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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스토크(Rastoke)-꽃보다 엄마

크로아티아

by Eunju song Feb 22.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었다. 자그레브에서 운전하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는 길에 작은 동화마을 같은 라스토크(Rastoke)에서 멈춰 섰다. 이곳은 크로아티아 전통 건축 양식의 건물들과 작은 폭포, 그리고 비가 갠 뒤 흐르는 작은 강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마을 끝자락에는 수차와 물레방아, 예쁜 허수아비 인형들이 인상적이었다. 엄마는 그 인형들을 바라보며, 예전의 허수아비처럼 새를 쫓아내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는지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엄마는 열두세 살 무렵부터 새를 보았다. 그 해는 아마도 1947년이나 48년쯤이었으니 아마 해방되고 몇 해 안 지난 때였을 것이다.


“새를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허수아비처럼 서서 새가 오면 쫓아내는 일을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가장 싫어했던 여름 일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새들이 점점 똑똑해져서 허수아비로는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고, 결국 사람이 직접 지켜야 했다. 그해의 쌀 수확량을 담당하는 막중한 업무였던 것이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아무도 없는 논밭에서 볼거리도, 읽을거리도 없이 우두커니 서서 새를 기다려야 했기에 처음엔 성질이 났고, 발만 동동 구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공허함이 밀려오고, 결국 체념에 이르게 되었다. 이야기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그 시절의 감정이 묻어났다. 운이 좋은 날에는 각 집마다 착출 당한 친구들과 모여서 소꿉장난이나 조개껍질로 소꿉놀이를 하거나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여름날 해는 왜 그렇게 긴지,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모두 집에 들어갔어도 엄마는 혼자 남아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7월부터 추수 전까지, 그늘 하나 없는 들판에서 새와 씨름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간혹 새벽 무렵이나 해 질 무렵에는 뱀과 쥐가 출몰하기도 하여 어린 나이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약지 못해 매일 착출 당하는 둘째 동생이 안쓰러워 10살 많은 큰 오빠인 상근이 오빠가 원두막을 지어주었다. 쉴 수 있는 그늘이 생겼고, 원두막에서 내려다보이는 들판 풍경이 나쁘지 않아서 그 후, 그 일이 생각보다는 싫지 않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표정은 마치 열 살 소녀 같았다.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인 <꽃보다 누나>에서 누나들을 멈춰 세웠던 그 장소가 이제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중 화장실이 없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 평화로운 분위기는 충분히 쉬어갈 만한 장소였다.


다음 날의 일정을 위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근처로 숙소를 정했다. 구운 소고기와 운전 담당 지현이 가져온 떡볶이와 김밥 재료로 풍성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 위에 와인을 곁들이면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은 특별한 저녁 식탁이 완성된다. 술은 안 드시던 어머니도 기분이 좋으신지 내 잔을 한 모금 마시고 인상을 쓰신다. 포근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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