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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화가가 될 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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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돌잡이 때 연필을 잡았고,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였다. 미술학원을 7년 정도 다녔던 것 같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가 화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좀 뻔뻔하게 말하자면,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이 내 그림 실력의 황금기였다. 자신만의 그림체를 찾고서 펜을 휘두르던 그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미술학원 대신 입시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왜인지 나는 수능 공부를 해야만 했었다. 제기랄, 화가가 될 거라면서? 나는 너무나도 어리숙했고,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는 그림과 멀어졌다.


그게 내 인생의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나는 그림밖에 몰랐다. 그걸 잃어버린 내가 다른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공부를 해서 점수가 잘 나오면 부모님은 기뻐했다. 그냥 그 메커니즘에 기댔다. 공부를 한다, 부모님이 기뻐한다, 내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현실에 안주한다.


미술 수업이 있으면 미술실로 교실을 옮겨 갔다. 미술실이 가까워지면 물감 냄새가, 그 익숙한 미술학원의 냄새가 났다.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설레었다.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친구들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멈춰서서 액자 속 그림을 들여다봤다. 굳어버린 물감에 남아있는 붓의 질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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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이나 잉크로 바로바로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을 좋아했다. 종이 위를 내달리는 그 부드러운 사각거림을 특히 즐겼다.

내 프로필 사진이기도 한 이 그림은 약 10년 전에 그린 그림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려서 그린 건 아니고, 어떤 드로잉 책에 있던 삽화를 그대로 따라 그린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자오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후부터 줄곧 이 그림을 같이 사용해 왔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자오라는 이름과 이 그림이 서로 비슷한 그림체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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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다. 이 글을 쓰면서 조금이지만 또 가슴이 뛰었다. 그림을 그릴 때의 감각이 여태 잊히지 않았다. 종이와 맞닿은 펜, 펜을 잡은 손끝에 징징 울리는 맥박, 그 감각. 울음이 터질 것 같다.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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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게 잘 그리는 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눈에 띄었고, 미술학원 선생님이 나를 아꼈지만, 내 재능은 애매했다. 좋아한다곤 했지만 무진장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내 한 줄기 빛이었던 그림조차도 나는 그럭저럭 대해왔다. 다른 변명을 해봐도 그냥 내 잘못이다. 그림은 내 손을 떠났다. 감상적으로 된 마음을 그렇게 다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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