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요즘은 호텔이 아니라 비행기에서 밥을 해 먹고 잠도 자나 봐. 딸들이 에어비행기를 예약했다고 하더라고”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는 들뜬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차분한 목소리로 이모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다. 비싼 여행 경비에 대해 걱정하시던 엄마에게 ‘에어비앤비라는 게 있어서 집 한 채를 빌려서 한국식으로 밥도 해 먹고 현지에서 파는 재료로 요리도 할 수 있어. 가격도 저렴해서 여러 명이 함께 가면 절약도 되고 좋지’ 안심하라고 한 이야기가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엄마는 ‘에어비앤비’를 ‘에어비행기’로 잘못 들으신 것이다. 80이 넘은 어른들에게 새로운 영어 단어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린다고 하셨다. 영어가 들어가면 헷갈려하신다. 마일리지로 여행하고 싶으실 때는 ‘마요네즈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봐 줘’라고 하시거나 요즘 드시는 유산균 음료는 ‘불가사리’라고 부르신다. 엄마의 말은 가끔 통역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그레브를 시작으로 남쪽을 향해 갔다. 다음 목적지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해양 도시 스플리트(Split)였다. 급할 게 없는 여행이었기에 장거리 운전보다는 여유롭게 중간 도시인 자다르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숙소는 자다르 도시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 같았다. 해 질 녘, 숙소에서 바라본 도시는 연한 황금빛에서 불타는 주황빛으로 물들었고 트레킹에 지친 우리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저녁은 상추와 엄마표 쌈장으로 고기 없는 야채쌈으로 해결했다.
다음날, 스플리트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크로아티아의 모든 에어비앤비 숙소는 해지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발코니와 따스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을 갖추고 있어 편하게 쉴 곳을 제공해 주었다.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숙소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무릎관절이 좋지 않은 엄마가 가끔 걱정되었고 차로 갈 수 있는 곳은 조금 돌아서라도 차량을 이용였다. 걷다가 힘이 드시면 카페에 앉아 따뜻한 우유 한잔을 마시며 우리를 기다리시거나 바닷가 앉아 햇볕을 즐기시기도 했다.
다음날, 누룽지와 무 말랭이로 아침을 해결한 후 삶은 계란과 사이다 그리고 약간의 간식을 비치타월과 함께 챙겨 넣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갖춰 신으면 휴양지 패션의 완성이다. 오늘의 일정은 피로를 풀기 위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조용한 스플리트의 숨은 보석 같은 바닷가를 찾았다. 부드러운 파도가 해변을 어루 만 듯이 밀려오고 끝이 없이 펼쳐진 옥색의 바다는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청명했다.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예측 불가능한 바닷속을 물안경을 끼고 들여다보았다. 그 안은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지현과 나는 머리를 숙여 한참을 들여다보다 동시에 수면으로 나오며 ‘봤어? 봤어?’ 서로 흥분하여 주어를 생략한 채 외친다. 그 주어는 아마도 노란 열대어, 줄무늬 열대어를 의미했으리라. 예지나츠(Jezinac) 해변과 오비체 (Ovcice) 해변 모두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휴양과 여유를 즐기려 찾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으면 어지럽다고 하시는 엄마의 뜻에 따라 붐빈 곳보다는 가족 단위로 조용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을 골랐다.
휴양지를 가본 적 없는 엄마는 몇 해 전 온천 여행을 위해 수영복을 샀지만, 이번 여행에서 챙겨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다 늙어서 남사스럽게 무슨 수영복은..’ 손사래를 치셨다. 10월의 아드리아해(Adriatic Sea)는 차가웠지만 여름 햇빛에 달구어진 바닷속은 따뜻했다.
신선한 해산물 집에서 문어와 생선구이를 주문해 저녁을 먹고 난 후, 엄마는 따뜻한 차를 세 딸들은 와인을 마시며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각자의 상념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미래가 불안정했던 20대를 지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던 30대를 지나, 경제적, 사회적 안정감을 주는 40대의 나의 삶은 평온하고 편안했다.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누군가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40대에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의 내 나이 즈음의 삶이 궁금해졌다
“엄마의 40대는 어땠어?”
“마흔에 너 낳고 힘들었지. 애들은 줄줄이인데 너 세 살 때부터 신랑은 아프고. 매일 퇴근할 때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었으면 싶었지. 자고 나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그 생을 다시 살라고 하면 억만금을 줘도 안 살고 싶다”
엄마의 희생 덕분에 40대의 나의 삶이 편안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로 유학 간 딸을 만나기 위해 60세에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를 처음 타 본 엄마를 같은 여성으로서 연민을 느끼게 되는 밤이었다. 어쩌면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엄마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보게 된 날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