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샘 없는 자리에서 샘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가식적이래."
글로 적으니 마치 서바이버 프로그램에 출연한 래퍼가 면전에 대고 사이퍼 하듯 날 선 선전포고 같다. 내 귓가에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해준 건 내 자리 주변 교사들은 듣지 못하게 해 준 배려심에서였을까. 근무 시간에 내 자리까지 와서 친히 저 말을 해준 동료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할지 난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어. 은밀하게 험담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자신은 동조하지 않았다는 나에 대한 의리의 표현이었을까.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도 해. 세 사람만 모이면 그곳에 없는 사람 흉보기는 마치 험담 보존의 법칙처럼 어느 조직에나 망령처럼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혹은 유행하는 스포츠 같기도 해. 누군가를 뾰족한 말로 찔러서 끌어내리고, 그를 통해 모종의 동지애를 다지는 식의. 대신 인류애는 반납해야 하고.
아직도 교사를 편하다, 월급도둑이다 라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일까?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학교와 교사의 민낯이 드러난 요즘에 와서는 철밥통의 신화는 힘을 잃은 지 오래라고 난 생각하지만, 10여 년 전의 기류는 좀 다르긴 했어. 정교사일 경우에 해당하는 고용의 안정과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업무 강도, 여름과 겨울 방학까지. 특별한 업무 형태의 쉽고 나른한 면이 부각되어 학교 밖 사람들이 하는 비난은 곧 나를 살게 하는 힘 되었어. 내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곧 부러워서이며 질투의 표현이다. 고로 내 직업은 좋은 것.
그때나 지금이나 각각의 현장은 '학교'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기엔 사립과 공립, 지방과 서울,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처럼 저마다 처한 현실과 조건이 천차만별이었던 건 같을 거야. 내가 근무하던 곳은 각자도생 그 자체. 교육 과정의 변경과 신규 교사 대거 합류 등 학교는 내외부 적으로 과도기를 앓는 중이었어. 구성원이 원해서 만들어낸 변화는 아니었기에 모두 한두 개씩 불편을 겪고 있었을 거야. 마음이 다친 사람이 병원보다 많아 보였어. 학생들은 아프니까 학생이라지만, 교사들 모두 학교 담장은 행복을 들지 못하게 하는 경계처럼 생각했을 것 같아. 교문을 나서야 온몸에 주었던 힘을 풀 수 있었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관심 갖지 않았던 만큼, 곤경에 처한 사람들 구제는 봐도 못 본 척 하기 일쑤였지. 어린 교사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성공과 명예로 치환하는 방식을 내세우다니. 연차, 연령, 성별, 부서, 교과. 겹치는 게 많을수록 친해지기 어려웠고 서로 너무 다른 영역에 속해있거나 업무적 거리가 멀수록 가까워질 수 있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관계 맺기가 정상인 곳. 우리 학교.
건강하지 않은 조직이라 의사소통의 구조는 불투명했어. 알음알음 믿음직스러운 소통의 동지를 찾아내면 운이 좋은 것. 끊임없이 누군갈 찾아야 했어. 모였다 싶으면 다들 자신이 터득한 눈짓과 손짓, 은근한 비유 속에 암호를 담아 피아를 식별을 하는 듯했어. '인사하는 저 여자 모퉁이를 돌고도 아직 웃고 있을까 늘 불안해요.'라는 아이유의 <스물셋> 가사가 곱씹어지더라. 너도 알다시피 난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면 피하지 제 발로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잖아.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인,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고. 비슷한 나이대의 교사들이 퇴근 후 모이는 자리에 한두 번 갔는데 역시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직장에 있을 때 적당히 지내는 방법을 찾기로 했어. 조금씩 살펴보니 나와 같은 포지션을 취하는 동료들도 있더라고. 맡은 업무가 전교생과 전교직원을 만나야 하는 일이라 사실 사람 만나는 것에 에너지를 너무 빼앗기고 있기도 했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친절하고 나이스하게 하기로 했어. 그럼 마치 나에게 빚을 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그래서 업무 상 완곡한 거절이나 혹은 협조를 요청할 때 대부분 좋게 생각해 주시더라고. 그게 가식적이라는 말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곧 만만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작은 실수도 부풀려져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의 실수의 욕받이가 되는 걸 봤거든. 교무실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전해 졌을 텐데 다들 검은 정수리만 보이고 앉아 고개 하나 들지 않더라. 억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던 적도 물론 있었지. 자세히 말하면 아직도 남아있는 억울함이 차오를까 봐 이 곳에는 남지기 않을게.
