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Day – 바다 위에서 인생을 다시 배우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크루즈

by 은주

마흔을 넘기고 난 후부터, 인생 뭐 있나 싶었다. 놀고, 먹고, 마시며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누리기로 한 우리 부부는 생애 첫 크루즈 여행에 올랐다. 그 결정이, 생각보다 꽤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 여행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삶에 거대한 고래 같은 그녀가 ‘나도 이용해 줘’ 라며 유혹한다.

배는 무려 19층 구조로 곤충처럼 세 부분 <Forward, Midship, AFT>으로 나뉘어 있다. 곤충의 머리, 가슴, 배.처럼 말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이 역시 질서 있는 작은 세계였다. 각 구역마다 8개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우리의 선실은 AFT, 즉 '꼬리'쪽에 있었다. 가장 끝. 어쩌면 불편함을 의미할 수도 있는 그곳은, 이번만큼은 가장 조용하고 안정된 선택이었다. 파도가 높을 때 출렁임도 덜했고, 엘리베이터의 소음에서도 멀었다.


배 위의 ‘숨은 명소들’

아침은 에그 베네딕트와 커피를 마셨다. 간소한 식사였지만, 이 또한 '여유'를 음미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제 다 돌아보지 못한, 예전에 부자들만 들어갈듯한 전용 공간으로 향했다. 18층, 머리 꼭대기에는 단 네 개의 초호화 펜트하우스가 있다. 그 옆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Crow’s Nest’라는 바가 숨어 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된 공간. 피오르드의 풍경을 가장 극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여행 중 참새가 방앗간에 들리듯 매일 한 번은 꼭 들렀다.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신 한 잔의 와인은, 일상에서 잊고 지낸 감각들을 서서히 깨워주었다.

또 다른 우리의 아지트는 8층의 파노라마 데크. 해가 지는 시간, 그곳은 하루 중 가장 감성적인 무대로 변한다. 붉게 물드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고요한 선상의 바람. 경계를 알 수 없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면 마시는 커피는 또 다른 여유로 다가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 표류하는 듯 보이지만 배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가장 멀리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Crow's Nest 에서 바라본 풍경

드레스 코드, 인생의 예의를 입다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 의외로 걷는 양도 많았다. 고래 배 속에서 걷는듯한 느낌이 묘하게 생의 활력을 되찾게 했다.

오늘의 <Horizon> 신문을 펼치니 ‘블랙타이 데이’이다. 매일의 드레스 코드를 확인하지 않으면 혼자만 다른 리듬으로 떠돌게 된다. 오늘은 드레스업이 어색하지 않은 날. 남편은 턱시도를, 나는 블랙 칵테일 드레스를 꺼냈다. 신발만 4켤레를 가져왔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노르웨이 산행용 등산화까지 짐이 많았다.

크루즈 위에서 정장을 입는 건, 단지 격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를 더 진지하게 대하는 방식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드레스가 어울릴 줄은 몰랐지만, 그날 밤 나는 백작 부인처럼 길게 늘어진 꼬리 달린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삶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했다.

예약이 가득 찬 네일숍과 미용실, 나선형 계단의 촬영 명당을 두고 사진사들 사이에 벌어지는 눈치 싸움을 구경하며 웃음 지었다. 누구 하나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 이 순간을 기념이 아닌 기억으로 만들고 싶었다.

몇 백 명 앞에서 공개 프러포즈하는 커플도 있었고, 이브닝드레스를 준비 못 해 조심스레 걷는 여행객도 있었다. 남녀 커플, LGBTQ 커플, 싱글 파티까지.. 이 공간은 ‘보여주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자신을 즐기는 무대’였다. 그 다양성을 수용하는 분위기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유연하고 따뜻한지 알 수 있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내일 아침이면 하우게순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예정이다. 바다 위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이 배는,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았다. 그 안에서는 여전히 파티가 이어지고, 아이오나는 우리를 조용히 북쪽을 데려가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은 단지 쉬러 떠난 게 아니었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책을 읽고 수영하는 비치 홀리데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바다 위의 작은 우주에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는 삶의 속도와 방향을 다시 조율하고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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