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나를 만나기 전, 그의 세상은 숫자가 전부였다. 인간관계보다 스프레드 시트와 노는 것이 재미있었고,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기보다는 주식을 분석하고 투자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이와 직책에 맞는 흔한 명품 옷이나 신발도 없었다. 20년 넘게 입어 온 초록색 재킷은 그를 런던 금융가로 출근하는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동네 야채 가게 사장님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이 두 채 있는 싱글남이었다.
“친구 없어?”
그와 데이트를 시작할 때부터 그가 친구가 많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년이 넘도록 단 한 명도 못 만날 줄은 몰랐다. 마라톤 모임이나 자전거 모임 등 사교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임 외에 만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에서 인맥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케 하는데 그는 인적 네트워크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은둔형 외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할 때쯤, 그의 베프를 드디어 만났다. 폴은 중국 상하이에서 일했다.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중국 유학원의 마케팅 총책임자였다. 당연히 거주지는 상하이였다. 자주 못 보지만 영국을 올 때마다 만나는 친구였다.
이안은 그날 아침, 이발을 하러 갔다.
“부인 오는 날이라 꽃단장하는 거야?”
애써 설레지 않는 척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서 농담을 던졌다. 뒷머리가 많지 않아 빡빡이로 밀면 밤송이 같고 나름 귀여웠다. 폴이 영국을 방문하는 날은 이안이 가장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날이다. 저 혼자만 너무 들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친구한테 상처받고 돌아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폴은 브라이튼 근처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필, 폴, 이안 이렇게 죽마고우다.
“폴의 부인은 이안이야. 난 여자 친구고, 서로 죽고 못 살아.”
폴의 여자친구이자 필의 동생인 사교성 좋은 하이디의 말에 외톨이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하이디는 이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 행사에서 여장을 한 이안, 소풍에서 찍은 듯한 짓궂은 표정의 폴, 필, 이안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지금이야 뒷머리는 휑하고 없어진 앞머리를 가리려 호날두처럼 빡빡 밀었지만, 그 시절 셋은 머리숱이 훨씬 많은 훈남들이었다. 그 후 나도 인정했다. 이안에게는 부인이 세 명 있다. 첫 번째 부인은 폴, 두 번째 부인은 필 그리고 내가 세 번째 부인이다.
세 사람 모두 솔티드 캐러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라거 맥주만 마시며, 라이브 밴드 음악을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등 닮은 점이 많았다. 필은 무표정한 얼굴의 전형적인 영국 남자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일자로 다문 입꼬리를 보면 말을 걸기가 어려웠지만 이안이 좋아하는 거 보면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은 들었다. 외국 생활에서 사기당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는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사람도 멀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다. 이안이 아니었다면 말도 걸지 않았을 필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전직 시장이었지만 거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안을 보며 다양한 인맥보다는 깊이 있는 관계가 삶의 질을 높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친구에게 최선을 다한다. 반면 나의 인간관계는 다양한 사업상의 친구들, 회사를 떠나면 연락조차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만나고 나면 힘들고 허탈했던 얄팍한 관계부터 험담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 나눈 뒤 말이 셀 걱정되었던 친구들의 이름이 휴대전화기에 나열되어 있었다. 모두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관계부터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