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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Oct 22. 2023

아내가 치맥을 허락해 줬다

행복



자,


  

  겁쟁이 강아지를 데리고 새벽 산책을 나간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에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 강아지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다가 금방 응아를 한다. 손끝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한, 윤기가 흘러 반짝이는 녀석이다. 우리 강아지, 건강하구나.


  이른 출근이다. 새벽에 집을 나섰는데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플랫폼에 닿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한다. 사람이 많지 않다. 웬일로 앉을자리가 있다.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한다. 일곱 시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늘 어색하게 인사하던 옆팀 서무님의 자리도 비어있다. 마음이 편하다. 커피를 한 잔 내린다.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 향이 사무실에 번진다. 책을 펼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다. 최근 펼치는 소설마다 조금씩 아쉬웠는데, 이 책은 초입부터 몰입감이 보통이 아니다. 역시 믿을만한 작가다. 여덟 시까지 책을 읽는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롯이 고독하고 조용하다.


  며칠 전 야심 차게 구매한 주식이 갑자기 우상향을 시작한다. 뉴스검색을 해보니 여러 가지 호재가 겹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혹시나 싶어 그때 판매한 주식의 수익률을 찾아본다. 파랗고 또 파랗다.

일주일째 아내를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진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두통은 이유를 모른 채 사라진다.


  집에 오는 길에 넷플릭스 앱을 켠다. 우연히 발견한 SF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재생한다. 의외로 재미있다. 시간이 금방 흐른다. 어느새 집이다.


  아내가 치맥을 허락해 준다. 아버지가 만든 수제 맥주를 딴다. 이번엔 대성공이다.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높은 편이라 약간 취기가 오른다. 알딸딸한 기분을 안고 저녁 산책을 나선다. 하늘은 깊은 바다색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적당히 바람이 분다. 이제 벌레도 없다. 하얀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오른다. 작은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받쳐 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자.


  혼자 이상한 생각에 빠졌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숨길 수 있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갑자기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랑을 한 문장으로 정의해 보세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대머리가 된다면 어떻게 위로할 건가요." 같은 질문을 하는 상상을 한다. 오래된 상상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 아주 멋진 답변을 준비해놓고 싶은데 늘 부족하다. 며칠 전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꽂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예전 95.9Hz. 의 별이 빛나는 밤에 빠져 살던 여고생의 감성을 끌어모아 일상에서 반짝하고 빛났던 순간을 수집해 보았다.


  저녁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남편과 반려견과 공원에 나가 산책할 때 한꺼번에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보게 되었을 때, 꽉 막힌 서울의 번화가를 운전하는데 신호를 잘 받아서 멈춤 없이 통과할 때,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연속으로 나올 때,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생각보다 많은 별이 빛날 때, 별생각 없이 건넨 농담에 남편이 바람 빠지듯 피식하고 웃을 때, 동네에서 맛있는 빵집을 발견해서 단골이 될 거라 다짐할 때, 기대도 안 한 카페에서 두유, 귀리 우유와 같은 비건 라테 옵션을 제공할 때, 늦게 들어왔는데 지하 주차장에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떡하니 남아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맛집에 데려간 지인이 나보다 더 맛있게 먹을 때, 반려견이 아침저녁 시원하게 배변에 성공할 때, 그리고 그 배변의 질이 감탄이 나올 만큼 좋을 때, 새로 산 물건에 붙어있는 바코드 스티커가 한 번에 깔끔하게 떨어질 때, 여행지에서 급히 고른 숙소가 생각보다 너무 괜찮을 때, 남편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잠든 모습을 몰래 촬영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또 몰래 볼 때, 웃기는 영상이나 짤을 저장해서 언니에게 보내고 언니의 반응을 기다릴 때, 혼자 거울을 보고 짧아서 잘 안 잡히는 흰머리를 족집게로 단번에 뽑았을 때, 퇴근할 때 우연히 만난 동료를 차에 태우고 가까운 곳에 내려 줄 때.


  두서없이 생각해 봤는데 끊임없이 줄줄 나왔다.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가진 나의 행복을 떠올리다 보니, 난 정말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 또 행복해졌다. 그래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요?"에 대한 지금의 내 답변은 이러하다. 


  즐거운 순간을 짧은 글로 적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 붙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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