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이끌림
예전에 딸이 유튜브에서 ‘액체 괴물’이라고도 하는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방송을 보는 걸 봤다. 어린이 유튜버가 나와서 슬라임을 이렇게 저렇게 주물럭거리는 영상과 소리가 내용의 전부였다. 도대체 이것을 왜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런 영상의 조회 수가 수백만이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른의 시선이고 딸은 아이의 시선이니 완전히 다른 것이구나.’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시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를 이해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어린이)들이 그것을 왜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니 그 친구가 나에게 섬광처럼 와닿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러면 너는 야동을 왜 보냐?”
그렇다. 사람들은 야동을 왜 보는가? 그 질문을 좀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성욕은 무엇이고 그것은 왜 생기는 것이냐?”이다. 그것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본능이다. 성욕. 이것처럼 설명이 필요가 없고 그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것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은 또 아니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고 때로는 없는 사람들도 있고 방향이 다른 사람들도 존재한다. 무성욕자는 사람들이 야동을 보고 섹스를 하는 이유를 이해를 못 할 것이고, 소성욕자는 마치 뇌를 장악하는 어떤 기생충에라도 지배당한 것처럼 끓어오르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는 과다 성욕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추잡스럽게 본다.
사람은 자기가 비슷하게라도 직접 경험해 본 데까지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욕이 활화산 같은 사람은 분출 후 짧은 시간 동안의 무욕망 상태(현자 타임)를 떠올려보면 그 상태가 내내 지속이 되는 사람들인 무성욕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이 다른 사람들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자고 일어나니 동성애가 세상의 99%이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하고, 이성애가 오히려 성소수자이고 박해받고 차별당하는 세상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그러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게 태어난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예전에 내가 생각해 놓은 영화 시나리오인데 이미 그런 영화가 유튜브에 있기는 하다. (한 발 늦었다!)
미술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나는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안 느껴지는 어떤 본능적 이끌림 같은 것을 누군가는 느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미술은 좀 더 복잡하다. 슬라임과 성욕은 그저 본능에 충실할 뿐이고 애써 그것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미술은 그런 ‘척’ 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