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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 물건을 왕창 버린 적이 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다. 충동적인 비움은 좋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뭘 버렸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고, 버린 것들 중에서 혹시 중요한 게 있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버린 것을 어찌하랴.
어제는 옷을 정리했다. 수년간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입지 않는 옷들을 밖으로 빼냈다. 중고로 팔 수 있는 옷과 도무지 팔 수 없을 것 같은 옷으로 구분했다. 전자는 눈에 보이는 곳에 걸어뒀고, 후자는 그날 바로 버렸다. 분명 버리기로 마음먹은 옷들인데, 막상 의류 수거함에 넣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에 넣으면 다시는 못 보는구나. 드라마 속 이별하는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옷을 버려도 옷은 많았다. 나는 부자가 아닌데도 옷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돈을 벌지도 않으면서 많이도 사들였구나. 나를 원망하다가,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을 혼돈 속에 몰아넣었구나 싶어서. 엄마 아빠한테도 미안했고, 우주한테도 미안했다.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사로잡히진 않았다. 최근엔 감정에 압도되는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수 개월간 복용 중인 우울증 약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로잡혔다기보단, 그냥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고, 그냥 후회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이고, 좀 안타까웠던 것이다.
나의 경우는 나에게 맞는 약을 비교적 빠르게 찾은 것 같다. 단 한 번 바꿔봤을 뿐이다. 처음에 처방받았던 약은 부작용이 없었지만 효과도 없었다. 바꾼 약으로부터는 무언가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약을 삼키면 그 즉시 기분이 괜찮아지기도 했다. 그 약 덕분에 마지막 학기를 포기하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깜빡하고 약을 먹지 않은 날도 있었는데, 그날 나는 절망감에 압도되어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얼마 전까지는 약을 먹으면 괜히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약효가 있었다. 요즘은 약을 먹어도 느껴지는 즉효성이 거의 없다. 약을 좀 늦게 먹어도 심적으로 힘들지가 않다. 아니, 힘들긴 하지만, 전처럼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일상적인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범주에 나는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요즘의 나는 마치 다 나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