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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eek Nov 01. 2020

All Eyez On Me

5집: Rest In Peace

27. All Eyez On Me


그런데 한편으로, 투팍이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일면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가 총에 맞은 곳이 뉴욕인 것은 사실이나, 비기는 그와 절친한 친구인 데다 배드 보이는 오히려 총에 맞은 그를 구해준 은인에 가까웠다. <Who Shot Ya?> 역시 색안경을 빼고 본다면 본인들이 유행시킨 갱스터의 유행에 꼭 맞는 컨셉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돌변한 그의 태도는 그가 말했던 'THUG LIFE'와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변화의 원인을 짐작하기 위해선, 먼저 이 시기 투팍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가 스스로 취했던 갱스터 힙합에서의 상징은 사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그는 저항의 아이콘으로서 갖가지 시련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찰들과의 대립이었다.


일례로 그는 1991년 무단횡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오클랜드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게 된다. 여러 인터뷰에서 그의 친지들은 이 사건이 투팍을 점차 하나의 정체성으로 몰아갔다고 말한다. 시인인 동시에 혁명가, 갱스터인 동시에 인권운동가였던 그가 점점 폭력적인 갱스터 하나만을 고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 번은 비번이었던 사복 차림의 경찰관 둘과 시비가 붙자 그들을 총으로 쏴버린 적도 있었다. (해당 경찰관 중 하나가 미허가 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거짓 진술한 것이 인정되어 형량을 받지는 않았다)


"내가 투팍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찰들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고 감시하는 처지에 관해 이렇게 답했다. 마치 80년대 크랙 단속에서 흑인을 차별했던 것처럼, 그는 같은 잘못을 해도 더 큰 처벌을 받았고 때로는 없던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했다. 경찰과 언론은 갱스터 힙합의 상징인 투팍을 통해 힙합과 흑인에 대한 차별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투팍의 이런 생각은 그의 성폭행 사건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그의 혐의는 1년 전 그와 그의 로드 매니저를 포함한 네 명의 남성이 호텔 방에서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며 재판의 결과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공범으로 지목된 나머지 둘이 재판에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둘의 재판은 투팍과 분리되어 진행됐으며 처벌을 받지 않았다.1) 투팍은 자신이 경찰뿐 아니라 사법체계의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1995년 수감될 당시 투팍의 머그샷

진실이 어찌 됐건 투팍은 총에 맞은 뒤 얼마 안 가 성폭행으로 감옥에 갔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의 생각처럼 판이하게 갈렸다. 억울한 누명을 쓴 시대의 혁명가, 혹은 인권운동의 탈을 쓴 파렴치한 성추행범. 이런 수준의 괴리는 투팍 스스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앞선 글에서 투팍이 모순된 정체성을 모두 가져갔기에 유일무이했다고 표현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총 맞고 감옥에 갇힌 성추행범이라는 처지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갱스터의 모습을 통해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투팍에게 접근한 이가 있었다. 닥터 드레와 스눕 독을 필두로 서부 씬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 데스 로 레코즈의 수장 'Suge Knight(슈그 나이트)'였다. 그는 투팍에게 보석금을 내줄 테니 데스 로와 세 장의 앨범을 계약하자는 제안을 했다.


여기서 잠시, 슈그 나이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힙합계에서도 거칠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닥터 드레가 데스 로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슈그 나이트가 제공하는 강렬한 갱스터의 이미지였는데, 이것이 후에 드레가 데스 로를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슈그는 아티스트에게 진짜 갱스터가 되기를 주문했고, 데스 로는 힙합계의 갱단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슈그가 투팍의 영입을 시도했을 때 투팍의 절친한 동료 몇몇은 그 제안을 거절하기를 바랐다고 한다.2) 하지만 그에게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회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데스 로의 간판을 걸고 네 번째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All Eyez On Me>>

<<All Eyez On Me>>(1996). 이 제목은 그가 갱스터의 길을 택하게 된 이유를 함축하고 있다. 최고의 스타이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시선들, 이를테면 팬과 동료들, 경찰과 정치가들, 그리고 안티와 경쟁자들의 시선이 그의 거친 내면을 자극했다. 이전까지의 앨범이 일면 세상을 노래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었다면, 이 앨범은 보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런 솔직하고 거침없는 모습은 갱스터 힙합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투팍은 더욱 성장한 랩 스킬과 강렬함, 드레를 비롯한 데스 로의 프로듀싱에 힘입어 갱스터 힙합의 명작을 완성시켰다. 이 앨범은 1천만 장이 넘게 팔리며 다이아몬드 앨범이 됐다.3)




1) 투팍의 성폭행 사건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피해 여성과 투팍의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 피해 여성은 그녀가 투팍과 관계를 맺으려는 순간 호텔에 있던 다른 세 남자가 방에 들어왔고, 투팍이 "이들은 내 아들들이다.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들과 공유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한 뒤 성폭행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투팍은 혼자 마사지만 받은 뒤 성관계 없이 방을 나왔다고 말했으며, 재판에서 빠져나간 두 사람이 피해 여성의 거짓 주장과 관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언쟁이 있다고 해서 제삼자인 우리가 재판의 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투팍이 성폭행 혐의로 징역을 산 것은 사실이고, 이는 투팍의 커리어에 커다란 오점이 됐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이 사건이 투팍의 음악과 힙합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2) 동료들의 입장에선 투팍이 데스 로에 들어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팍은 스스로의 음악으로 이미 갱스터 힙합의 아이콘이 됐고, 그 이미지는 단순한 갱스터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가 감옥에 들어간 직후 발매된 그의 3집 <<Me Against The World>>(1995)는 곧바로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정상에 선 옥중 앨범이 됐다. 그런데 그 투팍이 데스 로에 들어간다는 것은 영웅으로서의 갱스터를 포기하고 그냥 제일 거친 갱스터를 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투팍의 동료들은 그의 데스 로 행이 스스로를 망치는 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3) 그리고 이로써 '배드 보이 vs 데스 로'의 구도가 완성됐다. 90년대 동서부의 갈등은 대부분 이 두 레이블 간의 갈등이었다. 따라서 이를 두고 90년대 모든 뮤지션들이 어느 한쪽에 서서 싸웠던 것처럼 본다면 조금 지나친 이해다. 서부의 힙합이 동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자신만의 힙합을 만든 것처럼, 동서부의 갈등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힙합을 키워 온 뮤지션들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 간의 갈등이 당대 힙합 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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