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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대하는 다양한 입장

by 김경섭

기적의 논리와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


나는 예술숭고주의 내지는 예술숭배주의스러운, 예술을 마치 종교처럼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포장과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나는 김을 작가가 이야기했던 ‘우계구화牛鷄拘畵 - 소와 닭과 개와 그림은 동급이다.’라는 말에 꽤 공감한다. 작품에 과한 가치를 부여하고 과대포장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작품을 무시하고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과하게 숭앙하는 듯한 분위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작가 본인이 ‘우주’, ‘세상만사’, ‘혼’ 등이 담겨있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 왠지 모르게 나는 약간 낯 뜨거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이 진지하게 칭찬을 하거나 배우가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서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관람자가 크게 감동을 받아서 그렇게 표현할 수는 있지만, 작가 본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조금은 시크하고 건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생각이다. 누구에게 부탁이나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도 때로는 (솔직히 자주) 내 작품에 대해서 과 몰입해서 남들 입장에서 오그라들 만한 진지한 이야기를 청승맞게 하곤 한다. 나도 그러면서 남들에게 뭐라 하는 천박한 내로남불도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어떤 예술가는 나름대로 초라하고 별 거 아닌 것 같은 작업을 하면서 말로는 우주를 만들어내고 예술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떤 예술가는 굉장히 집요하고 힘들고 육중한 작업을 하면서 예술은 별 것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 미술의 무게추가 말과 철학으로 이동했기에, 후자의 예술가들이 시대착오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더 우울해지고 잔인한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 같다.


아무튼 시간과 노력이 적게 들어간 작품일수록, 설명에 있어서는 우주의 논리를 끌어오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가 있다. 그것을 가지고 “한 것은 별로 없는데 참으로 입만 살아있구나!”하고 혹평을 하고 말장난이나 변명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작품을, 눈에 보이고 측정이 되는 형이하학적인 것들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유물론자들 입장에서는 거품 같은 말의 향연이라고 삐딱한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철학적인 사유에 가치를 더욱 두고 그런 것들에 더욱 감응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렇게 우주의 논리를 통찰의 깊이와 깨달음의 놀라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그런 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어떤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모두 다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각자가 무게를 두는 지점이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증명이 없다고 노력과 진정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질적인 증명은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누군가가 몸을 써서 일할 때 누군가는 머리를 써서 일을 한다. 재료가 다를 뿐이지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작품들도 쉽게 평가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눈에 보이는 기준들과 관점들의 비중이 작아지고 다른 기준들이 등장하고 혼란스럽고 어려워지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래도 나의 호불호는 명확하다. 그리고 손의 정성보다 혓바닥 길이로 하는 예술을 보면,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억지로 사과한 후 남는 왠지 모를 분함처럼, 결국 부아가 꿈틀거리는 나의 편협함을 자백한다. 그것은 노가다 작업을 하는 작가라면 어쩔수 없이 공감할 것이다.


어쩼든 나는 예술을 지금보다는 좀 더 만만하게 보고 쉽게 평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특히나, 한 것도 별로 없으면서 괜히 어렵게 말하는, 마치 사람보다 위에 있는 것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에 대해서 말이다.


무엇이든지 적절한 정도를 찾는 것이 결국의 포인트인데, 그 지점을 적절하게 찾기가 너무 어렵다면, 너무 어려워하고 과한 예의를 갖추는 것보다는 조금 더 무례하고 쉽게 생각해도 괜찮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적어도 예술에 있어서는 지금의 분위기는 전자 쪽으로 무게가 훨씬 쏠려 있으므로.


참 어렵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리스펙과 존중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게 너무 과해져서 어떤 예술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 버리는 것 같으니 또 좀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고, 또 너무 무례하거나 얼토당토않은 비판이라면 발끈해서 사양할 테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데, 일관성이 없다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절한 정도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까탈스럽게 군다고 궁시렁거리는 환청이 들린다. 어차피 결국에는 나의 기준일테니, 더 진지해지고 혀가 꼬이기 전에 이번 횡설수설은 여기까지.


현대미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


현대미술을 그저 쓰레기와 허튼짓으로 보는 극단적 부정론자와 거의 신앙처럼 맹신하듯이 떠받치는 극단적 긍정론자를 양 끝으로 하는 스펙트럼 사이에 여러 단계와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정치에서 정파적 성향을 갖는 것과도 비슷하다. 민주당과 보수당을 양 쪽 끝으로 설정하자면(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설정하자면 말이다.) 둘 중에 어디 한 군데에 발을 담거나, 중간 지대인 부동층에 머물거나, 관심이 없거나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일단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 정파성을 가지고 사안을 보게 된다. 민주당에서 하는 일이 모두 잘한 일일 수 없고 또한 모두 잘못한 일일 수도 없다. 보수당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일단 민주당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일단 무조건 감싸는 시선으로 보고 보수당 일은 무조건 의심과 부정의 시선으로 본다. 보수당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부정론자 입장을 선택하면, 일단 고까운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십상이고 긍정론자 입장을 선택하면 일단 믿고 따르는 시선으로 접근한다. 건별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겠지만, 그러기엔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들어가고 에너지 소모도 크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평화를 위해 기계적으로 중간 지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했을 때, 한쪽이 더 합리적이고 맞는 생각이고 한쪽은 편견에 독선적인 것 같다면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이쪽이 맞는 것 같고 어떤 부분은 저쪽이 맞는 것 같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결국 절대선이나 절대진리, 절대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미술 부정론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그냥 보수적 꼰대 마인드로 치부하기에는 진실을 꿰뚫고 있는 부분들이 있고, 현대미술 긍정론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허영과 잘난 척으로만 보기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대해서, 자신은 노력해 봐도 현대미술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자책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대부분 작품들이 그러하다. 사람의 반응은 다양한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저 나 또는 그와, 작품의 접촉면이 안 맞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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