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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그레브 (Zagreb) - 붉은 지붕과 커피

크로아티아

by 은주

불가항력에 의한 캔슬이었다. 항공기 부도라는 초유의 사태였기에 렌터카 비용 전액 환불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예약한 숙소까지 가는 방법이 없었고 다음 날 다시 공항으로 와서 엄마와 언니를 픽업해야 했다. 그때 우리는 '일단은 어떻게든 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수기가 아니라 공항 근처에 호텔 방이 있었다. 예산을 초과하였지만 여행에서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이 험한 일정에 함께해 준 나의 친구이자 엄마의 가짜 둘째 딸이 있었고 엄마는 다음 날 도착 예정이었기에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엄마의 비행기는 다음날 정시에 도착했고 우리는 네 명은 공항에서 상봉했다. 여행의 시작은 그렇게 네 명의 여행 버디들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82세 꽃엄마, 인간 네비 은경, 운전 지현, 그리고 통역 은주. 각자의 역할이 뚜렷한, 고유의 색깔을 지닌 네 명이 모여, 여행 중 맡은 바 업무를 소화하는 특공대 같았다. 늦은 밤,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고, 간단히 끓여 먹은 사발면과 누룽지 한 그릇에 피곤함을 달래 보았다. 엄마와 함께한 그리움이 담긴 소박한 저녁 식사였다.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타지에서 만난 엄마가 반가운 탓인지 밤이 깊도록 수다를 떨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밤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처음으로 마주한 숙소는 수영장이 딸린 집이었다. 여행 일정상 일찍 떠나야 함이 아쉬웠다.


자그레브 시내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그레브 대성당 근처의 언덕까지 산책을 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운동을 많이 하셨다고 자랑스레 씩씩하게 걸으시는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고요한 분위기였다. 붉은 지붕을 가진 크로아티아 수도의 상징적인 건물들로 매력적인 도시를 완성했다.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풍경을 즐기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따뜻한 우유 한잔과 커피 세 잔을 주문하며 나는 문득 어릴 적 엄마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이 다가오면 엄마는 늘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 하얀 가루와 검은 가루에 설탕을 넣어 그 컵을 후 불어가며 마시곤 하셨다. 그때 나는 엄마가 혼자 맛있는 걸 먹는다고 생각했고 맛이 궁금해 몰래 그 가루를 훔쳐 먹어보았다. 7살 어린 나이에 그 맛은 너무 강렬했다. 혀끝에 느껴지는 쓴 맛에 결국 하수구에 쏟아 버리고 말았다.


“엄마 왜 이렇게 쓴 걸 마셔?”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엄마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인생이 너무 써서 이게 쓴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은 어린 나에게 알쏭달쏭하게 들렸지만, 후에 나는 그것이 커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커피가 쓰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커피는 수입상가를 운영하는 이모 친구에게서 받아서 마실 만큼 엄마는 신여성이었다. 커피를 좋아하셨지만 술은 마시지 않으셨다. 카페인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을 좋아하셨지만 알코올에 힘을 빌려 힘든 삶을 잊고자 하시진 않으신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예순을 넘기면서부터 점차 줄이기 시작하셨고, 아흔이 되신 지금은 더 이상 커피를 마시지 않으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과정인 것 같다. 여행 중, 커피 대신 따뜻한 우유만 드셨던 엄마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제 엄마의 인생은 더 이상 쓴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달콤해지셨는지.’


여행 길동무

엄마 - 82세 엄마. 일제 강점기 태어나 한국전쟁. 격변기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생을 살아오신 분. 60이 넘어 여권을 만들고 70세에 배낭여행. 80대에 자동차 여행을 즐기시며 현재 90세.

운전 지현 - 엄마의 가짜 둘째 딸. 17세부터 엄마를 엄마라 부르며 지냄. 가끔 셋째 딸보다 어른스러움.

인간 네비 은경 - 엄마의 셋째 딸. 프랑스에서 산 날이 한국에서 산 날보다 많음. 파리지앵.

통역 은주 - 글쓴이. 엄마의 막내딸. 영국에서 16년 거주. 싱글 삶을 너무 즐겨 가끔 결혼한 걸 까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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