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여름밤이면 모기장을 치곤 했다. 거실 가장자리를 둘러싼 모기장 안에서 온 가족이 누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모기장 아래를 살짝 들고 화장실이라도 갈ᅠ때면, 행여나 그 틈을 타 모기들이 들어올까 잔뜩ᅠ긴장했다. 어떤 날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창밖의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스르륵 잠이ᅠ들었는데, 때로는 바깥바람에 선풍기를 더해도 더위를 날릴 수 없어 어깨를 맞댄 가족들이 밉기도 했다.
온 가족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도 모기들을 어떻게든 모기장을 뚫고ᅠ들어왔다. 다리와 팔이 주 희생양이었는데, 가끔 손톱 바로 윗부분을 물리면 하루 종일 간지러움을 잊을 틈이ᅠ없어 짜증이 나곤 했다. 모기장만으로 부족할 땐 향을 피우거나 매트를ᅠ켰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매트를 전기에 연결된 동그란 기계에다 끼우면ᅠ다음 날 아침엔 그 파란 매트가 하얗게 변해ᅠ있었다. 무슨 원리인지도 모르면서 색이 변하는 매트를 보면 왠지 모르게 신비한 효과가 있을 것만 같은 믿음이ᅠ생겼다.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모기들과 내 나름대로의 평화협정을 맺은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대학교 근처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방에는 작은 에어컨이 있어 여름밤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모기가 들어올 틈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답을 찾아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모기장도 없는 작은방이었다. 불을 끄면 귓가에ᅠ왱왱거리고 불을 켜면 어디론가ᅠ사라졌다.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책상ᅠ끄트머리, 커튼, 천장 한구석에 모기가 조용히ᅠ앉아있었다. 파리를 낚아채는ᅠ도마뱀처럼, 쥐를 사냥하는ᅠ매처럼, 적장을 사살하는 명사수처럼 날카롭게 손바닥을ᅠ날렸다. 시체를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잠자리에ᅠ들면... 또다시 귓가에ᅠ위이이잉, 하는 소리가ᅠ들렸다.
전쟁 같은 여름밤을 몇 해 견뎌낸ᅠ뒤에야, 모기들과의 타협점을 찾았다. 팔 하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온몸을 얇은 이불로 가리고 얼굴을 내어 놓은ᅠ뒤, 팔 한쪽을 꺼내 주면 모기들은 더 이상 귓가를 맴돌지 않는다. 그렇게 내 팔은 모기밥이 되고, 대신 숙면을 얻는다. 여름밤에 모기들이 알려준 협상의 본질이랄까.
열아홉의 끝을 지나 맞이한 새해. 스무 살이 되자 그 전의 1년들에 비해 갑자기 많은 기회와 자유가 찾아왔다. 무엇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심플하고 좁았던 나의 인생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마주치면 눈인사도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틈도 없이 새로운 사람이 말을 걸었다. 폭발하는 인간관계의 홍수 속에 표류하는 작은 나뭇잎 같았던 나는 늘 사람이 고팠거나, 때때로 혼자 있고 싶었거나. 모두에 대해 다 알고 싶은 마음과 모두에게 나에 대해 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의 다툼이 잦았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 나에게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찼던 시절이었다.
너는 살아오며 멈칫했던 갈림길이 어디였니.
형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건가요.
선배는 지금은 무엇을 보며 걷고 있나요.
스무 살의 대학생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들고 앉아서는 하염없이 주절주절 거리고 싶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느릿느릿 모여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무리에 섞이곤 했다. 시간도, 시절도 영원할 수 없는 걸 알지만 그때는 감히 영원을 꿈꿨다. 달도 기우는 밤의 한가운데에 가닿더라도, 달뜬 마음은 여름밤의 후끈한 공기를 마시고 자라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믿었다. 그 마음과 그 밤들은 어김없이 비슷한 표정을 하고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올 것이라고.
수많은 여름밤을 지나쳐오며 여름밤 특유의 냄새가 있음을 알았다. 그 냄새는 낯선 이의 살냄새, 약간의 담배 연기, 이름을 알 리 없지만 어딘가 익숙한 풀꽃의 향기, 금방 빗물에 닿아 젖기 시작한 아스팔트의 냄새가 섞여 있다. 며칠 전부터 느꼈다. 여름이 왔음을. 낮이 아닌 밤에 여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코끝에 머무는 여름밤의 냄새는 모두 내 편인 것만 같았던 스무 살, 그때의 뜨거운 여름 속으로 데려간다. 이젠 수없이 많은 모퉁이를 돌아도 마주치기 힘든 인연들이었다. 우리가 각자 걸어가던 길은 어느새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지나고 보니 인생의 엑스트라였던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그 여름밤의 냄새가 날 다시 살게 한다. 여전히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 설익은 단어와 어린 문장은 그때의 모두와 나눠 가진 것들이 남긴 자국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