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어두운 방에 갇혀서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가 15년 내내 같은 만두를 먹었던 것처럼 야채라곤 토마토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는 고기 패티만 올라간 햄버거를 10일 동안 먹었다. 첫 3일은 기침 몸살이 심해 사경을 헤매다. 그 후 정신이 들어 보니 인터넷도 되지 않는 감옥이었다. 로도스 섬에서는 코로나 호텔이라고 불렀다. 방에 혼자 남겨졌고 신혼여행 중 읽었던 책을 또 읽기 시작했다. 격리 수용소의 작은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던 날, 오늘은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버거를 가져다주던 직원에게 테스트기를 요청했고 네거티브가 나왔다. 탈출이다. 무조건 벗어나려 항공권 여부도 확인도 하지 않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여기까지가 신혼여행에서 나와 헤어진 후 이안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살이 빠져 눈은 반쯤 푹 꺼져 있고 청바지와 티셔츠가 헐렁해진 그를 만났다. 그리스 로도스 (Rhodes) 섬에서 헤어진 지 10일 만이었다. 미안함과 그리움에 눈물이 났다. 빨지 못하고 계속 입고 있던 옷은 땀에 절어 쉰내가 났지만 살아서 돌아왔으니 상관없었다.
바닷가에서 놀고 온 다음 날, 이안의 몸이 불덩이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감기인가?’, 하고 넘겼지만, 코로나 1차 접종만 끝났던 시기라 기침만 해도 테스트기를 찾던 때였다. 다음날 떠나야 했기에, 방역 규칙인 비행 24시간 전 테스트를 했다. 그녀는 한 줄, 이안은 두 줄. 눈을 비비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임신 이후 가장 놀라고 무서운 두 줄이었다'라고 누군가의 말이 스쳤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여행 회사 Tui 담당자에게 연락을 넣었다.
“같이 있었으면 음성이라도 돌아다니면 안 돼요”
첫 만남에 관광 상품을 팔던 친절한 목소리의 그녀가 한 겨울 냉기가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호텔은 에이전시에 물어보라 하고 에이전시는 호텔에 물어보라 한다. 오성급 호텔도 이런 일에는 동네 모텔만도 못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픈 사람을 가운데 두고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는 모습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리스 방역 당국에서 나와 검사를 진행한다는 연락이 반나절 만에 왔다. 호텔의 디럭스 룸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다. 문 앞엔 보이지 않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는 듯했다. 마스크, 흰 장갑, 고글, 두꺼운 방역복을 입은 사람만이 접근이 허락된 공간이었다. 제공되는 식사는 강아지 사료 급식처럼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건 의외로 큰 박탈감이었다.
정부에서 나온다는 사람은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결국, 원래의 비행은 취소했고, 하루를 더 넘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이안은 수용소행을 확정받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괜히 나랑 남아 있다가 너까지 걸릴 수도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한다며 서약한 게 1주일 전이였는데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는 간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 손끝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지켜주지 못할 맹세를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결국 죄수를 실어 나르는 듯한 ‘닭장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는 아픈 몸으로 떠나는 길에도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어 홀로 영국에 도착하는 부인을 픽업해 달라고 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다른 커플들은 신혼의 설렘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나는 홀로 창밖을 보며 훌쩍거렸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무용담처럼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그리스 로드 섬 탈출기를 회상한다. 지금이야 터무니없지만 당시는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등진 채 이별을 맞이했던 실향민들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동일시했다. 그들 역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별 앞에서 나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만나지 못하는 그들의 사무치는 그리움은 계속되고 있어, 마음이 무겁다. 하루빨리 그들의 아픔이 치유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