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존재의 두려움은 예술 유지의 토대이다
예술은 어떠한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기는 불안감과 무식함이 들통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포모 증후군’과 같은 사회적 인간적 정신병리학적 심리들을 담보로 힘을 강화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시대와 장소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생각이 시대의 생각 내지는 대중의 생각과 다를 때 많은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불안해하며, 그것을 싱크로 시켜가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아주 자존감이 강한 “마이 웨이!”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바로 쫓아가기는 모냥 빠지고 자존심이 상해서 내 주관을 사수해보려 하지만 외로움과 소외감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싱크로 시켜나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눈치 봐가며 바로바로 싱크로 시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사이비 종교 교주의 말이 그냥 딱 들어도 너무 조악하고 논리도 부실한데, 많은 사람들이 빠져드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 분위기에 있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하고 생각하다가도, 엄숙하고 진중하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 무리 안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보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다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어떤 사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어떤 이는 좀 더 느린 속도로 맞춰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기 연예인은 더욱 인기인이 되는 것이며, 블록버스터 흥행작은 더욱 흥행작이 되는 것이며, 유명 맛집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줄을 서니까 더욱 줄을 서고, 피카소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유명 맛집과 장사가 잘 안 되는 집의 실질적 퀄리티 차이가 생각보다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 만큼의 차이로, 때로는 더 후진 퀄리티로도 분위기를 조성해서 인기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이를 점점 더 벌리는 경우도 많다고 보는 것이다.
온전히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참조 자료나 다른 사람의 의견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의식과 지성만으로 무언가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가? 억지로 그렇게 한다면 하겠지만 세상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물 안 개구리의 오류를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미술은 특히나 더 그러하다. 무언가 와닿지가 않고 잘 모르겠는 때는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안전한 방식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올라타는 방법이다. 또는 제일 목소리 크고 확신에 차 있고 이해는 잘 안 가도 왠지 그럴듯하고 화려한 수사법을 구사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올라타는 방법도 있다.
어떤 소수의 목소리가 있고 거대하게 부풀려진 압도적 다수의 목소리가 있다면, 압도적 다수의 목소리에 올라타는 것이 덜 외롭고 든든할 것이다. 그렇게 모이는 쪽은 계속 더 모이고 빼앗기는 쪽은 계속 그렇게 더 빼앗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렇게 빈익빈부익부는 점점 가속화된다.
커다란 두 줄기의 목소리가 비등한 것 같고 각자 일리와 장단이 있는 것 같다면, 어디든 자신을 더 이해시키고 더 끌리는 쪽으로 가면 된다. 종교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때 보통 그렇다.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도 된다.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때 보통 그러하다.
하지만 한쪽 집단이 세상의 자본 권력과 지식 권력, 문화 권력을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집단의 로열 회원으로까지는 끼지 못하더라도,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향할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쪽은 세상 부정론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고, 표정도 어둡고 돈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반대쪽이 더 세련돼 보이고 돈도 훨씬 더 많은 것 같으니, 이 쪽으로 속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바쁘고 잘 모르겠고 적극적 회원이 되기에는 사회적 등급이나 자본도 부족하지만, 적어도 그쪽을 지향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