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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Dec 08. 2021

당신이 기쁨을 느끼는 그곳이 옳다

-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를 읽고 - 

  《2020 제1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단편 중 읽다 만 작품을 읽었다. 이 작품집에는 퀴어 소설 두 편이 실려 있다. ‘퀴어’ 담론은 영화나 TV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종종 접했지만, 소설로 읽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아니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기억을 못 하는 것이리라. 밑줄까지 좍좍 그어가며 읽은 책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더 많으니까.    

  

  퀴어 소설인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는 읽고 나서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슬픈 것도 같고, 쓸쓸한 것도 같고, 아린 것도 같고, 허망한 것도 같았다. 화자로 등장하는 재현은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자신과는 다른 성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에 일찍 들어온 어느 날, 우연히 아들이 보고 있던 영상 속 장면을 보게 된다. 남자 둘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재현은 아들을 향해 “더러운 놈”이라고 외치며 아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재현은 그때 아들을 죽일 듯이 때린 것이 아들을 향한 분노가 아닌 “불시에 들이닥치듯 자신에게 찾아온 그 우연을 없애버리고 싶어서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이야기는 재현과 아내가 삼 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만나러 호주로 날아가, 아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 여정을 따라가며 난 내내 마음이 아렸다. 재현과 그의 아내가 뭔가 잃어버릴 것 같다는,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떠나기 전 재현의 아내는 아들에게 줄 옷가지며 라면, 마른반찬 같은 것을 상자가 미어터지도록 담았다. 여느 엄마들처럼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 싱가포르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며 재현은 “인생을 다 산 끝에 가장 낯선 곳에 떠밀려 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딜 가도 눈에 띄던 아들, 공부도 축구도 잘하던 아들,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 짓게 하던 그 아들이 지금 너무 멀리 있다.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점점 멀어져 가는 아들을 끌어안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재현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소설을 읽는 내내 성 소수자로 살아가는 영재보다 재현과 그의 아내에게 마음이 더 쓰였다. 처음 아들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었을 때 받았을 충격과 혼란, 다른 세계 속에 사는 아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들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런 경우 자기의 일이 아닐 땐 대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고난 성 정체성은 당연히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기 일로 들이닥쳤을 땐 단번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끈들이 뚝뚝 끊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잠깐 뒷걸음을 치기도 할 것이다.      


  호주에 도착한 재현은 아들이 건장한 체격의 흑인 노인과 허벅지에 커다란 문신이 있는 어린 여자애와 셋이서 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도 어둡고 지저분한 집에서. 재현이 사는 이쪽 세상과는 다른 그들만의 세상에서 아들은 노인과 여자애랑 셋이서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재현과 아내는 세 사람이 맞이해 기꺼이 환대하는 손님의 자리에 불편하게 앉아있어야 했다. 부모인 재현과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흑인 노인과 어린 여자애가 있었다.


  아들 집을 뒤로하고 바리바리 싸서 갔던 상자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아내는 “본능적으로 이제 영원히 아들을 잃었음”을 느낀다.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무너지고 있을, 황량하기 그지없을 그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재현은 눈을 감은 채 아들과 노인, 어린 여자애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눈 부신 빛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 있어 행복해하는 아들 모습을 보았다. 재현이 아들 영재가 사는 세상을 받아들였다는 의미 이리라. 기쁨이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아들이 사는 세계를. 그런데도 책장을 덮는 내 마음은 슬프고, 아프고, 쓸쓸해졌다.      


  살다 보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내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내 안에 뿌리 박힌 의식과 가치를 뒤흔들며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사건들 앞에 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기보다 마음을 열어라, 그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여라.’ 여러 해결책이 제시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해결책은 아프고, 힘든 시간을 건너기 전엔 무용한 것들 이리라. 그래도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사랑’ 임이 분명하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존재들을 끌어안기 위해서. 작가의 말처럼 “우리 일상을 밝히는 소중한 촛불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작가 노트에서 읽은 말이 자꾸 떠오른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는 그곳이 옳다. 옳다. 그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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