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의 고통
누구에게 물어볼 데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독고다이로 일을 할 때가 오히려 마음은 더 편안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다가 아무래도 이렇게만 하면 일하는 시간에 비해 생산성이 낮은 것 같다는 자각이 생겼다. 조금 더 전투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회사에 가입하고 유료 어플을 깔고,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과 상관없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분기점으로 해서 하루 수입은 1.5배 내지는 2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차 끊기는 시간에 집착하면 어떤 날은 7시에 나왔는데 수입이 5만 원이 안 되는 날도 있다. 보통 가장의 수입으로써 아무리 겸손하게 잡아도 이건 아니다. 방법을 찾아야 하고 일을 더 해야 한다.
혼자서 독고다이로 일을 할 때는 정보의 부재와 무지의 불안도 있었지만 그 무지로 인한 편안함도 있었다. 회사가입을 하고 오픈채팅방에 들어간 후로 내가 가장 하수이고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일을 해왔으며 수입도 제일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할 때는 몰랐던 정보들을 오픈채팅방에 들어간 후로 많이 알게 되지만, 적응과 자각의 고통이 있다. 처음에 이 일을 할 때 가장 좋았던 점 중에 하나가, 일을 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서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없고 일 외의 시간에는 온전히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세로 일을 해서는 하수에서 탈출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제대로 일하고 좀 더 밀도 있게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콜지와 오지 파악도 며칠 따로 시간 내어 공부한다고 되는 정도가 아니다.
일체유심조
콜지를 잡고 가면서도 그곳이 좋은 곳인지 몰라서 불안해하면서 간다면, 차라리 오지를 가면서 그곳이 괜찮은 곳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낫다.
콜지에 가더라도 그것이 좋은 것인 줄 모르고 이미 불안해하고 있다면, 그 부분에서 이미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무지함 때문일 텐데, 행복해도 행복을 모르고 산다면 행복한 삶이 아니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오지에 가더라도, 희망을 갖고 간다면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게 본다. 어떤 이는 “저런 바보. 죽으러 가는지도 모르고.” 하고 생각하겠지만, 죽는다고 표현은 하지만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서 나오게 되어 있다.
일단은 가는 동안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고 행복할 것이다. 막상 가면 혹시 또 운 좋게 탈출 콜을 잡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든 다 탈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것도 아니고 며칠을 밤새며 가야 하는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지라고 말은 하고 산속에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밤에 동물들도 짖고 두렵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두려움일 뿐이다. 침착하게 두려움만 컨트롤한다면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고생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오지의 고생과 괴로움은 거의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에 팔 할 이상이 있다. 걱정과 두려움이 없다면 막상 겪어내는 하드웨어적인 고생은 대부분 다 할 만한 것들이고 별 거 아닌 일들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달려 있지 않은가.
괜히 콜지와 오지가 아니다
하지만, 일회성이나 이벤트성이 아니라면 횟수가 반복될수록, 결국은 확률에 수렴하게 돼있다. 오지는 그냥 오지가 아니고, 콜지는 괜히 콜지가 아니다. 희망을 품고 가도 그곳이 오지라면 다음 스텝은 꼬일 확률이 높고, 좋은 줄도 모르고 간다고 해도 그곳이 콜지라면 다음 콜을 잡기가 수월하다. 그런 것들을 판단하려면 알아야 하고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련한 기사와 하수 기사를 나누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이다.
또 이랬다 저랬다 횡설수설이로구나. 가장 바라고 이상적인 조합은 희망을 가지고 콜지로 가는 것이겠지.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원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가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계획과 예상은 어긋나게 돼 있고, 변수는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