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날이 따뜻해서 어디론가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갈 데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선지를 쥐어 짜냈다. 몇 가지 후보군이 떠올랐는데 파기해 버렸다. 모두 애매했다.
서점에 가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낙찰이다. 우리 동네에 서점은 한 군데밖에 없다. 거기를 가느니 시내 주변의 S문고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면도도 하지 않고 셔츠와 자켓을 챙겨입고 버스를 타러 나갔다.
조금 추울까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건물 사이의 응달에는 아직 찬 기운이 감돌긴 했지만 머리 위로 내리는 햇살이 포근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오히려 조금 후끈거렸다.
나는 맨 뒤 창가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아예 창가 자리에는 햇빛이 적나라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고, 사람을 태우기 위해 멈춰 섰다. 나는 휴대폰을 보느라고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맨 뒷자리로 오더니 내 옆에 몸을 던지는 게 아닌가. 반대편 창가 자리도 비어있는데, 그는 굳이 내 다리와 앞좌석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공중화장실 소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굳이 내 옆에 자리 잡고 바지 지퍼를 내린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내 자리에서 튕겨 나가 반대편 창가로 이동할 뻔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무안해할 것 같아서 그냥 제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아마도 장애가 있는 듯싶었다. 귀에는 유선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왼손에 든 휴대폰을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주변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간헐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패자부활전!”
“시청자 여러분들 도와주세요!”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무슨 경연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하필 내 오른쪽에 앉아서 왼팔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리듬감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으레 그렇게 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조금 재밌다고 생각했다.
몇 정거장 후에 남자는 내렸다. 내리기 전에 문 앞에서 그는 나를 봤다. 눈이 잠깐 마주쳤으나 나는 별생각 없다는 듯 눈길을 돌렸다. 그가 나에게 던지는 그 시선에 대해서 내가 딱히 호의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리고 나서 보니 내 오른쪽 팔에 작은 깃털들이 묻어있었다. 그 남자는 경량 패딩을 입고 있었고, 그걸 내내 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묻었는가 보다. (하필 내 옷은 또 먼지가 잘 붙는 네이비색 면자켓이었다) 나는 내가 기분이 나쁠 만도 한 상황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깃털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버스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 S문고가 보였다. 이야, 역세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서점에 들어섰다.
발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서서 책 구경을 하진 못했다. 문고 내부에 자체적으로 카페가 있어서 음료 하나를 사 들고 자리를 잡았다. S문고에는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책을 읽어볼까. 김초엽의 에세이, 프랑수아즈 사강, 헤밍웨이, 카프카 중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카뮈였다.
못 보던 카뮈의 책이다. 알고 보니 이번에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카뮈 전집이었다. 요즘에 나오는 전집답지 않게 양장이 아닌 페이퍼북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양장이 싫다. 손에 쥐는 느낌도 별로고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양장본은 읽는 이를 배척하려 드는 것 같다.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듯 독자의 손을 떠나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려 하는 것 같다.
음료를 마시며 <적지와 왕국>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놀랐다. 음료가 맛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자몽블랙티가 맛있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 큰 고민 없이 자몽블랙티를 주문했을 뿐인데, 심지어 나는 자몽을 싫어하는데, 그 자몽블랙티의 맛이 부드럽고 향긋했다.
친구가 와서 같이 책을 읽다가 나란히 한 권씩 구매했다. 정말 충동구매 안 하려 했는데 솔직히 카뮈의 신간을 어떻게 참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책을 산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건을 가지면 잠깐 행복했다가 다시 불행해지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고에서 읽었던 책의 앞부분이 너무 좋았고, 그런 카뮈의 글들을, 남은 뒷부분을 어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S문고에 가길 잘했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순간의 행복에 겨워서 이런 일차원적이고 유치한 감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다.
문고에서, 카뮈의 글에 빠져드는 틈에 휴대폰이 울렸었다. 브런치 알림이었다. 어떤 글에 내가 댓글을 달았는데, 작가님이 답글을 달아준 것이었다.
‘날이 좋아요. 행복하세요!’
그 말 그대로였다. 기분이 좋아져서 잠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