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처음 한국 방문은 이안을 힘들게 했다.
공항에 도착해 우리 집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말을 걸었다.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17층입니다.”
도어록은 가족이 올 때마다 무한 반복됐다.
“열렸습니다.”
“닫혔습니다.”
밥솥조차 “압력 취사를 시작합니다”라며 말을 걸어왔다.
기계소리 없는 조용한 마을에서 살던 그에게 이 수다스러운 기계 소리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르는 나라 말을 쏟아내는 가족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브로콜리 헤어의 이모들은 한 마디씩 던졌다.
“젓가락질은 안 배웠나 봐.”
“한국 음식은 젓가락이랑 숟가락이 편한데.”
그때, 엄마가 흐뭇하게 덧붙였다.
“포크랑 나이프를 내가 이마트에서 사다 두길 잘했지.”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잡채가 짜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음식을 평가하기 바빴다. 형부들은 한쪽에서 맥주를 기울이며 정치 이야기에 열중했다.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조카들까지 합류하면 식탁은 또 차려졌다. 모두가 바쁜데 왜 이렇게 모이는 걸까? 이안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1년에 한 번, 어머니 생신에만 모이는 그의 가족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매일 저녁 친구들을 만났고 제주도 여행을 기대던 그의 계획을 산산 조각냈다. 1주일 내내 친구들만 만났다.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회사에서 만난 친구, 영국에서 만났지만, 한국 들어간 친구 다양 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남편들까지 만났다. 과연 이런 관계들이 모두 필요한 건가? 싶을 만큼 많은 친구를 만났으며 그는 소외됐다.
영국으로 돌아와 근처 선술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결심한 듯 그가 말했다.
“다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아”
화났다. 다문 입에 힘을 주고 가만히 생각했다.
“왜?” 화를 참으며 짧게 물어보았다.
“여행도 안 다니고 친구들만 만나는 모임은 내가 지쳐. 더군다나 음식도 말도 익숙하지 않아서 난 한국이 힘들어. ”
나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던 그가 봇물 터지듯 조용히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나는 일 년 내내 네 친구들, 가족 모임에 가서 낯선 환경, 음식에 예의를 다하는데 고작 1주일을 못 참아?” 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제주도는 왜 안 갔어?” 이안도 원망을 담아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서울에서 제주도 여러모로 귀찮은 여행이 될 것 같아서 계획하지 않았다. 또 나는 열 번 이상 가본 곳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 티브이에서 제주도를 보고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내가 데려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에게 한국 방문 좋은 사람 만나고 쉬러 가는 곳이었다. 둘이 다닐 때도 신경 쓰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처음 가는 그에 대한 고려는 없던 것에 대해 사과도 했다. 나는 싸울 때와 사과할 때를 안다.
“그러면 친구들도 가족도 안 만나고 여행하는 거면 가고 싶어?” 그리고 협상할 줄도 안다.
“그럼 가고 싶어. 친구랑 가족을 만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여행도 하자는 이야기야”
합의점이 보이는 듯해 화가 누그러졌다. 다행히 그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섯 번의 한국 여행을 같이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든 자게로 된 펜과 메모지, 빨아도 오래가는 감촉 좋은 티셔츠 선물 등 만나는 이들마다 이안에게 선물을 주었다. 처음에는 하기 싫었던 그를 위한 통역도 필요할 때는 했다. 경복궁 영어 투어도 갔고 부산, 제주, 동해, 거제, 경주 등 다양한 도시를 여행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쿠쿠 밥솥은 사 와서 이제 밥은 이안이 한다. 이제 쿠쿠와 정겹게 대화도 한다. 이제 그에게 한국은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