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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안의 토끼, 그리고 추석

영국 남자, 한국 여자

by 은주

“왜 둥근달 안에 토끼가 있어?”

추석이 다가오자 한국에서 가져온 탁상용 달력의 그림이 이상한 듯 이안이 고개를 꺄우뚱한다. 달력 속, 연노랑 보름달 안에는 두 마리 토끼가 절구 방아를 찧고 있었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구나’ 영국에 살다 보면 추석이 없어서 한국 명절을 자주 잊어버리고 산다. 이안에 질문에 대답도 없이 ‘엑시터라도 다녀올까?’ 싶은 생각에 달력을 뒤적였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세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콘월 지방 근처의 엑시터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은 대지 관리가 힘들었던 한 백작의 기증으로 설립되었고, 르네상스풍의 대리석 조각상과 석고상들이 곳곳을 놓여 있었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어머니는 가본 적 없는 서울대 캠퍼스를 운운하며 엑시터 캠퍼스를 칭송했었다.

엑시터에는 작은 한인 교회가 있었다. 20명 남짓 모이는 규모였다. 쇠퇴해 가던 영국 교회를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들에게 개방하며 국제 교회가 되었다. 민트 교회는 단순한 신앙의 장소를 넘어 따뜻한 쉼터의 공간이었다. 한국어 예배 후에는 비빔밥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추석이면 교민들과 국제 커플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테이블은 금세 한국의 명절 상으로 변했다.

“나는 잡채 할게요.”

“그럼 나는 김밥.”

“나는 불고기.”

누구 하나 빼는 사람 없이 자진하여 매해 추석 행사를 치른다.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나누며, 멀리 떨어진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에 대한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곳에 방문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정착한 국제 커플들이 있다.

1978년에 결혼한 경애 언니와 케니는 엑시터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커플이다. 원자력 발전소에 파견 나왔던 케니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시절 경애 언니의 아버지는 외국인과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른 이야기는 소설로 써도 손색없다.

“당시엔 직항도 없었어. 알래스카를 경유해서 37시간을 날아왔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 한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지.”

대구 출신의 문희 언니와 사업가 제이, 목소리가 아나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영애 언니와 이야기의 절반을 유머로 채우는 마크 모두 반절은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미경 언니와 남편 로빈이다. 프랑스 배낭여행 중에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 가족이 영국에 왔을 때도, 차 없는 그들을 태워 근교 여행을 함께 다녔다.

엑시터에 처음 방문했을 때, 로빈은 이안에게 한국 여자와 살아가는 법과 한국 식구들에게 사랑받는 법등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한국 여자와 살려면 젓가락질부터 배워야 해. 그리고 김치. 김치는 꼭 먹을 줄 알아야지.”

그가 시범을 보이려 용감하게 한 입에 먹기에 다소 큰 김치를 집어 들자, 옆에 있던 미경 언니가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자기도 안 먹으면서 누굴 가르쳐.”

그곳에 가면 ‘정’을 느낀다. 그리고 유머는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 한 엑시터는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라면조차 귀해 집에서 택배를 받아야 했던 시절, 명절이 끝나면 언니 같은 교민들이 남은 음식을 챙겨주었다. 낯선 타국에서 만난 작은 공동체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내어주었다. 흰쌀밥 위에 야채를 얹은 소박한 한 그릇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한없이 넉넉했다.

도시로 한국으로 떠날 유학생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늘 같은 마음으로 응원한다.

엑시터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떡을 찧던 토끼, 가족과 나누는 웃음, 고향의 정. 타국에서 맞는 추석이었지만, 민트 교회의 사람들과 나누는 음식과 정은 달나라 토끼가 나누는 마음처럼 따뜻한 위안을 주었다. 이안이 질문에 답을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왜 토끼가 보름달 안에 있냐고 물었잖아. 떡 만들어서 나눠 먹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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