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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Apr 19. 2024

뭐를 추구하는 건데?

미술이 추구하는 것은 숭고의 감정이다


인간은 모르는 것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도무지 왜 대단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는 어려운 미술이 존재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그것을 간파하고 그런 심리를 이용하는 자들이 사이비 종교 장사꾼들과 일부 예술가들이다.


그것의 원천은 칸트, 에드먼드 버크, 프리드리히 실러가 말했던 ‘숭고 sublime’라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폭풍우 속에서 거대한 파도에 휩싸인 바다, 밑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절벽,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광활한 자연환경이나 압도적 스케일과 권위가 느껴지는 종교 건축물 등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며 숭배감과 경외감이 생기는 그런 기분. 두려움과 왠지 모를 쾌감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정신 상태.


그런데 정말 초월적이고 광망하고 무지막지한 것으로부터 느꼈던 그 감정을, 몇 가지의 상황만 세팅하고 분위기만 조성하면 아주 어처구니없는 허술한 방법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비슷한 감정을 갖게 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 눈치를 보고 남들 다 느낀다는데 자기만 못 느끼는 것 같은 그 불안감과 소외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해가 안 가고 불안한 상황에서 느꼈던 어떤 결과적 감정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와 동경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일식·월식이나 태풍·가뭄 등 자연 현상의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니 신화적 주술적 종교적인 믿음에 지배당했었다. 과학이 발달하고 많은 원인들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본질적이고 그리고 영원히 풀지 못할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것들은 끝내 풀 수가 없는 범접하기 힘든 저 너머의 것들이다.


그런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문제들 말고도 한 차원 밑으로 내려와서 공부하면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일단 자기가 모르는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불안감과 부끄러움, 두려움, 복종감 등을 가지고 있다.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강자이다. 게임에서도 룰을 더 깊이 파악하고 더 많은 정보와 단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판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물질과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이 존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인간의 위계는 설정된다.


우월감이라는 것은 남들 위에 서고 싶은 심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의 실행 방법은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물질을 소유했음을 드러내거나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나는 알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내가 당신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미술이라는 것은 그 우월감을 가짐에 있어서, 가장 진입 장벽이 높고 럭셔리한 품목이다. 니가 모르는 무언가를 나는 알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그렇고, 니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나는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딱 맞아떨어진다.


니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면 상대가 위축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더 위로 올라간다고 느낀다.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고 빈틈을 찾아 논리적으로 반격해 들어오면 방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이해 불가능한 말들을 쏟아내면, 그저 기가 죽어서 반격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고,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고, 신선한 시각을 제시하고, 고정관념을 깨는 충격을 주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런 것들이 미술의 원래 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의도가 끝까지 가고 좋은 목적이 좋은 결과로만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입체적이고 사람들의 욕망으로 들끓고 수많은 변수와 변종들이 개입된다.


의도된 결과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교차하며 뒤섞이고, 원인을 알 수 있는 것들과 원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과 원인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들과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뒤죽박죽 흩어져 부유한다. 일부분이라도 퍼즐 맞추기를 해나가다가 고작 몇 개 맞춘 그것들 사이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모순과 이율배반이 발생하고 만다.


미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이 되고, 나쁜 캐릭터는 대놓고 극단적 악을 추구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말을 태연하게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극 중 피해자의 입장에 감정이입해서 분노하고,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복수와 응징을 드라마와 영화에서라도 제대로 해주길 바라며 대리 만족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그런 대중의 심리와 요구를 영민하게 파악해 부응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굉장히 평면적이고 실제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이고 통쾌한 맛을 제공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악인들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대놓고 악을 저지르지도 않고 그렇게 얄미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일방적 가해자와 일방적 피해자가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많은 경우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억울해하고, 자신이 가한 악행은 축소하거나 망각하고 남이 가한 악행은 부풀리기 마련이다.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경계선이 없고 입체적이며 각자의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금만 성숙해져도 그런 구분이 너무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술 또한 간단하게 정의 내리거나, 구분할 수가 없다.


단지 미술은 인간 심리 삼라만상의 거울이므로, 비겁하고 비열하고 나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 어렵다. 결론을 내리려 하면 독선이 생기고 그것 자체로 한계와 오류를 품을 수밖에 없다. 전체를 포괄하는 완벽한 결론은 내가 감히 내릴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불가능하다.

각자의 시점에서 보는 부분들을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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