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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자, 한국 여자

영국 남자, 한국 여자 그리고 웰시코기

by 은주

10월 1일은 영국 전역의 모든 바다가 반려견에게 개방되는 날이다.

겨울에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10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개들이 자유롭게 바다를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10월 첫째 주 금·토·일을 ‘만두와 여행하는 날’로 정했다.

강아지 쿠션, 뼈다귀 모양 장난감, 축구선수 만두를 위한 축구공을 가방에 넣으면 아기 짐만큼 트렁크가 가득 찬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간식과 밥까지 챙겨 넣으니, 우리의 짐은 트렁크 한쪽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지는 런던에서 남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데번 주의 토키(Torquay)로 정했다.

영국에서 여행을 떠나는 날은 늘 머피의 법칙처럼 비가 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렸다.

한국에서 사 온 양산 겸 우산은 바람에 뒤집혀 안쪽에 붙어 있던 자외선 차단 천이 찢어지고 말았다.

결국 재킷 뒤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처음엔 영국 사람들이 우산 없이 다니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영국 신사’ 하면 나무 손잡이가 달린 검은 우산을 들고 걷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런 신사는 영국에 없다. 비가 내리면 모두 재킷 뒤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엔, 그것이 가장 안전하다. 우산을 다섯 개나 날려 먹었지만, 여전히 비가 오면 우산을 펴는 한국 여자와, 우산이 있어도 고집스럽게 쓰지 않는 영국 남자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차이에도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구름사이로 해가 나왔다. 영국의 가을은 참 변덕스럽다. 기분이 시시각각 바뀌는 사람을 상대하는 듯하다.


만두가 귀를 뒤로 접으며 짧은 다리로 전력 질주하여 바닷가 쪽을 달려간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우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미소 지어 준다. “나 너무 신나!” 하고 말하는 듯하다.

그 모습은 언제나 여행의 수고로움을 잊게 만든다.

짖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돌아보니, 물개 한 마리가 바다 위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만두가 혼비백산하여 엄마에게 달려왔다.

수영하다가 물개를 만나면 엄마가 지켜줄 거라는 굳은 믿음을 보여준다.

나 역시 관계에 상처받은 날이나 상사에게 시달린 날, 글쓰기가 힘든 날에는 가만히 안아주는 이들이 한집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 집은 언어가 다른 세 명이 산다. 영어를 쓰는 남자, 한국어로 말하는 여자 그리고 웨일스어를 구사하는 웰시코기. 모든 말에 통역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루의 끝에 소파로 가져다주는 와인 한잔으로, 퇴근 후 반겨주는 꼬리로,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다고 말없이 위로받는다.

언어보다 오래 남는 건 온기다.

그리고 그 온기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 토키에서 만난 물개 촬영해 보았습니다.

* 영국 남자, 한국 여자 구독해 주시고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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