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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와우 Mar 24. 2022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주절거리다 깨닫게 되는 것 들.

일상을 이어가는 오늘. '엄청나게 아프고 힘겨워 버텨내자!'가 아니라, 그렇지 않기를 '아빠도 바랄 것 같고 나도 그게 맞을 것 같다'는 막연한 바람에 달라짐 없는 일상을 보낸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다 잠시 의자에 앉았는데 혼잣말을 한다.

"아빠 괜찮지? 내가 이렇게 지내도 괜찮지? 아빠도 바라지? 다 알아 아빠가 보고 있는 거, 어딘가에 있다는 거." 중얼거리는데 코가 막힌다. 눈물이 찬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괜찮다'며 들썩이지 않을 만큼 우는데 잠시 두려워진다. '이러다 너무 슬퍼지면 어쩌지, 내가 감당이 안되면 어떡하지? 슬픔이 너무 오래가면?' 좀 기가 찬다.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었나? 결국엔 많이 울지 않고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 건 나를 위한 것이었나? 내 삶을 놓치고 싶지 않음 때문에? 스스로가 못됐다고 느껴지니 기분이 상한다. 눈 사이 주름이 지고 다문 입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한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깊은 생각 속에 불쾌함이 지속된다. 복잡하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묻는다.

'그럼 충분히 울까? 멍하게 있을까?',

'아니', 그건 싫다. '아니다'라는 확신의 답이 나온다.

아빠는? 내가 많이 울고 많이 멍하고 그러면... 아빠는 만족할까? 이것도 '아니'.


우리 막내는 웃기면 깔깔거리고 웃는다. 내 친구 딸은 웃기면 '안 웃긴 척'하며 숨어서 웃는다. 누군가는 민망할 때 얼굴이 붉어지고 누구는 화를 내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다. 느끼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나의 애도, 아빠의 떠남을 슬퍼하는 과정은 '일상을 살며 추억하고 잠시 슬퍼하다 다시 잘 지내는' 그런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의 당위성은 '아빠라도', 아빠가 나를 잃어 슬픔이 차더라도 아빠는 일상을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어렸던 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어떤 날은 TV 보며 술 마시다 말도 안 되게 울테지만 아빠는 많은 날들을 괜찮은 척, 밀려오는 감정들을 끊어내고 끊임없이 자신을 일으키며 매일을 살아낼 것이란 것을 안다.


혹시나 '덜 슬퍼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너무 이기적 이어서 이런 것일까?' 나를 의심하며 혼란스러워지는 감정에 '아니'라고, '너는 아빠를 닮아 비슷한 거라'라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답이 정해진다.

'그래, 나는 아빠 딸이었다. 아빠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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