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게순 Haugesund, 낯선 도시와 친해지기

노르웨이 피오르드 크루즈

by 은주


이틀 동안 열심히 일한 배가 하루 쉬어가는 도시 노르웨이의 끝자락 하우게순에 도착했다. 호텔 전체가 순간 이동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 같은 아침이었다. 아침 7시 커튼을 살짝 들쳐 보았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비가 흩날렸으며, 항구는 안개에 덮여 도시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3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우산과 검은색 고어텍스 바람막이용 등산복을 넣었다가 빼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얇은 여름용 드레스만 잔뜩 챙겨 넣은 가방은 불룩했지만 정작 이 날씨에 입을 옷은 없었다.

“오늘은 그냥 배에서 놀아야겠다. 어차피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내려다보니, 사람들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서 내렸다. 그들은 날씨에 휘둘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스무 살 무렵의 첫 배낭여행은 시간에 쫓기듯 다녔다. 나는 더 넓은 세상을 짧은 시간에 많이 보고 싶었다. 날씨는 일정을 방해하지 못했다. 모순되게도 인생의 시간이 더 짧아진 지금, 마음은 더 여유롭다. 도시는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10시경, 해가 고개를 들었다. 안개에 가려졌던 도시가 무대의 장막이 걷히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회색 벽, 더 진한 회색의 지붕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아치형의 높은 다리, 간혹 보이는 붉은 지붕들. 높은 건물이라곤 뾰족하게 솟아 있는 오래된 성당의 십자가였다. 비가 갠 뒤 더욱 선명해진 수채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규모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 걷다가 직접 로스팅하는 기계와 차를 판매하는 가판대를 보았다. 뒤쪽으로 돌아 카페에 들어서니 볶은 원두 특유의 고소한 향과 케이크의 달콤한 냄새에 지갑을 열었다. 커피, 와인, 맥주, 이 세 가지가 신이 싱글들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여행자에게 주는 작은 위안이다. 낯섦을 이기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게 하는 방랑자들에게 다리 뻗고 마시며 쉬게 하는 곳이다. 또 인터넷이 없는 아날로그 시대사는 여행자에게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삼일이나 연락이 없는 나를 궁금해하는 가족들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무선 인터넷이 안 되는 덕분에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하기보다는 같이 여행하는 서로에게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배로 가는 길의 건너엔 1미터가량의 크기의 큰 눈과 문신한 것처럼 진한 눈썹의 트롤이 서 있었었다. 트롤은 노르웨이 설화 속 신비로운 존재다. 깊은 숲 속이나 산속 동굴에 살고, 해가 뜨면 돌이 되어버린다. 멀리서 보니 작은 키에 파란색 멜빵바지를 입고 있는 토끼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쥐를 잡아먹은 듯한 빨간 입술에 드문드문 난 이빨은 기괴했다. 특히 얼굴의 3분의 2를 덮은 귀는 괴이함을 더 했다. ‘트롤 조심(Troll Crossing)’이라는 표지판이 귀여움에서 섬뜩함으로 바뀌었다.

하우게순은 노르웨이 최초의 왕, 하랄드 페어헤어(Harald Fairhair)가 정착했던 곳이다.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자, 바이킹 박물관이 있었다. 얼핏 보아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공간이라 그냥 지나쳤다. 그곳은 VR로 체험형 바이킹 박물관이었다. 입구부터 어둡고 축축했다. 하우게순에 오기 전에는 해적과 바이킹을 비슷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해적이 규칙 없는 무법자였다면, 바이킹은 자신들만의 규율과 명예를 중시하던 전사들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에도 박물관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키가 큰 바이킹의 후손들 사이에 걷고 있는 나는 호빗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는 지금도 그 용맹한 후손들의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을 지나쳐 걸어가니 공연을 펼칠 수 있는 바이 파르켄(Byparken) 야외 공원이 나왔다. 날씨는 언제 비바람이 불었는지 시치미를 뗀다. 선글라스 없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부셨다. 쉼터용 벤치에 앉아 빨간색의 장미들과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가까운 공원에서 쉬었다. 강바람이 땀에 젖은 셔츠를 식혀주었다. 한껏 피고는 시들어버린 튤립이 잎사귀만 남아있었다. 철마다 자신의 쓰임을 아는 꽃들이 가득한 정원이 유명 관광지에서 주지 못한 위로를 건넨다.

하우게순을 지레짐작으로 낮잡아 생각했던 게 미안해 나의 사과를 전했다.

‘노르웨이는 피오르 크루즈만 있는 건 아니야.’

사과를 받아 주듯 속삭인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도시가 나를 향해 열심히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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