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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in Aug 11. 2022

에로스와 현실

<에로스의 종말>에 대한 재고

에로스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낭만이 되기도, 육체적 욕망으로 읽히기도 했다. 철학자들의 언어가 중요하게 다뤄진 고대 그리스에서는 지혜와 진리의 뿌리처럼 여겨졌었다. 민중 정치에 종교가 앞서게 된 시기부터는 애정과 헌신을 중심으로 중요 우선순위가 개편되었다. 유럽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된 지성주의에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 시기 때 유행했던 사고 체계를 초대했다. 이처럼 철학, 종교, 정치에 의해 에로스는 여러 모습으로 다른 형태로 불리면서 존재했다. 한병철이라는 한국계 독일 철학자는 에로스의 의미가 가장 취약한 시기로 현재 동시대를 꼽고 있다. 


에로스와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에로스 없는 사회는 서로 상호작용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 결과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들의 증가를 우려하고, 원인은 무한적인 선택의 자유를 주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찾고 있다. 일방적으로 에로스를 절대적으로 찬양한다기보다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나타나는 악영향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타인 없는,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그림자로 여기게 되어 이별도 고통도 슬픔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법처럼 부정적인 것들의 제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끝이 없는 무한궤도에 빠짐과 같다고 진단한다. 


부정적인 감정도 제거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며 최상의 결과 창출을 할수 있다면, 경험하지 못할 것 같은 성취를 할 수 있다면, 마법이 매일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러한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은 신념이 되고, 하나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쉽게 자리를 잡는다. 실제로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분야와 기회는 존재하고, 그것이 '생산'이 자본주의에게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적절한 보상과 원했던 결과를 하나씩 얻어 나가는 경험은 '생산' 과정에 참여를 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교훈을 남긴다. 몸과 마음을 탄탄하게 유지시키는 동안에는 언제라도 우월한 지위와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한병철은 이러한 순환구조가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지금과 같이 생산과 소비가 삶에 밀접하지 않은, 에로스가 활발하던 종교중심사회를 예로 들고 있다. 종교는 진짜로든, 가짜로든,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하는 기능을 했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왠지 알 수 없는 허무감,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것은 자유라고 불려왔다. 자본주의는 자유를 경험하게 해주었던 종교에 비해 확정된 구원을 제공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보고 있다. 많은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 짊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소비를 하는 행위 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공동체나 관계는 늘 생산하는 행위들에 비해 후순위로 밀려난 상황에서 아무도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도 제거되고, 종교도 힘을 잃은 지금의 세상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하던 타인들은 어디서부터 사라지게 되었는지 배경을 하나씩 열어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말과 이야기로 서로에 대한 관계를 만들고 맺음을 이루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당연한 시간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직접 만나서 말하지 않더라도 종이에 편지를 쓰거나 매체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거리를 유지한 체로도 관계가 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 들어 전기와 통신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이상 제약이 아니게 되었다. 언제어디서든 원하면 직접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종교를 포함하여 비즈니스, 교육, 행정, 등 모든 것들이 기술을 통하여 소통하는 행태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특정 기준에 맞춰서 필요한 내용 만 전달되고, 기준에 맞지 않은 부정적인 내용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을 남길 수 없게 된 점이다.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꿈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금기를 건드리는 신화 속 인물들이 모두 봉변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듯이 오래된 꿈을 향한 도전은 반쪽자리 성공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처를 주었던 과거, 현재의 고난을 만든 것으로 판단되는 과거는 모두 기억에서 지우고 깨끗하고 찬란한 현재만 남기는 노력을 취하면서 역설적으로 미래로 나아갈 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 자유롭게 쾌락을 더 자주 접하고 즐기는 것 밖에 없게 되는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비극은 슬프고 아쉽고 아프지만 그 부정성에서 미래나 희망으로 향하고자 하는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여정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비극이 없는 과거, 아무 걱정이 없는 현재는 '의미'의 필요성이 사라진다. 다른 어려움이 많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선택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에로스는 이러한 상태를 지향한다. 한병철이 나르시스트의 사랑에서 에로스를 발견하는 것의 어려움을 설명할 때도 의미를 상실한 방향성을 언급한다. 선택지와 기회가 다양해지고 무한에 이르게 되면서 사람을 대할 때도 한정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상황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단절, 괴리, 더 나아가서는 악의적으로 대하는 행동이 더욱 쉽게 벌어질 수 있다. 


의미가 중요하지 않게 된 배경에는 실제로 발전한 기술속에서 통용되는 정보의 확장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속에서는 과다한 정보가 있고 불필요한 것까지 모두 노출시켜야 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냈을 때는 가려짐을 통해 얻어냈던 상상의 영역도 무너지게 된다. 아직 알지 못하는 곳으로 한 번 뛰어들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 번 저질러 보는 시도는 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이미 경험한 사람들의 후기를 검색해보지 않은 게으름으로 치부된다. 주로 소비의 차원에서 손해를 보거나 안전함이 확보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기준을 만드는 구조이다. 


발전한 커뮤니케이션 기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소통 행태, 그로인해 번지고 퍼져 나가는 사회현상에서 에로스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한병철의 지적은 느닷없지 않다. 위 3가지를 모두 실현 가능한 기업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유망한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앞으로 에로스가 없는 현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타인을 덜 필요로 하는 문화는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이다. 한병철의 분석은 에로스 없는 사회의 파장이 어디까지 침투하는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과거와 현재에서 극복할 만 한 고난과 고통을 싹 잊었다면 미래로 향해 나아갈 동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생산과 소비 활동 참여에는 분노라는 감정 만으로 충분하지만, 정답 같은 현실에서 새로운 미래를 탄생시키고자 하는 힘에는 용기라는 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용기를 배제한 분노는 분석과 성찰보다는 계산과 사실을 따진다. 왜 실패했는지, 아쉬운 것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지 않고 수치가 어떻게 변했고 그 결과를 어떻게 적용할 지 만 고민하는 것이다. 한병철의 성찰은 에로스를 둘러싼 상관성을 드러냄에 목적이 있다. 자본주의는 틀린 체제라느니,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는 도덕성이 없다느니, 공동체를 떠난 개인들이 잘못했다는니와 같은 무차별적인 강경한 주장이 아니다. 어느 한 분야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식 체제의 변화를 에로스를 중심으로 각각의 현상이 상호간 어떤 원인과 결과와 영향이 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활동, 과다한 정보가 흐르는 커뮤니케이션 영역, 무한한 선택지를 부여 받은 개인들이 만났을 때 에로스가 성립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음은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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