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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플리트 비체(Plitvice)-세월을 걷다.

크로아티아

by Eunju song Mar 01.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플리트 비체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은 열여섯 개의 호수와 90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연결되어 웅장하고 거대한 밀림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세계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은 엄마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공원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트레킹 코스 전 구간에 화장실이 없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크로아티아인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많이 걸어야 하는 곳이라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트레킹을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고 중간에 쉴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걱정과 달리 맑은 공기 속에서는 몇 시간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공원 내 정비된 산책로와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고 난 후 호수를 가로지르는 보트를 타고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코스였다. 해의 방향에 따라 변하는 호수 빛깔은 터키 색으로 혹은 에메랄드 색으로 바뀌었고 호수 주변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맑은 물속에 자라는 식물들은 <반지의 제왕>의 두 개의 탑에서 나온 죽음의 늪을 연상시켰다. 걸을 때 빠질 듯 맑고 미스터리 한 느낌은 신비로우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완만했다. 트레킹의 끝자락에 공원 내 유일하게 화장실이 비치되어 있었다. 엄마와 여행을 할 땐 화장실 위치 확인이 필수적이었다.


보트를 타고 나와 마지막에 보았던 78미터의  벨리키 슬라프(Veliki Slap) 폭포는 플리트 비체 국립공원의 가장 하이라이트였다. 일부 관광회사들은  하이라이트부터 시작해서 공원 전체를 걷지 않는 이 코스를 선택하여 걷는다. 트레킹 시작 전 엄마에게 다 걷지 않는 루트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기왕 왔으니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너희들이랑 같이 걸을래”


용감한 엄마의 용감한 딸들답게 우리는 와인을 물통에 담아서 음주 산행을 결심하였다. 엄마는 고상한 게 망을 보고 지현은 와인병에서 물병으로 옮기는 제조를 하고 은경과 은주는 간식과 치즈를 준비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하는 모험이었다. 학창 시절 점심시간 외에 도시락을 까먹는 스릴이 느껴졌다.  푸른 하늘이 호수에 비쳐 어디가 호수에 비친 그림자고 어디가 진짜 공원인지 가름이 되지 않을 만큼 투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아마도 맑은 호수에 빠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음주를 금하는 듯했다. 모험이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걸 후에 깨달았다.


10시에 시작한 트레킹이 오후 5시에 끝났다. 중간에 보트를 타고 쉬기도 했지만 앉아서 쉴 만한 곳이 없어서 80세 넘은 엄마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 연신 즐거운 척하셨지만 차로 돌아가는 걸음은 힘들어 보였다. 문득 어린 시절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걷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양손에 짐을 들고 머리에 짐을 이고 나의 손을 잡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시장부터 두 세 정거장을 걸어오시던 모습이 현재모습과 교차되어 보였다. 그 시절 엄마는 횃대 위의 새 같았다. 떨어지는 순간 아이들이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을 알기에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꿋꿋이 횃대 위를 지키는 어미새. 아픈 남편을 돌보며 네 명의 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싶었던 강인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이제 엄마는 지킬 것 없는 횃대 위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걸음에는 세월을 견뎌온 무게를 싣고 있었다. 

 “살아서 천국 온 것 같다”

딸에게 의지하며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는 우리의 마음을 적셨다.


딸들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자신의 책임인 양 자책하시며  우리들에게 미안함을 평생 안고 사셨던 엄마.  사고 싶은 것도 맘껏 욕심 내지 못 했던  40대의 어머니 모습에는 한 중년 여인의 희생과 강인함이 담겨있었다.


"가난하게 늙는 건 너희 잘못이지만, 가난하게 태어난 건 너희 잘못이 아니니까."

그 말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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