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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in Aug 08. 2023

이것을 의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새로운 질문을 제기해서 어지러운 이곳에 변화를 상상한다

의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선물이다. 인간은 의미를 들고 살아간다. 모든 것에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우주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인류는 가설을 던지고 질문을 확립해 문명을 창조했다. 문명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밤이 모여 사상적 토대라는 아침이 현대 앞에 차려졌을 뿐이다. 경험적으로 모순이 많은 문명과 허무한 질문들에 지루해진 사람들은 지적인 가치와 현실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면서 의미를 찾기도 한다. 남을 파괴하면서 얻는 의미는 건강한 방법은 아니다. 남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생각조차 무너지게 돼 더욱 괴로워질 수 있다. 


인간은 자주 위태롭고 어려움에 처한다. 그때 곁에 두고 있던 많은 의미들이 매 순간마다 마음과 정신을 보호하고 지켜준다. 가족의 의미, 공동체의 의미, 사랑의 의미, 성공의 의미, 자기 자신의 의미로 이름 붙인 것 들로. 어떠한 의미를 선택해 얼마나 자기 자신과 밀접하게 연관 지어 살아가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정답은 없을지 몰라도, 의미를 부여해보지 않은 삶은 충분히 견뎌내기 버겁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의미를 불어넣은 삶의 조각들은 시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게 돕고 있다. 누군가 정한 인생이 아니어도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각각의 길에는 저마다의 자유가 숨겨져 있다. 역사 공부는 이 모든 풍요로운 일상의 출발점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분야는 역사 공부였다.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확증적인 삶 같은 것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나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을 배워보고 싶었다. 지금도 까마득해 보이는 이 시대는 과거로부터 넘겨받은 것 같고, 그 시대 사람들도 꽤 공을 들여 밭도 갈고 물고기도 잡고 전쟁까지 치러가며 남긴 유산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천천히 둘러보면서 미래를 찾아보자는 계획이었다. 


궁금증은 커다란 데 비해 역사라는 학문의 깊이는 까마득하게 멀리 뻗어나간 것처럼 보였다. 가장 최신의 경향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있고, 과학적으로 자료를 분석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에 그 방법론을 뒤엎고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있다는 광경을 둘러보니 원했던 의미 찾기가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확실한 마음속의 의지는 근거를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이, 한국인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살게 됐는지 꼭 한 번 내 글쓰기로 탐구해 보겠다는 불씨를 남겨 놓았다. 한국, 중국, 일본, 서양, 지역별로 전공이 나뉜 교수님들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된 학년별 수업을 지나가며 하고 싶은 것과 별개로 지켜야 하는 테두리 안에서 역사를 쓰는 법을 배웠다. 직접 서술해 보고, 발표하고, 동료들의 평가를 받으며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 관점을 개발하는 경험을 한 셈이다. 


지금 돌아봐도 학계는 통일된 정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유력한 생각들에 머물러보기로 약속한 것처럼 결론은 잠정적인 것 같다.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힘과 동시에 아직 변하지 않은 가치 속에 과거의 방식이 훨씬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보태주는 의심이 매일 인문학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때 인문학은 스스로를 도와야 어지러운 공격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정해진 답이 없는 것이 인문학의 장점이라면 제대로 묻지 않을 때는 새로운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태생적 조건이다. 나라는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도 인문학이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처음에는 예술 분야에서 모더니즘에 반하는 형식을 지칭하고자 사용됐다. 합리성, 기능성을 거부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방식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사용 범위가 예술 분야 바깥으로 확장되면서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고 있던 근대성을 회의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근대성은 실험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파헤치고 정리해 다른 개인들과 합의하고 약속해 나가면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지향점이 있었다. 역사학 이야기를 하자면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계기를 만든 아이디어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여 있는 많은 학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름대로의 생각을 공개한 것이다. 


연구 논문을 쓰고 여러 이론적 지식을 토대로 탐구하는 전문 역사가의 역할도 있지만, 각자가 자신의 역사를 쓰면서 대중적 이야기가 부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위에서 소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동향이 있다. 단 한 가지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는 저문 지 오래된 것이다. 특정한 인종, 대륙, 직업을 가진 부류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자신의 생김새대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개성대로 말하고 쓸 수 있는 시대까지 와 있는 시점이다. 적어도 역사 서술 안에서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가정이라면 누구의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권리가 증대된 상황이다. 


말해놓고도 학문 세계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의 현실에는 늘 괴리가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 사이 거리를 좁혀준 적절한 사례는 '노베르트 엘리아스'라는 사회학자가 쓴 <모차르트>라는 책이었다. 거대한 흐름으로 시대를 거슬라 올라가는 관점에 일상생활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결합해 모차르트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특정 사건과 시대 상황과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따로 떼 놓고 보지 않도록 알려준 교육 자료였다. 모차르트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보통 사람들이 해내지 못하는 음악을 창조하는 신이 아니라는 관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궁정 귀족이 실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대 말기에 그들의 위해 일해야 하는 시민 계급 출신의 운명을 모차르트에게서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가 천재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시대의 관습과 사회관계가 그에게 저항의 힘을 가져다주었고 그 안에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도록 만든 점을 간과하기를 즐기곤 한다. 


모차르트 같은 특별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자신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현대사에 대한 역사 글쓰기를 시도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일종의 마침표를 찍어보면서 하나의 책장을 덮고 그다음 책을 고르고 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현대사에 손을 대기 전에 고대, 중세, 근대에 관한 수업을 듣고 여러 방법론을 들여다 보고 각 시대마다 인정을 받았던 역사가들의 관점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됐다. 상황을 서술하는 주체와 자료 분석은 누구의 손에 맡겨져 있는지, 사건의 주인공들을 지켜보던 외부의 시각은 어떠했는지, 세계는 당시에 어떠한 고초를 겪고 있었는지, 누군가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 이분법적 답을 위한 논쟁을 피하고 대화와 토론의 장이 자연스럽게 열렸기 때문이다.


교수와 동료가 있었던 강의실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소논문과 역사 글쓰기 마침표를 찍었다고 해서 역사 쓰기와 자신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은 다시 새로운 나에 대해 익히고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학문을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알아가던 시점의 내가 있었다면, 그 이후를 살면서 또 한 번 새로운 변화의 기로에 도착한 나 역시 정체성을 되묻고 얻은 나름의 답을 통해 또 나름의 자유가 있는 미래를 골라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남긴 발자취에서 개인이 아닌 사회와 연결되며 지금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문화를 형성하고 저항하고 부딪히면서 생겨나는 에너지들로부터 맞물리며 영향을 주고받고 과거와 미래를 더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가는 직업이 될 수 없다. 끝없이 고쳐 쓰고,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수정해 보고, 고정불변하지 않은 가치에 끊임없이 변화를 가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이후에 살아갈 이들을 위해 남기고 전할 뿐이다. 우리도 언젠가 역사에서 발견한 공동체나 실제 사건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거나 더 구체화된 의미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과거와 연대감을 느끼면서 뿌리 삼아 용기를 낼 수 있다. 분명히 그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사고, 인간의 정, 의로운 행동에 타당한 근거를 대며 의심하는 과정은 성찰의 여지가 있다. 의심에서 그치지 않은 새로운 시선은 인간을 새롭게 구할 수 있다. 그러기로 정하고 가치에 맞게 행동하고자 일치시키면 그때 비로소 그 시대에 부합하는 예술, 과학, 인문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것이 진실에 가까운지, 다시 한번 역사적 기억과 의식을 재검토해본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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