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되어서도 달릴 거예요
활기, 희망 마침내 중심
네 번째 '달리기', 달리기가 준 영향에 대해 써보세요.
'달리기'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소재란 생각이 들면서도 깊이 빠져 있는 것일수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담고 싶은 것이 많아 우왕좌왕하지 않을까 염려하지만 일단 써보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고고고~!!!
성인이 되어 처음 러닝화를 신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초입. 큰아이 모유수유를 끝내고 급격히 불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 유산소로 달리기를 택했을 때다. 집에서 가까운 운동장을 유일하게 허락된 새벽에 뛰었다. 뛰고 와서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샤워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아이만 키우던 나날에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의 달리기는 '활기'였다.
이어진 출산과 육아, 사회생활, 아버지와의 합가 등 많은 역할을 해내야 했던 시기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몸에 병이 나고 일상이 잠식됐다. '화폐상 습진', 온몸을 뒤덮는 수많은 동전모양의 수포들이 가려움에 들끓으며 시간을 파고들었다. 낮에도, 밤에도, 일을 할 때도, 집안일을 할 때도 가려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밤은 두려웠다. 잠이 들면 더 심해지는 가려움에 수없이 눈뜨다 일어나고 억울함과 분노, 화가 치미는 순간엔 열이 오르듯 터질 듯한 가려움에 밤을 지새웠다. 잠을 못 자면 따라오는 예민함과 피곤함은 일상을 무너뜨렸고 아이들에게마저 소리치던 날에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있지 않겠나' 고개 숙여 눈물짓는 날들도 있었다. 이른 새벽잠이 깨면 멍하게 TV를 본다.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면 제어가 되지 않는 가려움에 몇 시간 넋을 놓고 있으면 여명이 드리웠고 마음은 착잡했다. 가려움은 잊었지만 소중한 시간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구정물처럼 버려지는 것 역시 회의와 무력감으로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날은 발바닥에 잡힌 수포의 가려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왜! 왜! 왜! 왜 나에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홀로 분노하다 칼로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 무작정 거즈를 덧댄 채 운동화를 신고 나와 뛰었다. 아직 빛이 없는 거리, 엄마가 감정에 못 이겨 아이 엉덩이를 후려치듯 죄 없는 발을 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그럴수록 가려움이 일었지만 숨이 차오르면 잊혔다. 더 멀리, 더 힘차게 달리며 가려움을 잊는 시간이 반복되니 마음에 무거움도 덜어졌다. 뛰고 난 후 피와 진물로 범벅된 양말과 운동화는 잔인해 보였지만 마음은 평화로웠다. 나의 통제 안에 약 없이 가려움을 덜어내고 유용한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감, 이전에 느꼈던 활기가 죽은 사람의 가슴에 연둣빛 싹을 틔었다. 달리기가 '희망'을 주고 있었다.
이후 달리기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병도 이어지고 있다. 약 8년의 시간, 달리기를 한다 해서 병을 말끔히 이겨냈다는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달리기를 통해 체력을 키우고 즐거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삶의 토양을 넓힌다. 함께 달리고 도전하는 사람들, 우리 삶에 녹아있는 달리기로 반추하며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달릴 수 있는 것이 주는 감사함, 사소함에 만족을 느끼는 시간은 '지금을 사는 삶'으로 늘 깨어 있게 한다.
한계에 부딪히고, 실패하고, 다시 나아가는 체득의 달리기는 '행동'을 이끄는 강인한 도구다. 책과 글이 성장의 '머리(head)'라면 달리기는'몸(body)'이 되어 준다. 실제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보다 실행이 듯 무언가를 계속하고 그것에서 얻는 경험은 가장 빠르고 알맞은 계획이 되어 진정한 성장으로 이끈다. 실행이 늘 힘겨웠던 나에게 달리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감정, 생각, 행동을 아우르는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생명이 유지되는 한 계속 달릴 것이다. 달리는 것을 통해 '지금'을 살고 사유하며 깨닫고 싶다. 삶이 주는 투명한 진리에 탄복하며 감사히 살아가련다. 매우 존경하는 분의 말씀처럼 "할머니가 되어서도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