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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eek Nov 01. 2020

갈등이 남긴 씨앗

B Side: 보여주고 증명하라

29. 갈등이 남긴 씨앗


'진짜 힙합'을 논하며 시작된 동부와 서부의 갈등이 비기의 <<Life After Death>>로 끝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동부는 서부의 갱스터 랩을 배척했지만 마피오소 랩을 발전시켰고, 상업적인 음반을 높게 치지 않았지만 다이아몬드 앨범을 배출했다. '힙합다움'에 대한 논의가 싸움의 가장 큰 명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 된 것이다. 비기의 죽음으로 잠깐의 침체기를 겪은 후, 힙합 시장은 퍼프 대디의 상업적인 음반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그럼 무엇을 위해 싸운 걸까, 힙합은 여기에서 무엇을 발전시켰을까.


'보여주고 증명하라(Show & Prove)'는 힙합의 오래된 격언은 보통 마이크 앞에 선 MC들에게 요구된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하는지를 라임으로 보여주고 증명하라는 것이다. 힙합은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어두운 밑바닥, 게토에서 시작한 장르인 만큼, 상대방의 가식과 위선을 눈감아 줄 여유 따위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때로 재미있고 멋진 모습들로 나를 포장할 줄도 알아야 한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잘해야' 한다. 종종 스포츠에 비유되는 경쟁으로서의 힙합에서는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오히려 진실은 후순위에 놓일 때가 많다. 무엇을 하든 마이크 앞에서 보여주고 증명하라, 그렇지 못하면 그게 무엇이든 진짜가 될 수 없다.1) 2)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뉴욕과 LA는 서로 4,0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이들은 흑인 게토라는 점만 제외하면 아예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동서부 각자의 음악은 자신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문화적인 뿌리였을 것이다. 동부는 힙합 문화의 원류로서, 서부는 저항 문화의 선봉으로서 나름의 자부심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투팍과 비기는 각자의 뿌리 끝에 걸린 사명을 충실히 이행했고, 몇 장의 앨범을 씨앗으로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힙합은 빠른 속도로 뿌리를 뻗어나갔다.


퍼프 대디의 상업적인 음반들이 힙합계의 아픔을 달래주고 있을 때, 이번에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세대의 힙합이 탄생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출신과 스토리로 주류 시장에 또 다른 '진짜 힙합'을 증명하려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 프리스타일의 기반을 통해 최초의 백인 스타가 된 '에미넴'과 경쟁적인 힙합을 일깨운 '50센트'가 대표적이다. 또한 남부의 애틀랜타, 마이애미, 그리고 뉴올리언스는 지역적으로 소비되던 그들만의 힙합을 거대한 돌풍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아웃캐스트'와 '구디 몹'이 선보인 '더티 사우스' 스타일이나 '마스터 P', '주버나일'이 주도한 '뉴올리언스 바운스'는 힙합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들 남부 힙합은 훗날 '티아이'의 앨범에서 처음 선보인 '트랩' 음악의 탄생과 더불어 '릴 웨인'이라는 슈퍼스타를 배출했다.


따라서 동부와 서부 둘 중 무엇이 '진짜 힙합'이냐는 질문은 애초에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 그들 각자는 이미 가장 힙합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과정에 있었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음악적인 성취를 선보였다. 그리고 삶을 불태울 만큼 열정적이었던 투팍과 비기, 둘의 죽음은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종류의 새로운 힙합이 스스로를 증명해낼 수 있도록 훌륭한 나침반을 제공했다. 이들의 방향을 좇아 도전장을 내민 수많은 신예들에 의해 힙합은 변화하고 발전했다. 20년도 더 지난 그들에게 찬사가 계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지만, 내가 힙합을 좋아했던 이유 역시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이번 <쇼미더머니 9>에서 코드 쿤스트가 '기믹 판독기'를 자처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힙합에는 소위 'Street Cred(스트리트 크레드)'라는 것이 있다. 거리의 삶을 노래하는 뮤지션이라면 실제 삶도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약을 노래하려면 마약을 해봤어야 하고, 여자를 노래하려면 실제로 포주였어야 진정성이 있다. 하지만 단어에서도 보이듯, 이건 진실이 아니라 신뢰도(cred)의 문제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갱스터 랩의 시초인 아이스-티는 갱스터인 적이 없었고, N.W.A 역시 대부분 갱단과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거짓말을 했지만, 너무 잘했다. 보여주고 증명한 것이다.


2) 이런 면에서 힙합을 '이중적' 또는 '가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이 많은 척, 센 척, 위험한 척,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척, 혹은 개성이 넘치는 척. 갖가지 '척'이 난무하는 힙합에 거부감이 든다면 오히려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물론 척을 하지 않는 힙합도 정말 정말 많다). 하지만 힙합 팬으로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힙합에서 당당히 '척'을 하고 또 팬들이 여기에 순순히 크레드를 보내는 이유는, 나를 정의하는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놓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남들과 같은 삶을 살게끔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힙합의 '척'은 기본적으로 이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돈과 여자, 인기, 개성에 대한 내 욕망을 당당히 표현하는 것, 오히려 이 편이 더 솔직해 보이지 않는가? 주석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큰 주제이니 이쯤으로 마무리하겠다. 아무튼, 그런 척도 '잘해야' 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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