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리뷰어인가
관심 있는 대상을 몸소 겪고 난 후, 또 다른 사람에게 글로써 전해야 할 때 리뷰나 비평을 하곤 한다. 리뷰가 형식면에서 자유롭다면 비평은 현재와 과거에 축적된 학제적 연구를 토대로 둔 기준이 있다. 리뷰와 비평의 목적이나 효과는 닮아 있다. 한 인간의 관점을 통해 관심 있는 대상이 지닌 가치를 전하는 일이다. 어떤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괏값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어디에서 온 누가 썼는지도 퍽 중요하다.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글에서 드러난 논조를 통해 유추도 가능하다.
리뷰와 비평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있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을 위해 작성하는 개인적인 편지가 아닌 이상, 최소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에게 특정 주제에 관한 의견 전파를 전제한다. 원활한 의견 교환을 위해 화두를 꺼낸 이유와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집어넣어 결국에는 해당 주장이 터무니없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 리뷰와 비평 자체에도 매력이 있으려면 분명히 허황되지 않았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시각을 열어젖혀야 한다. 당장 그 리뷰나 비평이 전하는 가치를 접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만드는 힘을 말한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관련한 수많은 가치를 소개하는 글이 매일 눈앞에 펼쳐진다. 그중에서 직접 주제를 고르고 편집해 전하고 싶은 분야는 문화였다. 문화연구나 이론을 통해 다가오는 글의 매력은 좁혀진 일상의 눈을 확장시키는 통로였다.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고, 총체적 이해 능력을 바탕으로 복합적인 사고의 결과물로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은 문제를 건드려보고 자신,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고민하게끔 만드는 충동을 일으켰다.
암기력이나 지식 저장 기술이 뛰어나지는 않아서 모든 것을 척척 알려주는 선생님은 될 수 없었다. 단순히 문화에 대한 지식을 나열하고 고급정보를 공유한다는 것보다 문화를 알고 읽으면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구체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다. 끝내 지향하려는 곳은 삶을 관리하고 가꾸는 데 필요한 통찰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예술 작품이나 흥미로운 책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의미도 좋지만, 그로 인해 각종 사안을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 갈 수 있는 틀을 제시하고 싶었다. 넓디넓은 문화계, 전체 사회, 국가, 세계의 위치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나 대상이 갖는 호응성은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온라인 글쓰기를 통해 누구나 리뷰와 비평에 쉽게 가담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지금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존 미디어가 담고 있지 않은 구체적 정보들을 엮은 생산적 읽을거리는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고 감각했다. 커뮤니케이션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묘사와 분석을 통해 정서적 소통을 이뤄야 했다. 일상에서 누구를 만나든 정해진 답처럼 뱉어야 하는 이야기 말고, 사안을 보는 관점을 보조할 수 있는 전체 그림을 보는 시야를 키워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좋지만, 의견 교환조차 겁을 낼 정도로 말초적 신경만 행복한 말하기도 언젠가는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함께 놓고 토론할 수 있을 만한 소재는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다만 스스로 작성하는 리뷰가 바람직하고 옳은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 사실과 사변을 구분해 말하고 있는지, 공공과 시민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의견은 충분히 적극적인지, 자신의 호기심과 즐거움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지는 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언젠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싶은 리뷰 글은 이러한 모습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긴 글이나 수지타산에 도움 안 되는 문화 소식이 안 읽힌다는 편견이 있지만, 변별력을 갖추고 있다면 사람들은 읽는다. 기존에 쉽게 통용되지 않는 관점일수록 그렇다. 원래 있었던 관점이나 해석보다 내 눈으로 관찰한 재료들을 가지고 내 목소리로 재구성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간절할 때부터 리뷰에 적극적이었다.
지금까지도 문화 리뷰와 비평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은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당대 주요 사회 현상을 문화사적으로 고찰하는 기획자였다. 학생 신분일 때는 예술과 철학 이론 관련 학자들의 이론을 익힘과 동시에 늘 질문과 토론의 공간을 여는 데 앞장서고 이끌었다. 문학 작품 하나를 해석하면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집어넣어, 비평이라는 행위가 닿는 범위를 광활하게 확장했다. 관심 있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작은 사회뿐만 아니라 전체 세계를 관통하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쓰면 쓸수록 참고하고 조사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과 자료로 자연스럽게 세상을 보는 눈은 한 뼘씩 자라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처럼 혹독한 비평 인생을 살아갈 정도로 간절함은 없겠으나 대체로 나만의 글이 어디로 성장해 나가는지는 명확해졌다. 어딘가에 글을 남기고, 또 다른 바깥 경험을 추가해 새로운 리뷰로 넘어갔을 때는 스스로도 추가된 관점들을 소화한 상태였다. 구성됨과 재구성됨을 반복하는 리뷰 쓰는 나날은 분명히 어딘가로 나아가는 동력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은 빠르게 발전한 한국 사회 속에 숨겨진 현재를 발굴하는 데 여러 수단과 도구들을 동원하고 있다. 리뷰와 비평에 다양한 우화들을 펼쳐 놓고 위선적인 정당성은 배재시킨 역사적 해석을 추가하려 한다. 한국인이나 한국민족 말고 한국문화는 어디로 가려했는지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한국문화에 감춰진 가망성을 꼭 풀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