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면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어. 그런데 학교에 와서 아이들에게 "샘, 기억력 좋으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돼서 의아했지. 알고 지낸 지 몇 번 만에 '수풀아' 라고 이름을 불러주면, 학생들 중 열에 아홉은 "샘~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라고 말해. 그때 숨김없이 동그래지는 눈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걸까. 억지로 외우려고 들여다보고 읊조린 건 아닌데 아이들 이름은 그냥 툭 튀어나올 때가 많았어.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콕 박혀서 그런가.
이름을 잘 외우는 신기한 선생님의 포지션은 연차가 쌓일수록 나름 교사로서의 긍지가 되었어.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늘 연말 즈음에 교원평가 결과를 볼 수 있었거든. 나 운전 좀 잘하는 것 같아서 어깨에 힘 들어간 초보 운전자에게 워워~ 자중 하라며 어김없이 날아오는 행운의 편지, 교통질서 위반 범칙금 통지서처럼 말이야. 나의 수업, 생활지도 등을 5점 만점으로 환산해 평가받는 건 아무렇지 않았어. 평가의 목적은 더 나아지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잖아. 그래서 평가 결과를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 5점 만점에 4.3점과 3.8점이 나타내고자 하는 차이를 잘 모르겠더라고. 그걸 들여다보고 앞으로 교사로서 뭘 더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더라고. 숫자는 잘 몰라도 독해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 학생들이 남긴 나에 대한 서술형 답변은 늘 정독했어. 그곳에 남기는 건 선택사항인데 그냥 넘기지 않고 몇 자 적는 정성이라면 분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아이들이 남긴 흔적일 거라 생각했거든.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매해 서술형 답변 칸에 쓰여 있는 단골 답변이야. 이름을 불렸을 때 깊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맑고 동그래졌던 두 눈 안에 담겨 찰랑이던 그 말. 이렇게나마 연말이 되어서야 알게 되곤 하지. 서른 해 넘게 살다 보니 어떤 이에게 온 편지는 잘 도착하기만 한다면 몇 년이 지나 전해져도 상관없기도 하더라. 흔들리는 정체성의 최전방에 외로이 서 있는 너희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어. 이윽고 이름을 불린 너희가 날 돌아볼 때 전해오는 울림에 내 마음 슬쩍 울어 보곤 했어. 이름에도 유행이 있는 맞지? 해마다 비슷한 이름의 학생들이 졸업하고 또 입학하더라고. 그중에 내게 한 번 각인된 이름의 주인은 해가 지나도 이름만의 고유한 느낌을 남기더라. 학교를 나온 지금도 그 이름을 마주하면 어떤 아이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혼자 웃어.
수정, 예인, 진희, 지예, 혜진, 희원, 세희, 승현, 규리, 지은, 인영, 주연, 정은, 지원, 현경, 나래, 민경, 은영, 민아, 승민, 혜린, 지수, 채원, 예진, 현주, 소현, 유진, 선민, 혜정, 수빈들아.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던 늘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