학교에서 작은 실수를 하고 속상해하던 너의 말 속에서 그 당시의 너를 이끌어 주는 이가 하나 없음을 눈치챘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했어. 학교가 학교 했구나. 최연소 임용에 가까운 어린 교사의 성장을 보듬는 선배가 단 하나도 없다니.
"ㅇㅇ 부장은 뭐 하고? ㅁㅁ 담당 샘은 가만히 있었어?"
너희 부서의 연장자들의 처신에 대해 되물어 봤었지. 너무 속상해서 아무것도 잡지 않은 손에 빈 틈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베일만큼. 학교는 학생도, 교사도 배우고 성장하는 곳이어야 하잖아. 참 잘하고 있다는 격려의 말 한마디, 다음에는 다르게 해 보면 어떻겠냐는 관심의 말 한마디, 샘 수업에서 아이들이 빛나 보인다는 칭찬의 말 한마디. 지쳐있는 초임 교사를 반짝하고 살아나게 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쉬운 길을 왜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까. 너의 실수를 책망하고 힐난했다는 보직 교사들은 1년 차 교사를 대할 때 갖춰야 할 리더십을 가지고서 그랬을 리가 없지. 아량 따위 발로 뻥 차버린 듯한 그들의 말과 행동이 야속했어.
정말 외롭고 쓸쓸했겠다. 초임 때는 왜 그렇게 하는 일마다 실수로 번져가고, 아무도 없었으면 하는 상황에 교장 선생님이 오시고, 반 아이들과의 관계는 좋았다 나빴다 시소 타기 바쁘고. 하루 종일 허둥지둥 댔는데 잘한 것 하나 없음을 깨달으며 집에 가는 길, 눈물 꾹 참고 '다녀왔습니다!' 외쳤던 날이 너만큼이나 나도 많았어. 교사가 된 자식이 늘 자랑스러운 부모님에게도 마치 날 때부터 교사였다는 듯 점잖게 굴기 시작했다는 건, 적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던 거라 낙관하기로 하고. 너도 그랬을 거라 생각해. 종종 만나 기울이는 술잔에 고개를 푹 박고 눈물을 뚝뚝 흘릴 때, 알았어. 그래그래, 잘했어. 더 울어. 크게 왕 하고 울어버려.
여기 다 큰 교사가 울고 있어요. 그러니 상냥한 여러분, 부디 모른 척해주세요.
나는 떠났지만 여전히 일선 현장에 있는 너의 마음은 때때로 벌판에 선 기분일 거야. 열지도 닫지도 못한 마음의 작은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내내 맞으며. 매일 겨울일 것 같은 그곳에서,
그럼에도 어딘 가에 분명히 있을 작은 봄의 흔적들을 찾아내보자고 말해볼게. 내가 찾은 방법은 학생들이었어. 지치고 속상해서 좁고 어두운 곳에 스스로 가지려고 할 때도, 아이들만큼은 나를 늘 밝은 곳으로 이끌어줬던 것 같아. 속 썩이고 못되게 구는 애들도 물론 많았지만, 아이들은 용서한 만큼 성장으로 되돌려주는 무언가가 늘 있었어. 그리고 나를 단단하게 연마해. 쉽게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을 무장해. 자존감도 지키고. 난 너무 바닥에 가 닿으면 '나도 집에 가면 내가 최고라 하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의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소중한 자식이다.'도 읊조렸어. 너도 해보렴. 널 무한대로 신뢰하는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질 거야. 가족에 이어 널 믿는 사람 명단에 나도 포함해 줘. 난 너보다 착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가장 선하고 올바른 것이라 믿고 있어.
너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 너를 향해 좀 더 독해져야 한다, 모두를 믿으면 안 된다, 손해 보면 안 된다,라고 얘기하면서 '회사에서는 너무 착하기만 하면 안 돼.'라고도 했을 거야. 하지만 너와 헤어지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후회가 밀려왔어. 너무 속상한 나머지 너의 근간을 흔드는 말로 너를 더 헷갈리게 한 것 같아. 너와 같은 사람이 만들어가는 교실과 학교가 더 많아야 해. 조금 돌아가며 아프고 힘들겠지만, 부디 강해져서 선한 선택들이 내일의 너를 만들기를 바라. 더 이상 착한 사람을 그만두지 말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