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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in Aug 15. 2023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현상을 구성하는 구조를 파악해 서 있는 위치를 그려본다

미술에 대한 역사는 각 시대 인간들이 바라봤던 시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어떠한 믿음 체계를 가지고 살아갔는지, 탄생과 죽음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양식을 겉으로 드러내며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갔는지, 그들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 속 왕이 어떤 제도 속에서 권위를 유지했는가는 오래된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 형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왕의 초상화나 무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왕뿐만 아니라 민중과 백성과 대중은 어떤 사회와 규범 속에서 살아갔는지 회화나 조각을 통해 유추한다. 서양미술사의 시작을 라스코 동굴 벽화로 삼기로 한 이론가들은 미학적 가치가 인간의 가치 판단을 드러내는 표현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고대 인간들이 함께 조직을 갖춰 전략적으로 동물을 동적으로 사냥하는 순간을 공동의 장소에 그렸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함께 살아가는 터전에 같이 바라볼 수 있는 화면을 지정하고 그 안에 특별한 순간을 시청하도록 틀을 만들었다. 초기 인류가 형성한 미술의 틀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매체, 재료, 관람문화 등은 달라졌지만 그 시대와 사회의 시선이 머무르는 장면을 역사로 남기거나 미래에 투사하려는 목적으로 향유되고 있다. 즉, 작품을 보면 인간의 내면과 외부세계를 동시에 관찰하고 공간과 시간의 앞뒤로 뻗어나갈 기회가 펼쳐진다.


유럽의 예술과 문화 전통을 학습한 이들은 미의 규칙을 영혼이나 정신과 결부 지었다. 자본주의와 경제가 인간 일상에서 강력해질수록 그것과 구별 지어지면서 또 다른 시선을 창안해 내는 자유한 영역을 남겨두고자 했다. 순수하게,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를 담지 않은, 실험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여러 방식의 것들을 예술이라고 부르고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을 꾸준히 재정의해나간다. 현대에는 시선을 빼앗는 광고, 대도시 문화,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평소에는 가려지고 은폐되어 잘 보이지 않았던 공간과 사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 지금 시대에 중요한 덕목으로 상승했다. 일차원적으로 떠오르는 매개된 이미지가 아니라 각 이미지들의 집합을 예술로 칭하자는 목소리도 사회 변화에 따른 반응이었다. 


이미지가 모두 똑같은 이미지가 아니고 그중에서도 집합이 있고 매개된 이미지는 무엇인지 구별해야 하는 상황은 근대가 대중의 미적 취향을 바꾸면서 일어났다. 미술이 무엇일지 고민하기 이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크게 변한 시점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신세계는 기술이 상용화되는 모습과 결합하거나 따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손과 발로 일상에서 쓰는 물건, 즉 매체들을 만들던 때는 저물고 대량 생산을 통해 상품이 집집마다 놓이고 확장되는 과정은 이전과 다르게 사고하기를 가르쳤다. 생활과 삶이 한 인간의 뜻대로 결정되기란 어려운 이유는 시장, 사회, 기술이 일상이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몸뚱이를 가지고 뛰고 사냥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문화가 복잡해진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 추상화, 개념미술, 설치미술은 어렵고 보기에 아름답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결정이 모순이라는 시각을 자주 접한다. 인간은 이제 몸 하나로 동물을 사냥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문화를 구축한 문명에 이르렀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현대미술이 미술이라는 형식에서 다원적이고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모든 기술과 매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대인 중에서 감각을 살려내 온갖 소동에 대해 함께 시청할 장면을 제작하는 예술가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남겼던 작업과 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인물보다는 기하학적 구도, 낯선 배경, 사물과 매체들의 조합이 화면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 인간의 주체적 생각보다는 전체 사회 속에 내재된 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갈수록 각 인간의 '나'라는 의미는 연약하고 모순적이며 불완전하다는 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서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정치로, 유일무이하던 기술을 가진 전문가로부터 전 세계가 전문 기술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이러한 흐름을 현대미술이 적극적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의 눈으로는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모든 것을 감각하거나 경험할 수도 없게 됐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도 않게 됐다. 인간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개념적 사고로 구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구조를 축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는 과거의 구조는 어떠했는지까지 파악하도록 이끌어 냈다. 각 시대마다 사고의 중심축이 됐던 담론들이 나타난 배경을 들여다보는 문을 열게 됐다. 유럽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옛사람들이 고안해 내고 정리해서 완결지은 지식들이 어떤 틀 안에 있었는지 확인했다. 이들은 절대적인 것에 대해 의심했다. 관계는 고정돼 있지 않고 정해지지 않은 얽힌 그물들 속에 발견되는 신화들을 해석하고 향유하는 인간을 바라보고자 했다. 심리적 용어로 표현하면 사회적 무의식을 탐색했다. 통일성, 단일함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유의미한 발견을 위해선 사고 체계와 시선을 보이는 대로 보기 어려워졌다. 미디어와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은 이유도 모순된 인간의 시선을 분석하고자 내면과 외양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사진, 비디오 등을 비롯한 시각매체는 인간이 조작하고 개입할 수 있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 또 기술 과학은 누구 한 명에게 허락된 전유물이 아니라 온 사회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대중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현실이 대중에게 직접 말하고 대중이 이를 수용하며 교감하는 형태가 이뤄졌다. 이로써 디지털을 활용하는 현대미술은 철학자들이 쌓아 올렸던 이데올로기나 학파와 구분되기 시작했다. 관람자가 개입하는, 상호의존적 세계가 새롭게 전개됐다. 동시에 소비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미지의 무한한 합성과 결합이 발생했다. 예술은 쏟아지는 비와 같은 이미지의 범람을 피해 다시 특수한 상황 구축을 연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맸다. 미술의 시작이라고 익힌 라스코 동굴 벽화를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새겨보려는 의지는 계승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에 만들어지는 하나의 작품, 구조, 작가, 미디어아트를 설명하는 일은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를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 본질에 대해 탐구하기 좋은 방법이다. 미학연구는 그러한 면에서 세속학문이나 보조적이거나 부차적인 학문이 아니다. 계속해서 힌트를 주고, 영감을 준다. 이미 완결된 대서사시에 대한 결과론적 분석이나 해석이 아니다. 선험적 경험이고, 그 자체의 인간 능력을 드러내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물론 미술사학이나 미술계 그 내부는 깊은 계보들과 흔적들과 기록들을 중요시하며 형식적 의미와 가치를 계속 지켜내는 일을 강화시키며 전문가와 비 전문가의 영역을 구분한다. 하지만 향유자 입장과 시선에서 미술은 지금 시대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사유를 넓히며 지금 시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파악하는 가장 지적이고, 암묵적이고, 현실적이고, 소비와 멀리 떨어진 텍스트다. 그 텍스트를 해석할 때도 있고, 직접 표현하며 참여할 때도 있다. 두뇌 속 생각과 인식을 어떻게 정의할지,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공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실제로 눈에 보이고 소통하려는 매개체를 어떻게 사용할지 고려해 보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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