집에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당연히 내 방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책상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 6시부터 자기 전까지, 그러니까 대충 밤 11시 정도까지 내 일과는 그냥 시내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어두워서 책을 읽으면서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그냥 하루에 서너시간을 꽤 넓은 범위의 시내를 돌아다녔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몇년간을. 그래도 다행인 건, 내 스스로는 그게 외롭다거나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자유롭고 행복했었다는 거?


나는 공부를 할 시간과 장소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등생이 될 수는 있었다. 5학년인가 무렵에 시험전날에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겠다고 손님방 하나를 나혼자 통채로 빌려서 작은 밥상 위에 양초를 켜고 냉수를 떠다놓고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은, 아마 그 당시에 인기있던 <전설의 고향> 이라는 드라마의 영향이었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내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내가 정서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을지언정, 그 혼자였던 경험들 때문에 나는 스스로 뭔가를 배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즉, 내가 이렇게 큰 데에는 주위 어른들의 노력도 중요했겠지만, 나 홀로 뭔가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는 거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냈던 내가, 내 아이를 가르칠 때는 중점적으로 필요한 것만 골라서 가르치겠다고? 나는 나 자신의 유년경험을 통해 그것이 실패할 확률이 큰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냥 애들은 혼자 크게 두어야 하는가. 그건 부모로서의 교육 책임을 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방치되다시피 해서 나름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방치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모두 다르니까 같은 환경이라도 다르게 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첫 아이를 맞이하면서, 내가 커왔던 경험을 그대로 아이에게 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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