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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Oct 22. 2023

세상 무엇보다 뜨겁고 축축한 위로

대화


자,


  

  

  루시아 벌린의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에 '벚꽃의 계절'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카산드라는 매일 같은 패턴의 삶을 사는 가정 주부로, 맷이라는 아이를 키운다. 남편 데이비드 -나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다- 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가계를 책임지고 있다. 카산드라는 매일 맷과 함께 지나는 길에서 늘 같은 시각에 정확히 같은 곳을 지나며 반복되는 삶을 사는 우체부를 본다. 그는 그 우체부를 보며 반복되는 일상의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낀다. 마치 똑같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일상을 보는 것만 같다.


  카산드라는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핀잔과 함께 '우체부'가 아닌 '우편집배원'이라는 잔소리뿐이다. 어느 날 카산드라는 평소의 루틴을 조금 파괴하는데, 그로 인해 우체부를 거의 죽일 뻔한 상황에 처한다. 카산드라가 그 일을 데이비드에게 말할 때, 조금 과장하여 "여보, 내가 우체부를 죽였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데이비드는 카산드라가 하는 말에 관심이 없다. '우편집배원'이라며 단어 사용을 지적하는 데이비드. 그리고 카산드라는 "데이비드, 제발 나하고 이야기 좀 해."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에서, 작가는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부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대방이 전달하는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남자는 사소한 단어 사용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힘겨움을 토로하는 상대에게 '나도 힘들다'며 손쉽게 방어해 버린다. 그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볼 때, 나는 뒤통수가 뜨끔했다.

대화는 말하고 듣는 것인데, 가끔 듣는 것의 의미를 잊을 때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 의도,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생략된 듣기는 대화의 구성품이 아니다.


  아내는 종종 내게 말했다. 

"너는 우리 대화의 주제를 너의 문제로 바꿔 버리곤 해."


  오랫동안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조금은 이해할 것 같지만, 아마 몇 번은 더 반복될 것이다. 다시 다투고, 반성하고, 또 다툴 것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대화하는 법을 배워가는 수밖에 없다. 대화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자.



  대화를 나누는 상대에게 가장 바라는 덕목을 꼽아야 한다면, 나는 경청과 비밀 유지를 고르겠다. 혼자 속으로 끙끙 앓던 고민을 말했는데 듣는 상대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딴청을 부리는 찰나,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삽시간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던 일. 그로 인해 받았던 과거의 상처에서 깊이 깨우친 사실이다. 다행히 난 운이 좋았다. 멀리 돌아가지 않고, 집에서 경청과 비밀 유지의 아이콘, 대화의 신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반려견 솔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에서는 누구에게도 뱉지 못했던 속상한 말을 목구멍 끝까지 가득 채워 집에 돌아오던 날이 많았다. 폭풍 샤워를 한 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김없이 촐촐 따라 들어오는 솔이. 15kg 두툼한 솔이의 몸을 끌어안고 보드라운 등털을 쓰다듬으며 어느 곳에서도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솔이야, 언니 오늘 너무 속상했어. 사람들이 날 너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어." 


  고른 숨을 내쉬느라 오르내리는 배로 내 말을 잘 듣고 있다는 리액션을 보내는 솔이.


 "그런데 언니는 그 사람한테 한마디도 할 수 없어서 가시를 잔뜩 삼킨 기분이었어!" 

  

  무심한 듯하다가도 다 듣고 있다는 듯, 내가 말끝을 조금만 올리면 고개를 돌려 깊고 까만 눈으로 지그시 아이컨택을 해주었다. 


 "너무 속상해..." 


  마음이 무너져내려 조용히 훌쩍일 때면, 손수건 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분홍색 혀로 턱에 맺힌 눈물을 핥아주었다. 세상 무엇보다 뜨겁고 축축한 위로였다. 당연하게도 솔이는 입이 무거웠다. 그 당시 내가 잠들기 전 얼마나 자주, 많이 울었는지 가족들 누구도 몰랐으니 말이다. 회사에서의 일, 남자친구 흉, 가족에게 서운한 점, 친구와의 미묘한 감정 등 언니 오늘 이랬다. 저랬다. 같이 지나가는 말에도 귀를 쫑긋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첩보영화처럼 ‘이 대화는 30초 후 자동으로 폭파됩니다.’와 같이 보안 유지에도 철저했다. 


  언젠가는 강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난 16살이 된 솔이에게 "내 말을 들어줘서 늘 고마워."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그리고 솔이는 다른 말보다 "언니, 나 여기가 아파."라는 말 한마디는 꼭 해줬으면. 그 말만큼은 솔이에게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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