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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ml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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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오

우울한 글을 한 단락 썼다가 지웠다. 깜짝 놀라서 컨트롤 제트를 눌러 다시 되돌렸다. 우울한 글을 눈앞에서 없애버리자 우울함이 증폭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키보드로 손쉽게 파묻은 그 감정이 생매장당한 듯 날뛰었다. 바로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와, 힘들다. 이런 상태에서는 깨어있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 요즘 들어서 우울증이 거의 다 나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갑자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감정이 우발적으로 나를 헤치려 하는 것 같다. 나는 무방비했다.


속이 쓰리고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또 나의 고통을 양분 삼아 글을 써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의기소침해진다. 제기랄, 그게 나쁜 걸까? 모르겠다. 어떤 교수는 나쁘다고 했다.


무언가 먹어야 했다. 125ml의 작은 팩에 담긴 프로틴 음료를 마신다. 추억이 잠시 떠오른다. 마지막 학기 때 기숙사에서 간식 또는 아침 대용으로 자주 먹었었다. 가장 힘들었던 학기인데 지나고 보니 이런 것 하나가 추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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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에 매달려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침대를 좋아하지만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다. 한순간의 유혹과 같은 일시적인 기분 상태. 그런 것에 내 글을 맡기고 싶지 않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키보드의 느낌과 소리가 좋다. 이 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촛불로 어둠을 조금 내몰듯 키보드의 흥취로 불안을 조금 덮어낸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곧 올 일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두려움은 멈추지 않고 돌진해 나를 들이받는다. 내 두려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할 용기는 또 없다, 부끄럽다. 두려움의 본진을 점령하지 못하고 외곽을 배회한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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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콜라주 작품을 만들다가 포기해버린 사람처럼 아까 쓴 우울한 글 한 단락을 맥락도 없이 여기에 붙여버린다.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걷기 운동을 하고 왔는데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였다. (중략) 형은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걸 수도 있겠지만, 아예 아무것도 아닌 건 또 아닐 수도 있겠지. 적어도 지금의 나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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